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남의 평가가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자기계발 서적, 관계를 다루는 심리학 서적들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매력적인 여자’란 결국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여자라는 것.
유럽에서 1년 가까이 살아보며 확신한 것이 있다. 이곳 여성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그녀들은 언제나 자연스럽다’. 모르는 이가 다가와 말을 걸어도 당황하지 않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았을 때도 자신이 원치 않는다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예의 바르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을 줄 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다칠 것 같아 망설이기보다는 한 번쯤은 넘어져도 괜찮다는 마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거절이 두려우면 부탁도, 관계도, 변화도 어렵다. 그러니 넘어지는 연습부터 시작하면 된다. 오히려 한 번도 가볍게 넘어져본 적이 없어서 더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할 말은 하자. 단,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첫째, 그렇게 말할 이유와 논리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내 말을 들은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무언가를 베푸는 것과, 그 사람이 떠날까 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내 존엄을 희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필요하다면 논쟁도 마다하지 말자.
자신과 다른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자들이 결국 자신의 인생을 가장 자신 있게 살아간다. 이것이 전 세계의 여자들이 프렌치 시크를 동경하는 이유가 아닐까?
배경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에티켓’이다. 취향, 매너, 예의범절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할 줄 아는 선택적 안목,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이 가능한 상태, 나를 존중하고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이타심까지. 이것들이 곧 에티켓의 핵심이다.
가정교육을 잘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상류층이 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노력하면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분명하다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정보를 찾고 비교하는 데 쓰이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시행착오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익숙한 환경에 머무르면 굳이 자신의 행동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생각을 털어놓을 때에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불편함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물건과 서비스와 경험이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그 선택의 과정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삶’의 한 방식이다.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다. 표현만 조금 달라졌을 뿐, 결국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진리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한자어,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라는 영어 속담을 떠올려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취향이란 것은 누군가와는 친밀해지는 역할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와는 차별화될 수 있는 기제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취향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감추려 해도 엿보이며, 침묵 속에서도 말하는 언어다.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건 곧 좋은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며, 매너는 그 취향을 타인과 나누는 세련된 방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기 전에,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알고 있다면,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선택하라. 그것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우아한 전략이며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내 안에서는 점점 피로감이 쌓였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것이 싫어질 때도 있다. 다시 그 세계에 물들어버릴까 봐. 그런데 내가 사는 도시 제네바에는 생각보다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동차 역시 실용성을 중시해 경차들이 훨씬 자주 보인다. 프랑스의 중산층의 기준이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기는 묻지 않는다. 어떤 브랜드의 가방을 드는지보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지’, ‘손님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요리 레퍼토리가 있는지’,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요즘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이 아니다.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사용하며 적절한 유머와 매너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끄는 여성. 세련되고 품위 있지만 결코 과시적이지 않은 사람. 명품은 분명 취향과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표현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은 무엇일까? 건강한 정신과 신체, 명확하고 창의적인 사고력, 호기심 있는 포용적 태도. 그리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 유머, 센스, 매너.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오는 절제된 품위. 설령 언젠가 돈을 모아 사고 싶은 명품을 산다 해도, 그건 남들과 비교해 더 잘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의미를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조용한 선택이길 바라는 마음이고 싶다.
물론 여전히 나는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을 좋아한다. 값비싸고 화려한 가방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를 증명하는 건 가방이 아니라 그 가방을 들고 어디로 향하는지일 테니까. 명품 가방은 언젠가 닳아 낡을 수 있지만 내가 살아낸 순간과 배운 태도 그리고 품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알게 되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태도는 때때로 자신을 위한 신중함이라는 것을. 특정한 날짜를 굳이 콕 집어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스쳐 지나가도 무방한 관계였다는 것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이가 채워질수록 오히려 느슨하고 얇고 긴 태도가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것을 일찍이 현명하게, 조용히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프랑스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면 가장 자주 들려오는 말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늘 여지를 남긴다. 어릴 적의 나라면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바라본다. 그것은 답변을 미루는 습관이 아니라, 오히려 열린 태도라는 것을 알기에. 흑과 백으로 단번에 잘라내지 않고 그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회색의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방식. 그래서 대화는 더 풍성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애매하다는 건 하나의 확실한 한 가지의 답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딱 부러지고 확실한, 그러나 단조로운 이미지를 가진 사람보다, 불완전함을 지닌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시선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완전함은 방치가 아니라 자유로움이고, 그 자유로움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 된다.
나는 한국에서도 나이에 따라 말투와 발언권이 정해지는 연령주의적 문화가 늘 불편한 사람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윗사람에게 반대 입장을 내세우면 말대꾸가 되고, 부당하고 불편해도 침묵하면 ‘예의가 바르다’는 칭찬을 듣는 이상한 분위기. 한국어의 존댓말은 관계를 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지만, 프랑스어의 존댓말은 관계를 옆으로 넓히는 방식이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정해진 틀에 따라야 하는 조직에서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건 나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취업’이라는 선택지를 내려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위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문화와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프랑스 문화의 차이는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적인 제스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한국의 존댓말 문화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럽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은 한국 여행 때 경험한 ‘두 손 문화’나 ‘깊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모습’ 등 한국의 세심한 예의범절에 깊은 인상을 받고 놀랐다고 했다. 두 문화 모두 존중받아 마땅한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예의를 차려 포장해도 상식적이지 않고 무례한 내용이 담겼다면 그 말은 상처를 남기는 흉기가 된다. 반대로 조금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상대를 향한 충분한 이해와 배려가 담긴 말이라면 그 말은 누군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향기를 품을 수 있다. 나이를 초월해 내게 진심을 보인 프랑스의 노교수와 내가
당신의 품격은 말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 결정된다. 반말이 무조건 나쁘고 존댓말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사회가 규정한 관습을 초월해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를 상식적으로 대하는 태도. 그리고 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낮은 사람이 조금 불친절하게 말해도 그 표현에 휘둘리지 않고 그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경청할 수 있는 태도.
서울. 이 도시는 ‘눈치’라는 단어 하나로 많은 게 설명된다. 말하지 않아도 읽어야 하고, 말하는 대신 둘러 말해야 하며,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 나를 너무 드러내지 않고, 분위기에 맞게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 환영받는 도시. 혼자보다 함께, 튀기보단 묻히는 미덕. 그 안에서 우리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예쁘게’ 맞춰진다. 유행하는 스타일에 나를 적당히 맞추고, 다듬고, 눌러낸다. 그 어딘가에는 조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유교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조용히, 부드럽게, 배려하는 척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파리. 여긴 시작부터 다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않는다. 아니, 알아도 굳이 챙겨주지 않는다. 파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꺼내야 살아남는 도시다. 처음엔 조금 버거웠다. 침묵과 경청이 호감 가는 사람이었던 한국과 달리 여기서는 자기 색깔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거리감이 오히려 편해지기 시작했다. 감정은 명확히 표현되고, 논리는 예의의 다른 말이 된다.
느림은 나를 훈련시켰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어도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조금 늦어도 인생이 망가지지 않음을, 기다림이 때로는 신뢰가 될 수 있음을. 서울에서는 숨이 막혀 도망치고 싶었던 그 침묵이 여기서는 안정감이 되기도 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모두 걸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빠른 길, 느린 길. 곧게 펼쳐진 도로, 구불구불 굽어진 도로. 어릴수록 시공간이 자주 바뀌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일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감각이,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 경험해 보자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리움의 대상은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가 나에게 허락했던 여유롭고 가벼운 마음결이었다는 것을. 결국 내가 어디에 살든, 그 결들은 내 삶의 리듬이 되어 따라올 것이다. 제네바에서 배운 느긋함, 파리에서 배운 단단함, 서울에서 배운 예민한 감각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품은 채, 앞으로도 나만의 속도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갈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나만의 삶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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