공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학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교육제도권 내에서의 공부와 능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제도권 밖에서의 공부가 그것이다. 나는 제도권 밖, 즉 사회에서 여러 책들을 보며 하는 공부를 대단히 강조하는 사람이다.

경영자로서 경제적 측면만을 고려하여 볼 때 대학원은 이 사회에서 최고로 인정해 주는 학교와 잘 팔리는 전공을 선택하여야 경제적 투자 가치가 높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보다 공부를 상대적으로 ‘아주 잘하며’, 전공이 ‘돈 버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나이가 많지 않다면 고학력을 추구한 대가를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투자 대가를 경제적으로 크게 기대하지는 말아라.

나는 자격증이 당신의 연봉을 제한하고 당신이 부자가 되는 길에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보면 학교를 어디까지 다녔든지 간에 몇 개월 학원에서 배워 획득한 자격증에 의해 진로가 결정되는 사람들이 많다. 취직을 하기 위한 보조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경우이건 직업 선택으로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경우이건 간에 그 자격증이 자신의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라. 자격증은 당신을 봉급생활의 쳇바퀴 속에 던져 넣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당신이 이 세상에서 운신할 공간을 제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갈 기회를 당신 스스로 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군다나 국가나 민간단체에서 주는 자격증(이 두 가지 종류를 구분조차 못 하는 사람들도 많다)의 상당수에는 엄청난 환상이 들어가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자격증이나 면허증이 당신을 평생 편안하게 벌어먹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조금도 갖지 말라.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진짜 실력이지 이론 나부랭이가 아니다.

전문직들이 대체적으로 다른 직업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가치와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딱 잘라 말해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수입을 얻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큰 부자가 나오기도 쉬운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그 어떤 유망한 전문직이라도 동일한 자격증이나 면허를 보유한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난다. 그 결과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자격증에 대한 사회의 대가는 갈수록 적어지게 된다.

공부를 많이 한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하였으므로 돈을 많이 벌고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로 갖지 말라. 이 세상에는 당신보다 가방끈이 더 긴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당신이 갖고 있는 면허증이나 자격증을 똑같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경쟁자들은 비자격자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똑같은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전문직 종사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먼저 약점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첫째는 자부심이다. 자기를 대단한 전문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것은 특정 분야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것뿐이지, 같은 직종의 다른 전문가들과는 비슷비슷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객이 볼 때는 ‘그놈이 그놈’일 수도 있다.
둘째,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일반적으로 형편없다. 자기의 면허증으로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교육이나 고객 서비스에 대하여 무심하다. 그리고 그 직원들 때문에 고객이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셋째,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른다. 마케팅이나 경영, 고객만족, 재테크 등에 관하여 잘 모르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생각하는 풍조도 있다. 부동산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건물을 사면 대부분 바가지를 쓴다(새겨들어라. 나는 부동산을 팔 때 구매자가 전문직 종사자일 경우를 제일 좋아한다). 팔 때는 시세도 잘 모르면서 무조건 비싸게 내놓는다(그래서 나는 부동산 매입 시에는 전문직 종사자들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면에 자기 수입이 적으면 그저 세상 탓만 하고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넷째, 자기가 관련된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가 뜻밖에도 느리다. 그저 자기가 공부하였을 때의 교과서에 담긴 지식만을 꽉 껴안고 사는 경향이 강하다.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 이후부터는 더 이상 다른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실력들이 고만고만하게 된다.

전문직 종사자들은 갑자기 떼돈을 벌 기회가 거의 없다. 면허증 하나 믿고 섣불리 빚을 지지 말라는 말이다. 월수입이 다른 봉급생활자보다 많다고 해도 그 수입은 언제나 경기에 민감하게 변동한다. 그러므로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경제신문을 반드시 읽어라. 특히 부동산에 대하여 많이 배워 두어라. 생명보험도 반드시 들어라. 당신이 갑자기 죽으면 당신 가족은 정말 살기 힘들어진다(

기업에서 사람을 뽑을 때는 학벌과 전공을 따지지만 다른 선발 기준이 마땅한 것이 없다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지, 학벌이 좋고 전공이 기업의 구미에 맞는다고 해서 졸업자들이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차 서류전형에서 통과한 자들 중 합격자를 가려내는 기준은 전공 관련 지식이 아니라 정말 엉뚱하게도(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면접에서 파악된 ‘기본적인 인성이나 태도, 의사표현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 같은 것이다. 정작 필요한 실무 지식은 회사에서 재교육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지금까지 나는 이른바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면’ 학벌도 좋고 전공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류대 갈 실력은 안 된다면? 일류대 수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서 ‘돈 버는 일’과 관련된 전공을 택하여라. 공부를 못해서, 혹은 안 해서, 일류대와는 거리가 먼 이름 없는 대학을 갈 수밖에 없다면?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있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면 그저 효도하는 마음으로 다니되 대기업에 취직하고자 생각하기보다는 공무원 시험을 보든지 아니면 작은 회사에 들어가 경력을 닦으면서 조속히 학벌을 세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돈이 있으면 명문대 대학원을 다니라는 말이다(대학 학점이 좋아야 한다).

이상야릇한 자격증에 혹하여 시간과 돈을 뺏기는 어리석음은 일찌감치 버려라. 그보다는 중소기업에 들어가 일을 배우며 경력을 쌓은 뒤 전직을 시도하여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중소기업은 기술 계통이 아닌 한 전공에 크게 예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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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 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법궁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서양에 팰리스(palace), 팔레(palais)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많다지만 이는 왕이 통치하는 궁궐이 아니라 왕가의 집인 경우가 많다. 서울의 운현궁·남별궁·연희궁·육상궁·경모궁 등과 비슷한 곳들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이 경복궁과 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 있다.

창덕궁 전경| 서울은 ‘궁궐의 도시’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돌이켜보건대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태조 4년(1395)이고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년(1405)이었다. 조선 개국 후 10년 사이에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지어진 두 궁궐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비극의 소산이었지만 결국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산이 되었다. 당시 이 엄청난 두 차례의 대역사(大役事)에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조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창덕궁을 제대로 답사할 양이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 월대(月臺)에서 시작해야 한다. 궁궐의 모든 주요 건물 앞에는 지표에서 높직이 올려쌓은 평편한 대가 있는데 이를 월대라 한다

우리나라 조원(造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 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 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돈화문 안쪽 빈 마당엔 원래 어도가 깔려 있었다. 순종의 자동차가 궐내로 들어오면서 없어졌지만 어도를 복원해야 궁궐의 동선이 명확해지고 공간의 의미도 살아난다. 어도는 금천을 가로지른 금천교에서 직각으로 꺾여 다리 건너 진선문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진선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인정문 너머 인정전에 다다르게 된다. 돈화문에서 인정전에 이르는 길은 이처럼 ㄱ자로 꺾였다가 다시 ㄴ자로 꺾이는 동선이다. 바로 이 점이 창덕궁 궁궐 배치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일직선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동선이 계속 꺾이면서 공간이 자잘하게 분할되어 여러 개의 블록을 이룬다. 그래서 경복궁은 장중한 궁궐 의식과 어울리는 반면 창덕궁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의 생활이 그려진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궁궐에는 반드시 금천이라는 냇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경복궁에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인공적인 물길을 만들었지만, 창덕궁의 금천은 북악산 줄기의 매봉에서 돈화문 쪽으로 흘러내리는 자연 계류이며, 장대석으로 호안석축(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을 둘러 궁궐답게 말끔히 정돈했다. 〈동궐도〉 그림을 보면 냇물이 장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물길이 바뀌고 지하수가 고갈되어 비가 올 때만 금천 역할을 할 뿐 대개는 맨바닥을 드러내는 마른 내〔乾川〕가 되고 말았다.

금천교는 상판을 약간 둥그스름하게 다듬은 쌍무지개 다리다. 난간엔 연꽃 봉오리가, 양쪽 기둥엔 네 마리의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동물도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전설 속 백수(百獸)의 왕인 산예(?猊)다. 상상의 동물인 산예는 대개 사자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고려청자 ‘산예 출향(出香)’을 흔히 ‘청자 사자모양 뚜껑 향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정전은 정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품위 있고 듬직하고 잘생겼다. 낮은 듯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어 대지에 내려앉은 안정감이 있다. 경복궁 근정전은 3단의 석축 위에 난간석이 둘려 있으나 창덕궁 인정전은 월대가 2단으로 되어 있고 건물의 크기도 약간 작아 검박하지만 궁궐의 품위는 잃지 않고 있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 인정전|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인정전은 회랑으로 둘려 있어 품위와 권위가 살아나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정전 | 정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품위 있고 듬직하고 잘생겼다. 낮은 듯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어 대지에 내려앉은 안정감이 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덕궁 궁궐 건축의 미학| 후원의 아름다움에 가려 종종 그 건축적 가치가 지워지곤 하는 창덕궁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구현해놓은 대표적인 궁궐이다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新作宮室儉而不陋華而不侈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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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학문•철학/상업 문화

고조선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상업이 활발했다. 위만조선이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시도한 것. 삼국은 물론 발해까지 중국과 북방 민족, 일본 등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기록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가 되면 대외 무역은 더 활발해진다. 통일신라는 울산항, 고려는 벽란도에서 이슬람 상인들과 교역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었고 대부분 사치 품목 위주로 상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가 되면 이러한 역동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고 유학 사상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상업은노력하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나쁜 노동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오랜 기간 중농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다만 왕실과 양반 사대부의 생활에 부응하기 위해 종로에시절 상인이 활동하고 제한적 범위에서 중국, 일본과 무역을 벌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여러 변화가 나타난다.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무허가상인인 난전상인이 등장했고 선박을 동원해 운송업으로 큰 이윤을 내는 선상 포구에서 도매를 하고 은행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객주, 여각 등이 나타났다. 또 특정물품을 매점매석하는 독점 상인 도고가 등장했다. 지방에서는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물건을 파는 보부상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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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문화/조선의 관료 제도

조선은 고도의 중앙 집권 사회를 지향했다.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뽑았고 여타의 수단으로 권력 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방의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했고 중앙에서는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중국의 관료 제도를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룩한 결과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층 정교화됐다.
조선은 장원을 비롯하여 과거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재들을 주로청요직에 발탁했다. 청요직은 삼사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을 말한다. 사헌부는 관리를 규찰하고, 사간원은 언론 역할을 담당하고, 홍문관은 경연, 국왕의 공부를 주관하는 기능을 한 곳으로 관직은 낮지만 국가 운영에 관해 직언할 수있었고 여론을 조성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보통 삼사의 관원을 거쳐야만 판서, 재상 같은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중앙 정치는 의정부와 6조에서 주관했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의정부에서 국정을 총괄했다. 일반적으로는 좌의정이 실세였다고 한다. 6조는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조는 인사권을 관할하고, 병조는 군권을 관리했기 때문에 가장 위상이 높은 기구였다. 사극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이 제후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황제가 아닌 왕, 폐하가 아닌 전하, 태자가 아닌 세자 그리고 6부가 아닌 6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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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 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 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 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 정전|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종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종묘제례가 다시 재현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1971년부터였다. 김수근, 김중업 등 해방 후 제1세대 건축가들이 종묘에 주목하면서 오랜 침묵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외국을 경험하고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건축가로서 민족적·애국적 관점에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종묘 건축의 미학적 함의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했다. 전통 건축물임에도 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감동적인, 거의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예찬했다.

종묘 정전은 우선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을 두른 이 정전은 예상을 깬 그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정문인 남쪽의 신문(神門)을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이 지면을 깊게 누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색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외국인들이 종묘를 보고 감동한 것은) 파르테논 같은 외관의 장중함이었을 게다. 그러나 종묘 정전의 본질은 정전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프랭크 게리가 왜 다시 종묘를 보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무어라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당시 게리와 동행했던 기자가 쓴 글이 『S매거진』 9월 16일자에 실려 있어 그 기사를 따라가본다.

신문인 남문에 당도하여 정전의 기다란 맞배지붕이 시야를 완전히 압도하는 순간 그는 문득 멈추어 서서 마음을 추스르는 듯, 기도하는 듯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종묘를 감싼 공기 한 모금조차 깊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정전 앞에 선 프랭크 게리| 파격적인 건축으로 이름 높은 프랭크 게리는 단순하면서 장엄한 종묘 정전 앞에서 조용히 이 건축의 미학을 음미하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게리 일행은 종묘 신실을 재현해놓은 공간과 종묘제례 DVD를 10여 분간 관람했다. 안내원이 게리에게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여기에서 종묘제례가 열린다고 하니 이렇게 물었다.

"그때 오면 나도 볼 수 있습니까?"

역시 대가는 명작을 그렇게 바로 알아보았다. 게리의 건축과 종묘는 정반대의 세계이다. 형태에서는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재료에서는 금속과 목재, 지역적으로는 서양과 동양, 시간적으로는 현대와 전통, 어느 모로 보나 양극을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와 나라와 양식이 달라도 대가는 대가끼리, 명작은 명작끼리 그렇게 통하는 바가 있다.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그래서 옛 임금들이 나라에 혼란이 닥치면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종사(宗社)를 어찌하려고…"라며 위기감을 표하곤 했던 것이다. 좌묘우사에서 왼쪽이 더 상위의 개념이니 그중 종묘를 더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종묘는 19칸의 정전과 16칸의 영녕전, 공신각과 칠사당 그리고 제례를 위한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정전 하나뿐이었고 그것이 곧 종묘였다. 규모도 7칸으로 작았다. 정전이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고 영녕전이라는 별묘까지 건립된 것은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가 낳은 결과였다.

위에서 내려다본 정전의 풍경| 종묘를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서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자리앉음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과연 신전이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一) 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月廊)을 달아 짧은 ㄷ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것 같아도 이 월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태종의 건축적 안목은 종묘 건물에 월랑을 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假山)을 조성했다.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녕전| 더 이상 종묘에서 모실 수 없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종은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영원히 후손들과 함께할 수 있게 했다.

증축을 거듭한 영녕전| 왕조가 이어지면서 신주를 모실 분이 늘어나 정전과 영녕전을 계속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헌종 2년에 마지막으로 영녕전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인 16칸을 갖추었다.

영녕전의 측면| 영녕전에는 좌우로 날개를 단 듯한 월랑이 있어 신전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영녕전의 열주|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을 측면에서 보면 열주의 행렬이 장관으로 펼쳐진다. 신전으로서 종묘의 엄숙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헌종 대의 증축이 마치 왕조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이 모두 채워지고 더 이상의 빈 공간이 없어졌다. 정전의 마지막 신실인 제19실에는 순종을 모셨고, 영녕전의 마지막 칸에는 영친왕을 모시면서 16개 신실이 다 찼다. 그러고는 더 모실 신위도 빈 신실도 없었으니 왕조의 종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현재 정전에는 19분의 왕(왕비까지49위)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왕비까지34위)을 모셨다. 조선의 역대 임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태정태세문단세…" 대로 27명이지만 35명의 왕이 모셔진 것은 태조의 선조 네 분,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익종)처럼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분이 열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후의 수가 왕보다 더 많은 것은 원비의 뒤를 이은 계비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종묘의 정전 담장 안에는 각 임금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종교 건축에서 권속(眷屬)에 해당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협시보살, 사천왕, 십대제자와 나한 등이 배속된 것, 기독교에서 열두제자와 성현을 모신 것과 같은 개념으로 임금의 치세를 도와준 공신과 천지자연의 귀신들에게도 함께 제를 올린 것이다. 한 공간에 있지만 이것들 사이에도 엄격한 위계가 있어서 칠사당과 공신당은 월대 아래 별도의 작은 건물에 모셔져 있다.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 것이 이채롭다.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 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 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종묘 건축의 미학|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 있다.

종묘의 낮은 담장| 종묘의 담장은 예상과 달리 아주 낮다. 밖에서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건물의 지붕이 드러나고, 안에서 밖을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는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 보이는 ‘비대칭의 대칭’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그렇고, 조선 왕릉에서 수복방과 수라간 건물이 그렇고, 능묘의 망주석 다람쥐가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가는 것도 그렇다. 평면으로 보면 대칭이지만 입면으로 보면 비대칭을 이룬다. 단순함이 주는 경직됨이나 지루함이 아니라 다양함의 통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기하학적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한 형태로 더 큰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과 같은 비정형의 멋이 서린 조선의 미학이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로(神路)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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