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남의 평가가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자기계발 서적, 관계를 다루는 심리학 서적들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매력적인 여자’란 결국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여자라는 것.

유럽에서 1년 가까이 살아보며 확신한 것이 있다. 이곳 여성들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그녀들은 언제나 자연스럽다’. 모르는 이가 다가와 말을 걸어도 당황하지 않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았을 때도 자신이 원치 않는다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예의 바르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을 줄 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다칠 것 같아 망설이기보다는 한 번쯤은 넘어져도 괜찮다는 마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거절이 두려우면 부탁도, 관계도, 변화도 어렵다. 그러니 넘어지는 연습부터 시작하면 된다. 오히려 한 번도 가볍게 넘어져본 적이 없어서 더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할 말은 하자. 단, 두 가지 원칙을 전제로. 첫째, 그렇게 말할 이유와 논리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내 말을 들은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무언가를 베푸는 것과, 그 사람이 떠날까 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내 존엄을 희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필요하다면 논쟁도 마다하지 말자.

자신과 다른 생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자들이 결국 자신의 인생을 가장 자신 있게 살아간다. 이것이 전 세계의 여자들이 프렌치 시크를 동경하는 이유가 아닐까?

배경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에티켓’이다. 취향, 매너, 예의범절이라고도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구분할 줄 아는 선택적 안목,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이 가능한 상태, 나를 존중하고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이타심까지. 이것들이 곧 에티켓의 핵심이다.

가정교육을 잘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상류층이 되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조금만 더 신경을 쓰고 노력하면 남다른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배워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 분명하다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정보를 찾고 비교하는 데 쓰이는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시행착오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 익숙한 환경에 머무르면 굳이 자신의 행동을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생각을 털어놓을 때에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불편함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물건과 서비스와 경험이 나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그 선택의 과정 자체가 이미 ‘아름다운 삶’의 한 방식이다.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다. 표현만 조금 달라졌을 뿐, 결국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진리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한자어,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라는 영어 속담을 떠올려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취향이란 것은 누군가와는 친밀해지는 역할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와는 차별화될 수 있는 기제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수도 있다.

결국 취향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드러나고, 감추려 해도 엿보이며, 침묵 속에서도 말하는 언어다.

좋은 취향을 갖는다는 건 곧 좋은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며, 매너는 그 취향을 타인과 나누는 세련된 방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기 전에,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알고 있다면,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선택하라. 그것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우아한 전략이며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내 안에서는 점점 피로감이 쌓였다. 그래서 한국에 가는 것이 싫어질 때도 있다. 다시 그 세계에 물들어버릴까 봐. 그런데 내가 사는 도시 제네바에는 생각보다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동차 역시 실용성을 중시해 경차들이 훨씬 자주 보인다. 프랑스의 중산층의 기준이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기는 묻지 않는다. 어떤 브랜드의 가방을 드는지보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지’, ‘손님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요리 레퍼토리가 있는지’,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요즘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이 아니다.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사용하며 적절한 유머와 매너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끄는 여성. 세련되고 품위 있지만 결코 과시적이지 않은 사람. 명품은 분명 취향과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표현해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사람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은 무엇일까? 건강한 정신과 신체, 명확하고 창의적인 사고력, 호기심 있는 포용적 태도. 그리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 유머, 센스, 매너. 행동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오는 절제된 품위. 설령 언젠가 돈을 모아 사고 싶은 명품을 산다 해도, 그건 남들과 비교해 더 잘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의미를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조용한 선택이길 바라는 마음이고 싶다.

물론 여전히 나는 반짝이고 예쁜 물건들을 좋아한다. 값비싸고 화려한 가방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나를 증명하는 건 가방이 아니라 그 가방을 들고 어디로 향하는지일 테니까. 명품 가방은 언젠가 닳아 낡을 수 있지만 내가 살아낸 순간과 배운 태도 그리고 품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알게 되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태도는 때때로 자신을 위한 신중함이라는 것을. 특정한 날짜를 굳이 콕 집어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는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스쳐 지나가도 무방한 관계였다는 것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이가 채워질수록 오히려 느슨하고 얇고 긴 태도가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것을 일찍이 현명하게, 조용히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프랑스 친구들과 함께하다 보면 가장 자주 들려오는 말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늘 여지를 남긴다. 어릴 적의 나라면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바라본다. 그것은 답변을 미루는 습관이 아니라, 오히려 열린 태도라는 것을 알기에. 흑과 백으로 단번에 잘라내지 않고 그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회색의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방식. 그래서 대화는 더 풍성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애매하다는 건 하나의 확실한 한 가지의 답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딱 부러지고 확실한, 그러나 단조로운 이미지를 가진 사람보다, 불완전함을 지닌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시선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완전함은 방치가 아니라 자유로움이고, 그 자유로움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 된다.

나는 한국에서도 나이에 따라 말투와 발언권이 정해지는 연령주의적 문화가 늘 불편한 사람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윗사람에게 반대 입장을 내세우면 말대꾸가 되고, 부당하고 불편해도 침묵하면 ‘예의가 바르다’는 칭찬을 듣는 이상한 분위기. 한국어의 존댓말은 관계를 위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지만, 프랑스어의 존댓말은 관계를 옆으로 넓히는 방식이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고 나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정해진 틀에 따라야 하는 조직에서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건 나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취업’이라는 선택지를 내려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위계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문화와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프랑스 문화의 차이는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적인 제스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한국의 존댓말 문화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럽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은 한국 여행 때 경험한 ‘두 손 문화’나 ‘깊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모습’ 등 한국의 세심한 예의범절에 깊은 인상을 받고 놀랐다고 했다. 두 문화 모두 존중받아 마땅한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예의를 차려 포장해도 상식적이지 않고 무례한 내용이 담겼다면 그 말은 상처를 남기는 흉기가 된다. 반대로 조금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상대를 향한 충분한 이해와 배려가 담긴 말이라면 그 말은 누군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향기를 품을 수 있다. 나이를 초월해 내게 진심을 보인 프랑스의 노교수와 내가

당신의 품격은 말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 결정된다. 반말이 무조건 나쁘고 존댓말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사회가 규정한 관습을 초월해 사람 대 사람으로 상대를 상식적으로 대하는 태도. 그리고 반대로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낮은 사람이 조금 불친절하게 말해도 그 표현에 휘둘리지 않고 그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경청할 수 있는 태도.

서울. 이 도시는 ‘눈치’라는 단어 하나로 많은 게 설명된다. 말하지 않아도 읽어야 하고, 말하는 대신 둘러 말해야 하며,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되기도 한다. 나를 너무 드러내지 않고, 분위기에 맞게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 환영받는 도시. 혼자보다 함께, 튀기보단 묻히는 미덕. 그 안에서 우리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예쁘게’ 맞춰진다. 유행하는 스타일에 나를 적당히 맞추고, 다듬고, 눌러낸다. 그 어딘가에는 조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유교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조용히, 부드럽게, 배려하는 척하며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파리. 여긴 시작부터 다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않는다. 아니, 알아도 굳이 챙겨주지 않는다. 파리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꺼내야 살아남는 도시다. 처음엔 조금 버거웠다. 침묵과 경청이 호감 가는 사람이었던 한국과 달리 여기서는 자기 색깔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거리감이 오히려 편해지기 시작했다. 감정은 명확히 표현되고, 논리는 예의의 다른 말이 된다.

느림은 나를 훈련시켰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어도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조금 늦어도 인생이 망가지지 않음을, 기다림이 때로는 신뢰가 될 수 있음을. 서울에서는 숨이 막혀 도망치고 싶었던 그 침묵이 여기서는 안정감이 되기도 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가지 서로 다른 길을 모두 걸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빠른 길, 느린 길. 곧게 펼쳐진 도로, 구불구불 굽어진 도로. 어릴수록 시공간이 자주 바뀌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일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감각이,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 경험해 보자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리움의 대상은 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가 나에게 허락했던 여유롭고 가벼운 마음결이었다는 것을. 결국 내가 어디에 살든, 그 결들은 내 삶의 리듬이 되어 따라올 것이다. 제네바에서 배운 느긋함, 파리에서 배운 단단함, 서울에서 배운 예민한 감각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품은 채, 앞으로도 나만의 속도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갈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나만의 삶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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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보지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는 감당할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농담 하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의 총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한마디 농담으로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힘은 부드럽게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십으로 드러나고, 맥락에 맞는 언어를 택할 줄 아는 감각은 지성의 매력으로 이어진다.

내가 불편했지만 그냥 웃고 넘긴 일들. 그리고 다음에 그런 일이 또 온다면, 조금 더 내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반응해보기로 하자. 처음에는 서툴러도 괜찮다. 마음이 기억할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친절보다, 당신 마음이 원하는 온도에 맞춰 살아도 괜찮다. 너무 착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

서유럽의 공기는 한국보다 한결 느슨하다. 그 느슨함 속에는 농담처럼 가볍고, 재치처럼 날렵한 결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기보다 순간을 함께 웃어넘길 여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낯섦이 곧 부담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작은 농담 하나가 관계의 문을 열어준다.

그 가방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오늘도 그 가방 안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작은 가방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 예상외로 많았다. 물건이 아니라, 오히려 물건을 넘어선 것들. 어디를 향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체력. 혼자서도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강한 마음가짐과 독립심. 마지막으로 나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돈.

개인들의 크고 작은 배려의 순간들은 제네바라는 도시의 풍경과도 맞닿아 있다. 제네바의 시스템은 이미 배려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트램의 문이 열리면 바닥과 선로가 매끄럽게 이어져, 유모차를 밀던 사람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 모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곧장 오르내릴 수 있다. 망설임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리듬은 한결 가벼워졌다. 카페와 레스토랑 어디에서도 ‘노키즈존’을 찾아볼 수 없다. 아이가 울고 유모차 바퀴가 드르륵 지나가고 작은 아이가 의자에 올라 잠시 소란을 피워도 별다른 제재는 없다. 오히려 옆자리에 앉은 이가 장난감을 건네주거나 카페 주인이 아이에게 미소를 건네는 장면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렇게 작은 따스함이 겹겹이 쌓인 풍경은 이 도시의 공기를 한결 더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서울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사정은 다르다. 유리창 너머로만 계절이 흘러가고 바람은 차단된 채 스쳐 지나간다. 의자 배치 또한 대부분 정면으로 마주 앉아야 하니, 눈길을 피할 수도, 아무 말 없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지나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그 부재 속에서 더욱 짙은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제네바의 사람들 속에 묻어나는 여유로움은 어쩌면 이런 테라스의 공기와 나란히 앉은 시선에서 배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Art de vivre’, 삶을 예술처럼 살아내는 방식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은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는다.

이때 다시 한번 확신했다. 우아함은 값비싼 장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세심한 태도 속에서 가장 깊게 드러난다는 것을. 그런 순간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내어줄 담백한 여유만 있다면 그 순간 이미 우리는 가장 우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익숙한 관심사 대신, 가끔은 로그아웃한 채로 낯선 영상들을 눌러본다. 혹은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또 다른 계정을 만들어, 내가 평소라면 지나쳤을 분야를 기어이 마주하도록 한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좁아진 시야를 흔들어 보는 일, 어쩌면 그것이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다양성의 연습’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불쑥 건네는 한마디 농담에는 단순한 웃음 그 이상이 담겨 있다. 삶이 늘 빡빡하고, 어깨가 잔뜩 굳어 있고, 미간이 날카롭게 접혀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스르르 흘려보낼 수 있다는 건 긴장이 풀려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긴장이 풀렸다는 건 더 이상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지나치게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시간이 쌓이면 이상하게도 무거워진다. 몇 년밖에 살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던 제네바에서 어느새 짐이 늘어나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엔 가벼웠던 마음이 점점 무게를 더해간다. 버리고 또 버려도 자꾸만 쌓이는 물건처럼, 언제 놓아야 할지 모른 채 기약 없이 붙잡고 있는 감정들이 마음 어딘가를 차지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언젠가 모든 걸 정리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들고, 어떤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까.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이별이나 변화를 무섭게 여기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방 하나로 끝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생각보다 많았다. 언젠가 내가 홀로 서야 할 날이 오더라도 그저 조금 쓸쓸한 한숨 정도만 내뱉고 일어설 수 있기를.

제네바의 분위기가 풍요롭게 느껴지는 건 단지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민족적 뿌리를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다층적인 배경도 한몫할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다. 한국어 하나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말처럼, 단일한 언어가 우리 사회의 감각과 취향, 심지어 소비의 패턴까지도 닮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이곳은 ‘대다수가 공감하는 단 하나의 우상’을 세우는 것보다, 여러 조각의 퍼즐로 구성되어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곳이다. 이방인을 ‘틀린 사람’으로 불편하게 쳐다보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였다. 그 점이 참 편안했다. 제네바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너는 왜 나와 다르지?’라는 경계심 섞인 태도가 아니라 ‘너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줬다. 그 이후로 나는 광고판을 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다름의 일상’을 읽게 되었다.

적절한 농담은 단순한 말의 장식이 아니라, 에티켓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침묵하거나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것은 무례로 해석될 수 있고, 이와 반대로 적당한 유머와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세련된 태도로 간주된다.

프렌치 문화가 중심인 이곳에서는 ‘시간을 지킨다’는 것이 칼같이 맞추는 정시 개념이 아니라, 상대의 사정과 상황을 배려하는 일종의 유연함에 더 가깝다는 것을.

진정한 우아함은 자신의 여유로움으로 다른 이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고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순간에 드러난다고 말이다.

‘무례함’을 경계하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예의 없게 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결국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낸다. 모든 감정을 내보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불편했다면, 그 감정을 잠시라도 정면으로 마주해보자는 말이다.

정말 아끼고 싶은 것, 욕심내도 괜찮은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을 들일 만큼, 돈을 쓸 만큼 내 마음이 가는 것. 그런 걸 마음속에서 꺼내 조용히 다듬어본다.

사람을 가볍게 대한다는 건, 적당히 선을 긋고 마음을 덜 쓰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인정하고, 괜히 내가 더 얹지 않겠다는 마음에 가깝다. 우리는 각자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굳이 더 무겁게 만들지 않아도 될 이유는 충분하다. 나 역시 누군가의 어깨 위에 또 다른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괜히 서로를 짓누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 그렇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따뜻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

괜히 눈치 보지 않고, 내 선택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배짱 하나쯤은 있다고. 이 정도 배짱은 부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 삶, 나는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자유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빛의 방향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나 자신을 환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면, 요즘은 그 빛을 옆으로 돌려 타인을 비추고 있다.

이곳 제네바의 테라스 카페 문화는 프랑스를 닮아 있다. 인도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도로변에 길게 늘어선 테이블들은, 천장의 답답함 대신 하늘과 바람, 계절의 공기를 대화의 배경으로 삼는다. 자연과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 가벼워진다. 테이블의 구조 또한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신, 나란히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이 배치는 대화에 긴장을 덜어내고 침묵마저도 편안하게 만든다. 길을 오가는 행인과 도시의 풍경이 마치 대화에 초대된 듯한 개방감까지 더해진다.

프랑스는 이와 다르다. 공식적인 자리, 이를테면 회사 면접이나 회의와 같은 상황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시간 준수가 필수지만, 사적인 모임에서는 오히려 5~10분 늦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은 준비 중인 호스트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로 여겨져, 약간의 지연이 일종의 ‘에티켓’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도 스위스에서는 그 감각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언어만큼은 프랑스와 공유하지만, 시간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독일식에 가깝다. 약속에 늦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로 여겨지고, 실제로 ‘정확함’은 이 나라의 미덕처럼 작동한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 예절에서 ‘농담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의 식탁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고 교양을 드러내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새로운 사회에 스며든다는 것은 언어 시험 점수로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유하는 매너와 태도를 몸에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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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에 끝까지 머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나’를 신경 쓰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상대의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버리면 남을 얻는다.

충만한 자신감과 과잉된 자의식의 차이는 한끗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본인 인생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스스로를 구할 사람은 나뿐이다’라고 굳게 믿고, 그걸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자 남에게 자신감을 조용히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조용히 내 안에 머물 때는 자신감이지만 그 욕구가 세상 바깥으로 자꾸만 흘러넘치면 자의식이 문제를 일으킨다.

조금 더 가볍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유럽 사람들의 삶을 보며 자주 느낀다. 이곳 사람들은 참 ‘가볍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결의 가벼움이다. 모든 일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심각한 일조차 유머로 녹여낸다. 하나의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않기에 번아웃도 덜하다. 남은 에너지는 문화나 예술 활동에 쓰고, 그 속에서 다시 영감과 활력을 얻는다.

내가 바라는 그것이 정말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따라 나도 욕망하고 있었던 것인지. 기쁨과 만족을 채우려는 몸부림이 알고 보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무한한 공허함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구분해야 했다. 이것은 결국 스스로가 통제 가능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에 대한 구분이다. 결과에 따른 감정이 ‘그건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어’라는 좌절감과 박탈감인지, 아니면 ‘에이, 아쉽다. 다음엔 이런 방법으로 하면 조금 더 나아지려나?’처럼 희망이 곁들어진 아쉬움과 미련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손으로 잡을 것. 그 외의 것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이기에 애초부터 에너지를 쏟지 않을 것.

Nonchalance. 직역하자면 ‘태연함’으로, ‘필요 이상의 애씀을 보이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으름과는 다르다. 오히려 딱 필요한 만큼만 힘을 쓰고, 나머지는 흘려보낼 줄 아는 고요한 자신감에 가깝다.

욕망을 구분하기 위해 조금 더 쉽고 익숙한 개념을 하나 빌려오기로 했다. 언제나 인기 키워드로 꼽히는 ‘자존감’.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고 한다. 매일 아침 30분씩 책을 읽거나,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하기처럼 스스로 정한 성취 기준에 도달했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을 꾸준히 축적해나가는 내적 방법. 그리고 타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는 외적 방법.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생각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붙잡지 않는 일일지 모른다. 흘러가는 대로. 보이는 대로.

어쩌면 상처받았던 기억들이 내 마음 어딘가에 패여 있어,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였고, 그 감정을 내가 어떻게 다뤘는지였다.

더욱 적응이 되지 않았던 건 레스토랑에서의 주문이었다. 한 번쯤은 ‘유럽 여행 때 참고해야 할 주문 에티켓’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꽤 골치 아파진다. 여행자로서야 어차피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체험하러 간 것이기에 그 불편함이 신선함으로 가려질 수 있다.하지만 나는 이 불편을 하루도 빼지 않고 날마다 겪어야 했다.

어떻게 그렇게 산뜻할 수 있는 것일까? 별것 아닌 일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낼 구실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이곳 사람들은 너무나도 무거운 일로 마음이 힘든 날이 오면 유튜브에서 우주의 광활함에 관한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을 추스리는 것일까? 본인이 얼마나 이 세계에서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어 매 순간을 유쾌하게 보내자고 되뇌는 것일까?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다면 그들을 붙잡고 물어봐야겠다. 너의 가벼움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 어울려 사는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교와 경쟁의 심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 살아가긴 어렵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느림’ 문화. 이곳은 집 현관문을 열고 닫을 때 열쇠를 사용한다. 맞다. 우리가가끔사용하는 그 열쇠.

그러니, 지금 그게 잘 되지 않는 당신이라면 잠시 멈춰 스스로를 바라보자.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인정하고, 다정하게 토닥이자. 혹시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묵묵히 일으켜세워주자.

아마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 그리고 그게 바로, 자기만의 방을 완성해가는 어른들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 내 선을 넘은 것에 화가 난 게 아니라, 그 순간 스스로가 내 선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계획이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인생은 무거워진다. 쉽게 움직일 수 없으니 도전이 어려워지고, 미리 세워둔 계획에서 벗어나면 마치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자연스러움은 사라진다.

그 방어막이 무너졌을 땐 어떻게 나를 다시 회복시켜야 할까. 여기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누군가 당신의 선을 무시하고 들어와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간 뒤, 정작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적이 있다면 자책하지 말자.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예측했던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그 비율이 반대의 비율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여기서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늘은 대충 먹자’가 되면 그 상황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기분이 상할 일이 없다. 하지만 나는 꽤 오래 그 간단한 요령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게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거워서였다. 계획을 짜고 결정을 내리는 그 단계에서의 태도가 무거워질수록 기대감은 저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삶에 자유를 추가하는 데에는 대단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곳에서 새삼 배웠다. 오히려 별것 아닌 일상의 한 장면들이 내 안의 숨통을 조금씩 열어준다. 그러니 나부터 잠깐 멈추고 비워내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그게 결국 나를 살리고, 언젠가 누군가와도 조금 더 여유롭게 웃으며 만날 수 있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사실 진짜 중요한 건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남과의 여유를 만들어보려면 일단 나부터 여유로워야 한다. 그 시작은 아마도 비우는 연습일 것이다. 지금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는 것. 스마트폰만 보는 것보다 내 주변 사람들을 관찰해보는 일. 다이어리와 펜만 챙겨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는 일….

난 그들에게 조심스레 조언을 구해봤다. 지금의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는지 말이다. 조심스레 입을 연 그들의 대답은 ‘돌아올 수 없는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라’였다. 언뜻 들으면 식상한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경험담을 직접 통해 들으니 새삼 와닿았다.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조언과 오지랖 사이 어딘가에서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서, 혹은 나에게 중요해서 그 선을 넘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조차도 잠시 미뤄둬야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만의 선을 그어보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균형일 것이다. 내적인 욕망을 무시하지도 말고 외적인 욕망에 휘둘리지도 말 것. 그 욕망이 내 삶을 이끌 수 있도록 다듬고 조율하되, 이와 동시에 그 안에서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갖기. 포기와 타협이라는 말을 밉게만 보지 말 것. 감당할 수 없는 노력이라는 미명 아래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위를 하지 말 것. 자신의 한계선을 곡예하듯 찾아갈 것.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되, 두 발은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있을 것.

그저 내가 이어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의 속도로, 나의 방식으로 해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고, 내 길을 그대로 가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그럼에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뭇거리고 말문이 막힐 것이다. 강하고 센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문득 그 단어가 ‘대충 살자’라는 말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들으면 책임 회피나 무성의함처럼 들리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대충’은 그게 아니다. 힘들이지 않는 우아함의 태도랄까? 필요 이상의 힘을 쓰는 순간, 삶의 결은 쉽게 투박해진다. 반면 조금 덜 신중하고, 조금 덜 계획하고, 조금 덜 애쓰는 태도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비워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시크함, 바로 그것이 ‘대충 살자’의 미학일 것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도달해보니 중요한 것은 얼마를 모았는지보다, 과거를 떠올렸을 때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였다고 고백했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을 놓쳤다는 아쉬움은 정작 돈으로 바꿀 수 없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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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적극적으로 싸우기를 선택했다. 그럴 경우 피해자의 눈높이에 맞춰 대응책을 마련하는 게 연대자의 몫이다. 나는 고소장, 공소장, 피해자 진술조서 등 각종 수사·재판 기록물에 대해 분석하고 공판을 모니터링한 결과물을 토대로 증인신문에 대비하도록 했으며, 관련 의견서와 탄원서를 작성하도록 도왔다. 아울러 ‘비방의 목적’과 관련해 재판부가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박ㅇㅇ과 만화가 박재동의 친분, 허위 게시물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 등을 준비하도록 조력했다.

모모 씨의 가해자는 이후 불복해 항고 등을 이어갔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또한 민사 손해배상 소송 역시 조정으로 마무리했다. 폭로 내용과 관련한 형사소송에서 모두 "사실적시이자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라는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가해자는 원고로서 민사 손해배상을 이어갈 명분이 없었다

보복성 고소에 대응하면서 여유를 찾은 모모 씨는 가해자를 협박으로 고소했다. "살해 협박이 있었으나 그 방법이나 수단의 구체성이 부족하고 반복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수사기관이 판단하면서 불기소 처분이 내려지긴 했지만, 모모 씨는 수사기관에 나가 가해자를 가해자로 부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자신의 피해를 직면하고,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것에 대한 공적 판단을 구하는 과정이 모모 씨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회복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모모 씨는 이후 나와 함께 프로젝트 팀에서 활동하는 연대자가 되었다. 팀 활동을 종료한 이후에도 그는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또한 멀리 돌아가기는 했으나, 교제폭력의 피해자가 되면서 배제당한 그의 자리를 다시 찾았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원래 자리를 빼앗기는 현실에서 그의 사례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피해자로, 연대자로, 나의 동료이자 친구로 내 곁에 있다. 가해자와 그 지인들의 언행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으며, 앞으로도 틀릴 것이다.

‘보복성 고소’란, 성폭력 피해자들과 교제폭력 피해자들이 피해를 신고·고소·(외부)폭로한 후, 가해자와 그 지인·이해관계인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제기하는 다양한 민형사상 소송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복성 고소는 피해자뿐 아니라 그 지인, 연대자, 제3자를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보복성 고소와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문제, 수사 과정에서의 무고 인지 문제, 원 피해 사건 재판 과정에서의 양형 반영 문제 등 풀어가야 할 다양한 숙제들이 쌓여 있다. 피해자의 말을 막고 연대와 지지기반을 무너뜨리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해자들의 ‘보복’을, 이 사회는 어떻게든 막고 책임을 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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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며 꼭 혼자 다 해내야만 잘 사는 걸까? 나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만 대단한 사람처럼 보일까? 예전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레버리지’라는 개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적은 힘으로 더 큰 효과를 얻는 방식.

인간관계에서의 레버리지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자 오히려 내가 단단해졌다. 인생은 혼자 완성해야 하는 퍼즐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누군가의 힘을 빌려 더 멀리 가는 것도, 내 에너지를 지키는 현명한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결심이 빨랐다.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누군가가 당신의 일을 멋지다고 말하며,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해온 일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니까.

결국 중요한 건 ‘검증된 사람’, 즉 믿을 수 있고 직접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원리를, 나는 제네바에서 작은 용기와 태도로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욕망하고, 내 손으로 직접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고, 여의치 않으면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시간이 있었다. 삶이 풍요롭게 성장하는 데 필수 불가결했던 시간들. 하지만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했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조금 더 단순하게 만들까. 이왕이면 힘 안 들이고 편하게 살고 싶은 베짱이과에 속하는 나였다. 적게 고민하고, 적게 부딪히고, 덜 지치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했다. 그러려면 한계가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아껴야 했다.

프랑스어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몇 번의 체험 수업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여덟 명 남짓한 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있었고, 각자 다른 이유와 문화적 배경으로 언어를 배우러 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은 나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위축되진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었고, 선생님은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진도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나는 어딘가 문법이 막히고 발음이 낯설어 자꾸 진도를 놓쳤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손을 들고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했다. 그때였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어떤 이가 매번 몸을 돌려 내게 대신 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행동이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자, 그것이 친절이 아니라 ‘비웃음에 가까운 배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엔 그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쏟는 동안 내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는 게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잘 알면서도, 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그것도 나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혹시 나도 모르게 인종차별이라는 폭력에 무뎌진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마음 한가운데를 스쳤다. 그냥 넘기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또 마주했을 때에도 ‘별일 아니야’라며 넘겨버릴 것 같아서, 이번엔 다르게 행동하기로 했다.

다음 날, 그가 또 한 번 내 쪽을 돌아보며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을 때 나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난 선생님에게 물었지, 너한테 묻지 않았어."

그는 멈칫하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 또한 더 이상의 논쟁을 이어갈 이유는 없었다.

더 이상 그 친구에게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얕잡아볼 사람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노력하지 않으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애초부터 내 존재를 가볍게 여긴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려는 일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그 학원에는 더 나가지 않았다. 등록하기 전이었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수업 방식이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던 것도 있지만, 어쩌면 그와의 껄끄러운 관계가 그만둔 또 다른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교실을 나설 때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싸워서 이긴 것도, 정의를 실현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단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분한 것,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이 새로웠다. 이건 냉정한 태도가 아니라 삶의 효율에 관한 문제다. 감정도 에너지고, 에너지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으니까.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이 쓸모 있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내는 시행착오와 더불어,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버리는 태도도 습관으로 익혀야 한다. 괜히 남의 마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해보려는 그 시도 자체가 이미 불필요하다. 사실 이건 단순히 인간관계에서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 전체를 가볍게 만들어 주는 아주 유용한 태도이기도 하다. 어떤 고민과 걱정이 생긴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본다. 이 고민이 정말 내 시간을 들일 만큼, 내 에너지를 쓸 만큼 가치 있는 일인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즉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괜히 그런 일에 힘을 쏟아 정작 중요한 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사실 그렇다. 친구든, 한 번 보고 끝날 사람과의 관계든, 어쩌면 남자와의 관계까지도. 내가 살아가는 것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웬만한 건 그냥 흘려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적 에너지를 괜히 소모하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힘을 빼는 게 맞을 때도 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라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지 말 것.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에 괜히 내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내 입에서 나온 잔소리가, 사실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내 에너지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애초부터 쓸데없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일, 그게 인생에서 가장 효율적인 힘의 사용법이라 믿는다. 종종 세상은 그런 나를 게으르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안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지치게 하지 않고, 더 오래 나답게 살아남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런데 허무할 정도로 최고의 답변은 아예 보지 않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신경도 덜 쓰이기 마련이니까. 그걸 굳이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신경 에너지를 갉아먹게 만들 환경이라고 생각된다면 얼른 빠져나오라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머리로 노력할 것도 없으며, 마음을 애써 컨트롤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생각하자. 당신이 놓아버리면 된다. 여러 가지의 다른 기회와 대안을 당신의 행동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원하는 마음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무리하게 애쓰고 쉽게 지쳐도 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자. 가볍고 느슨하게. 간절히 원할수록 어긋나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가까울수록 멀어진다. 당장 내일, 올해 인생이 끝날 것도 아닌데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절박함은 언제나 위태로운 선택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기회, 또 다른 대안은 언제든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

혹자는 되물을 수 있다. 말은 쉽지만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는가? 옳다. 1단계가 아무리 명확해도 잘 안 될 때가 있다. 놔두라는 말은 듣기에는 참 쉬운데, 정작 몸은 그렇게 쉽게 놓아지질 않는다. 이 대목에서 필요한 수행은 ‘내려놓음’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내가 신경 쓰일 장면을 보지 않는 것이다. 신경 쓰이는 곳에서 나오면 된다.

‘될 일은 어떻게든 되고,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는 말처럼,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히 두었을 때 오히려 그것이 더 가까워지는 경험들을 해봤을 것이다. 그렇게 안간힘을 쓴 일은 오히려 멀어지고, 어쩐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은 예상치 못하게 스르륵 이루어지곤 하는 걸 보면 ‘원하는 것일수록 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 연연할수록 멀어지고, 초연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가볍게 넘기고 놔두었을 뿐인데 상대는 오히려 그게 존중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아, 날 믿어주는구나’ 하고 말이다.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두는 그 태도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떤 일이든 내 눈앞에 놓였을 때 한 번쯤 묻는다. 이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그냥 흘러가게 둘 수밖에 없는 일인지. 통제가 안 되는 일이라면 애써 붙잡지 않는다. 놓아버린다. 그래도 괜찮다.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남들이 이미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간절해지는 마음. 그 감정은 어쩌면 나의 진짜 욕망이 아니라, 남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타이밍에 휘둘리는 불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간절할수록 내려놓아야 한다. 내 삶의 속도와 타이밍은 결국 내가 스스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착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나를 살리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무조건 애써 멀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무소유의 삶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는 없다. 다만 무언가를 바라는 데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지 말고 그 에너지를 아껴 더 소중한 데 활용해보자는 이야기다. 가볍게, 가볍게. 원하는 것도 가볍게. 포기하는 것도 가볍게. 바라는 것을 중심에 두되, 적절한 크기로만. 그리고 다른 것에도 에너지를 나누어주면서. 그렇게 여유롭게, 유연하게.

답은 늘 간단하다. 나오면 된다. 버리면 된다. 멀어지면 된다.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걸 인정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그다음은 아주 단순하다. 거기서 나오는 것. 누가 당신을 거기에 붙잡아두고 있는 게 아니다. 보기 싫은 건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거창하게 운동화 끈 조여매고 한강변으로 나가 시속 5킬로미터로 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오자. 버리자. 당신은 아름다운 것만 있는 곳에서 편히 쉬기만 하면 된다.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곳이 있고, 당신은 그중에서 좀 더 편안한 곳을 고를 수 있다.

굳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는 일. 괜히 마음의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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