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 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법궁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서양에 팰리스(palace), 팔레(palais)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많다지만 이는 왕이 통치하는 궁궐이 아니라 왕가의 집인 경우가 많다. 서울의 운현궁·남별궁·연희궁·육상궁·경모궁 등과 비슷한 곳들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이 경복궁과 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 있다.

창덕궁 전경| 서울은 ‘궁궐의 도시’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돌이켜보건대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태조 4년(1395)이고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태종 5년(1405)이었다. 조선 개국 후 10년 사이에 전혀 다른 성격으로 지어진 두 궁궐은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비극의 소산이었지만 결국 우리 문화유산의 큰 자산이 되었다. 당시 이 엄청난 두 차례의 대역사(大役事)에 동원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던 조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창덕궁을 제대로 답사할 양이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 월대(月臺)에서 시작해야 한다. 궁궐의 모든 주요 건물 앞에는 지표에서 높직이 올려쌓은 평편한 대가 있는데 이를 월대라 한다

우리나라 조원(造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 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찬수개화는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조건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절기가 바뀌었음을 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내병조는 바로 이 찬수개화를 했던 곳이다.

돈화문 안쪽 빈 마당엔 원래 어도가 깔려 있었다. 순종의 자동차가 궐내로 들어오면서 없어졌지만 어도를 복원해야 궁궐의 동선이 명확해지고 공간의 의미도 살아난다. 어도는 금천을 가로지른 금천교에서 직각으로 꺾여 다리 건너 진선문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진선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인정문 너머 인정전에 다다르게 된다. 돈화문에서 인정전에 이르는 길은 이처럼 ㄱ자로 꺾였다가 다시 ㄴ자로 꺾이는 동선이다. 바로 이 점이 창덕궁 궁궐 배치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일직선으로 놓인 것이 아니라 동선이 계속 꺾이면서 공간이 자잘하게 분할되어 여러 개의 블록을 이룬다. 그래서 경복궁은 장중한 궁궐 의식과 어울리는 반면 창덕궁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의 생활이 그려진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더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궁궐에는 반드시 금천이라는 냇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경복궁에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인공적인 물길을 만들었지만, 창덕궁의 금천은 북악산 줄기의 매봉에서 돈화문 쪽으로 흘러내리는 자연 계류이며, 장대석으로 호안석축(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을 둘러 궁궐답게 말끔히 정돈했다. 〈동궐도〉 그림을 보면 냇물이 장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물길이 바뀌고 지하수가 고갈되어 비가 올 때만 금천 역할을 할 뿐 대개는 맨바닥을 드러내는 마른 내〔乾川〕가 되고 말았다.

금천교는 상판을 약간 둥그스름하게 다듬은 쌍무지개 다리다. 난간엔 연꽃 봉오리가, 양쪽 기둥엔 네 마리의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어떤 동물도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전설 속 백수(百獸)의 왕인 산예(?猊)다. 상상의 동물인 산예는 대개 사자 모양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고려청자 ‘산예 출향(出香)’을 흔히 ‘청자 사자모양 뚜껑 향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정전은 정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품위 있고 듬직하고 잘생겼다. 낮은 듯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어 대지에 내려앉은 안정감이 있다. 경복궁 근정전은 3단의 석축 위에 난간석이 둘려 있으나 창덕궁 인정전은 월대가 2단으로 되어 있고 건물의 크기도 약간 작아 검박하지만 궁궐의 품위는 잃지 않고 있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 인정전|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인정전은 회랑으로 둘려 있어 품위와 권위가 살아나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정전 | 정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품위 있고 듬직하고 잘생겼다. 낮은 듯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어 대지에 내려앉은 안정감이 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덕궁 궁궐 건축의 미학| 후원의 아름다움에 가려 종종 그 건축적 가치가 지워지곤 하는 창덕궁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구현해놓은 대표적인 궁궐이다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新作宮室儉而不陋華而不侈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의 아름다움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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