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를 보지 않는 자연스러움 속에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는 감당할 수 있다’는 여유와 자신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농담 하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의 총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한마디 농담으로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힘은 부드럽게 상황을 주도하는 리더십으로 드러나고, 맥락에 맞는 언어를 택할 줄 아는 감각은 지성의 매력으로 이어진다.
내가 불편했지만 그냥 웃고 넘긴 일들. 그리고 다음에 그런 일이 또 온다면, 조금 더 내 마음이 편해지는 쪽으로 반응해보기로 하자. 처음에는 서툴러도 괜찮다. 마음이 기억할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친절보다, 당신 마음이 원하는 온도에 맞춰 살아도 괜찮다. 너무 착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
서유럽의 공기는 한국보다 한결 느슨하다. 그 느슨함 속에는 농담처럼 가볍고, 재치처럼 날렵한 결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낯선 이를 경계하기보다 순간을 함께 웃어넘길 여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낯섦이 곧 부담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작은 농담 하나가 관계의 문을 열어준다.
그 가방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오늘도 그 가방 안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 작은 가방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 예상외로 많았다. 물건이 아니라, 오히려 물건을 넘어선 것들. 어디를 향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체력. 혼자서도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강한 마음가짐과 독립심. 마지막으로 나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돈.
개인들의 크고 작은 배려의 순간들은 제네바라는 도시의 풍경과도 맞닿아 있다. 제네바의 시스템은 이미 배려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트램의 문이 열리면 바닥과 선로가 매끄럽게 이어져, 유모차를 밀던 사람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 모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곧장 오르내릴 수 있다. 망설임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리듬은 한결 가벼워졌다. 카페와 레스토랑 어디에서도 ‘노키즈존’을 찾아볼 수 없다. 아이가 울고 유모차 바퀴가 드르륵 지나가고 작은 아이가 의자에 올라 잠시 소란을 피워도 별다른 제재는 없다. 오히려 옆자리에 앉은 이가 장난감을 건네주거나 카페 주인이 아이에게 미소를 건네는 장면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렇게 작은 따스함이 겹겹이 쌓인 풍경은 이 도시의 공기를 한결 더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서울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사정은 다르다. 유리창 너머로만 계절이 흘러가고 바람은 차단된 채 스쳐 지나간다. 의자 배치 또한 대부분 정면으로 마주 앉아야 하니, 눈길을 피할 수도, 아무 말 없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지나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그 부재 속에서 더욱 짙은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제네바의 사람들 속에 묻어나는 여유로움은 어쩌면 이런 테라스의 공기와 나란히 앉은 시선에서 배어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Art de vivre’, 삶을 예술처럼 살아내는 방식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은 힘을 빼고 살아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는다.
이때 다시 한번 확신했다. 우아함은 값비싼 장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세심한 태도 속에서 가장 깊게 드러난다는 것을. 그런 순간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누군가에게 내어줄 담백한 여유만 있다면 그 순간 이미 우리는 가장 우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익숙한 관심사 대신, 가끔은 로그아웃한 채로 낯선 영상들을 눌러본다. 혹은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또 다른 계정을 만들어, 내가 평소라면 지나쳤을 분야를 기어이 마주하도록 한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좁아진 시야를 흔들어 보는 일, 어쩌면 그것이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다양성의 연습’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불쑥 건네는 한마디 농담에는 단순한 웃음 그 이상이 담겨 있다. 삶이 늘 빡빡하고, 어깨가 잔뜩 굳어 있고, 미간이 날카롭게 접혀 있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상황에 맞는 농담을 스르르 흘려보낼 수 있다는 건 긴장이 풀려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긴장이 풀렸다는 건 더 이상 상대의 표정이나 반응을 지나치게 계산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시간이 쌓이면 이상하게도 무거워진다. 몇 년밖에 살지 않을 곳이라 생각했던 제네바에서 어느새 짐이 늘어나 있었던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엔 가벼웠던 마음이 점점 무게를 더해간다. 버리고 또 버려도 자꾸만 쌓이는 물건처럼, 언제 놓아야 할지 모른 채 기약 없이 붙잡고 있는 감정들이 마음 어딘가를 차지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언젠가 모든 걸 정리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들고, 어떤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까.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이별이나 변화를 무섭게 여기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방 하나로 끝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생각보다 많았다. 언젠가 내가 홀로 서야 할 날이 오더라도 그저 조금 쓸쓸한 한숨 정도만 내뱉고 일어설 수 있기를.
제네바의 분위기가 풍요롭게 느껴지는 건 단지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민족적 뿌리를 가진 이들이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다층적인 배경도 한몫할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다. 한국어 하나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말처럼, 단일한 언어가 우리 사회의 감각과 취향, 심지어 소비의 패턴까지도 닮아가게 한 것은 아닐까?
이곳은 ‘대다수가 공감하는 단 하나의 우상’을 세우는 것보다, 여러 조각의 퍼즐로 구성되어 누구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을 보여주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곳이다. 이방인을 ‘틀린 사람’으로 불편하게 쳐다보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였다. 그 점이 참 편안했다. 제네바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너는 왜 나와 다르지?’라는 경계심 섞인 태도가 아니라 ‘너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줬다. 그 이후로 나는 광고판을 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다름의 일상’을 읽게 되었다.
적절한 농담은 단순한 말의 장식이 아니라, 에티켓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침묵하거나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것은 무례로 해석될 수 있고, 이와 반대로 적당한 유머와 재치 있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자 세련된 태도로 간주된다.
프렌치 문화가 중심인 이곳에서는 ‘시간을 지킨다’는 것이 칼같이 맞추는 정시 개념이 아니라, 상대의 사정과 상황을 배려하는 일종의 유연함에 더 가깝다는 것을.
진정한 우아함은 자신의 여유로움으로 다른 이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편안하고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순간에 드러난다고 말이다.
‘무례함’을 경계하느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예의 없게 굴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는, 결국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낸다. 모든 감정을 내보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불편했다면, 그 감정을 잠시라도 정면으로 마주해보자는 말이다.
정말 아끼고 싶은 것, 욕심내도 괜찮은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을 들일 만큼, 돈을 쓸 만큼 내 마음이 가는 것. 그런 걸 마음속에서 꺼내 조용히 다듬어본다.
사람을 가볍게 대한다는 건, 적당히 선을 긋고 마음을 덜 쓰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인정하고, 괜히 내가 더 얹지 않겠다는 마음에 가깝다. 우리는 각자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굳이 더 무겁게 만들지 않아도 될 이유는 충분하다. 나 역시 누군가의 어깨 위에 또 다른 짐이 되고 싶지 않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괜히 서로를 짓누르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 그렇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 더 따뜻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
괜히 눈치 보지 않고, 내 선택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배짱 하나쯤은 있다고. 이 정도 배짱은 부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 삶, 나는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자유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빛의 방향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나 자신을 환하게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면, 요즘은 그 빛을 옆으로 돌려 타인을 비추고 있다.
이곳 제네바의 테라스 카페 문화는 프랑스를 닮아 있다. 인도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도로변에 길게 늘어선 테이블들은, 천장의 답답함 대신 하늘과 바람, 계절의 공기를 대화의 배경으로 삼는다. 자연과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 가벼워진다. 테이블의 구조 또한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마주하는 대신, 나란히 앉아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이 배치는 대화에 긴장을 덜어내고 침묵마저도 편안하게 만든다. 길을 오가는 행인과 도시의 풍경이 마치 대화에 초대된 듯한 개방감까지 더해진다.
프랑스는 이와 다르다. 공식적인 자리, 이를테면 회사 면접이나 회의와 같은 상황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시간 준수가 필수지만, 사적인 모임에서는 오히려 5~10분 늦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너무 일찍 도착하는 것은 준비 중인 호스트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로 여겨져, 약간의 지연이 일종의 ‘에티켓’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도 스위스에서는 그 감각이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언어만큼은 프랑스와 공유하지만, 시간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독일식에 가깝다. 약속에 늦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로 여겨지고, 실제로 ‘정확함’은 이 나라의 미덕처럼 작동한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 예절에서 ‘농담을 할 줄 아는 능력’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의 식탁은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고 교양을 드러내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새로운 사회에 스며든다는 것은 언어 시험 점수로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공유하는 매너와 태도를 몸에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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