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보기 - 감추어진 이슬람 1500년 역사를 찾아서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이슬람교는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이다. 미국종교전문사이트인 dherents.com 에 따르면 현재 이슬람교인의 수는 15억 명이다. 21억 명의 신자를 갖고 있는 기독교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더불어 현재 전 세계를 향한 대대적인 선교 활동을 진행 중이다. 특히 한국에도 점진적이면서도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캠퍼스를 비롯하여 일반으로 향한 그들의 포교 활동은 왜곡된 아랍 문화를 재인식시키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AD 622년을 원년으로 하는 이슬람은 그들의 선지자 무함마드(영어식으로 마호메트)에 의해 AD 610년 경 시작 되었다. 그 후 당시 세계(지중해)를 지배 했던 기독교와 자웅을 겨루는 종교로 발전하고, 그 세가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AD 732년 카를마르텔에 의해 유럽으로의 진격이 저지된 이슬람교는 오늘날 다시금 유럽을 향한 진격을 시작하여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상당 부분을 이슬람화 시켰고, 아직도 진격 중에 있다.

 

 '이슬람 바로보기'

 

 이 책은 무함마드 탄생 이전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의 이슬람과 중동의 역사와 정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 지중해 연안과 아라비아 반도의 역사적 상황이 어떠  했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무함마드에 의한 이슬람 탄생과 그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이슬람의 긴 역사와 오늘날 복잡한 중동의 정세를 담고 있다. 1400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슬람의 긴 역사를 지루하지 않게 잘 요약하고 있는 이 책은 이슬람의 긴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특히 이슬람의 역사를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된 시각이 아닌 중도적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어 이슬람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내용이 역사 중심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찬란한 문화는 거의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읽어 본 이슬람에 관한 책은 (각기 서술 목적과 성격이 다른) "마이클 모건, 잃어버린 역사, 이슬람", "야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율리아 수리야쿠수마, 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이다. "류모세, 이슬람 바로보기"는 이슬람과의 네 번째 만남이다. 다른 책들이 이슬람의 특정 역사와 지역에 국한하여 서술 되고 있는 반면 이 책은 중동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전 역사를 담고 있다. 다른 세 책을 통해 나무를 보고, 이 책을 통해 숲을 보게 되었다. 그것들이 상호 유기적 조화를 이루어 나에게는 유익했다.

 

 세계는 아직까지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그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로 인해 세계의 역사는 그들을 중심으로 기록 되었고, 기억 되고 있다. 이 말은 그 외의 다른 지역의 역사는 무시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서양의 역사 - 특히 유럽 - 는 기독교의 역사이다. 그 역사는 단지 그 속에 속한 국가들만의 교합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를 축으로 하는 서양의 역사는 이슬람을 축으로 하는 중동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서양의 역사는 중세는 물론 근대와 현대까지 그 둘의 대립과 충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를 모두 이해해야 서양사를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중세에 유럽은 매우 낙후된 문명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중동은 강한 군사력과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특히 유럽의 찬란한 문화는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이슬람 문화의 수탈과 유입으로 이루어 진 것을 생각하면 이슬람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 볼 만 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는 서양에 의해 상당부분 왜곡 되었고, 감추어졌다. 따라서 이슬람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중동은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와 역사 가운데 오일 파워 등을 통해 무시 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과 이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이는 국가적인 차원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오늘날 이슬람교와 그 문화가 빠르게 이 나라에 유입 되고 있는 지금, 그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적 차원에서 맹목적인 반대와 무시, 또는 비종교적 차원에서 무관심으로 그들을 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은 불의한가? 자끄 엘륄 총서 6
자끄 엘륄 지음, 이상민 옮김 / 대장간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기에 앞서, " " 속 내용은 본문 인용문임을 밝혀 둡니다.


 유대인은 매우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이다. 다른 어느 민족보다 우여곡절이 많은 민족이다. 어느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 받았다고 자부하는가? 어느 민족이 2천 년 간 나라 없이 방황하다가 다시 나라를 찾았는가? 오직 유대인만 그러하다. 나라를 잃은 후 어디를 가든 박해 받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살당하고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민족이 어디 있는가? 오직 유대인 뿐 이다. 유대인은 신비하고 특별하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특별한 민족이다.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이 민족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 이후 언제 어디서나 그분과 함께 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 하나님의 견고한 보호 속에 거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인은 그분께 버림받았다!

 

 '하나님은 불의한가?'

 

 이 책은 로마서 9 ~12장 - 특히 9 ~ 11장까지 - 에 기록된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한 바울의 말을 분석한다. 이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와 하나님의 계획을 살펴본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본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세상 어느 민족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를 버렸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 받은 민족이 버림을 받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변덕스럽고, 불의한 분이란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과 불순종으로 그들은 버림받았다. 그런데 엘륄은 말한다. 이스라엘이 복음의 경로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스도인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그는 "유대인이 예수를 거부하는 전적인 책임은 그리스도인과 기독교 교회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았다면 "그리스도인의 그러한 삶에 설득된 유대인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켰고 그러한 회심으로부터 세상을 변화시켰던 메시아를 예수 안에서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회심할 어떠한 이유도 그러한 메시아를 향해 다가올 어떠한 이유도 진정으로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대신 "그때(성령이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말세 - 본인 첨가)를 기다리면서, 유대인과 메시아 예수 사이에 만남이 지연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과 우리 교회가 말아야 할 일이다"고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유대인의 버림받음과 이방인의 구원은 그분의 뜻 안에 놓여 있다. "유대 민족을 일시적으로 따로 떼어 놓음으로써 세상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해졌고, 이교도는 유일한 존재이자 단 하나의 진정한 하나님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예수의 하나님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유대인의 타락에 의해 구원이 이교도에게 열렸고, 유대인의 역할 감소는 이교도의 풍성함이 되었다." 유대인의 불순종으로 도리어 이방인에 복음이 전파 되었고,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이방인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유대인에 대한 은총을 거두지 않으셨다. 다만 선민의 구원을 잠시 미루신 것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한 논증을 펼치는데, 그 증거는 바울 자신이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 전체를 버리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거기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도 그분께 버림을 받는다면 (어떠한 면에서) 그분과 무관한 이방인은 말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방인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히 시사한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잠시 거부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사랑과 원대한 계획으로 인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방인과 함께 유대인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방인이 구원 받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특별한 민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이것은 그분을 따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대한 경고이다. 하나님께 특별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분을 대항하면 버림을 받는데 하물며 이방인은 어떠랴!? 그리스도인은 단지 하나님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해야 한다. 1%는 남겨둔 채 99%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100% 변해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한 버림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는 유대인에서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유대인을 통해 마무리 될 것이다. 그 장중한 역사에서 주인공이 아닌 단지 구경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를 마음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령님 예배자 - 성령님의 파도를 타는 예배
조태성 지음 / 베다니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과 1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하고, 쉬운 방법이 있다. 그분을 예배하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은 물론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주일에 교회 출석은 꼬박하지만 삶에서는 예배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장 큰 핑계는 바쁘고, 피곤해서이다. 이는 구차한 변명이다. 인간의 지음 받은 목적을 상기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변명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예배 할 것이다. 그 외에 예배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예배 하지 못한다. 교회 가면 방법을 몰라도 자연히 예배하게 된다. 하지만 삶에서는 교회의 방법대로 해야 하는지 아니면 개인 예배의 방법이 있는지 잘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시중에는 예배의 이유, 예배의 방법 등을 가르쳐 주는 책이 많음에도 이게 어찌된 일일까? 두 경우 모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예배 할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예배해야 한다. 예배는 기독교의 기본이자 표준이다. 예배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반면 어떤 이는 열심히 예배한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그 기쁨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면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의 모습은 차츰 변화된다. 그렇지만 예배를 아무리 열심히 드려도 변화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예배를 잘못 드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

 ‘성령님 예배자’

 이 책은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도와주는 책이다. 예배의 목적, 예배의 방법, 예배의 유익, 예배의 자세, 찬양 인도 방법, 회중의 입장에서의 찬양 등을 가르쳐 준다. 특히 개인 예배를 돕는다. 삶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들이 주로 ‘예배’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이 책은 ‘개인’ 예배, ‘삶’의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예배를 단지 이론적으로 다루기만 하지 않는다. 저자 본인이 이론들을 직접 삶 가운데서 행하고 있고, 그것을 소개하기 때문에 실천적이고, 실제적이다. 살아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저자의 겸손함과 진솔함이 담겨 있기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예배를 돌아보고, 새롭게 하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배는 어떻게 보면 쉽고, 또 어떻게 보면 어렵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와중에도 그 중심이 자신에게로 옮겨지기도 한다. 특히 삶에서의 예배는 더욱 어렵다. 대적의 방해가 심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한다. 돈, 물질, 명예 등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예배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 한다. 그 유혹과 방해를 물리치고 하나님 한분만을 온전히 예배 할 때 풍성한 은혜가 임 할 것이다. 그로 인해 더욱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앤드류 머레이의 위대한 영성 - 기도와 성령의 사람 앤드류 머레이의 내적 삶의 회복
앤드류 머레이 지음, 정혜숙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앤드류 머레이의 위대한 영성'



 이 책의 저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19세기 남아프리카의 성자'라고 불린다. 그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 아닐 것이다. 여러 책을 통해 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령님과 기도, 영성과 관련된 책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귐의 영성', '그리스도를 아는 성령 충만의 영성', '거룩함을 회복하는 회복의 영성'. '믿음을 세우는 말씀 능력의 영성' 이렇게 총 4부로 구성 되어 있다. 각각의 큰 주제에 맞게 작은 주제가 배열 되어 있다. - 단, 개정전판은 35개의 주제가 정해진 규칙 없이 마구 배열 되어 있다. 그렇기에 개정판이 보기 좋고, 전체 내용을 한눈에 살펴보기 편하다.

 4부로 구성 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개인의 신앙 회복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려 준다. 그리고 기도, 말씀 등 기본적인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마음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은 까닭인지 아니면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인지 - 전자의 이유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 초반에는 내용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한 번 읽고 대충 이해는 되었지만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 같은 부분을 재차 읽어야 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일이 줄어든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본인의 마음이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큰 감동은 없다. 왜냐하면 감동을 위한 책이 아니라 흐트러진 우리 내면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교과서 같은 내용이어서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동은 없지만 내면의 질서와 기초를 잡아 주기 위한 책이기 때문에 잘 읽으면 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면 상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과 기도에 대한 자세 등을 배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때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 말은 단지 주일 하루, 일주일에 한 단 차례 잠깐 예배 드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비꼬는 말이다. 이 말이 처음 돌기 시작 했을 때는 그러한 이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가 아니라 매우 많은 수가 그에 해당한다. 왜 그럴까? 개인의 신앙 생활이 무너진 까닭이다. 일주일 중 하루에 한 번 예배 드리는 걸로 신앙 생활의 기본을 잘 지키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서 각자 영적 생활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이것을 거부하면 당장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일지라도 내면 세계가 차츰 무너져 결국 가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구원 받을 줄로 확신을 했으나 생의 마지막에 가서 당황하고, 후회 하게 될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제국 - 변화와 혁신의 천 년 역사
이노우에 고이치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로마 제국(Roman Empire)’은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한다. 무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이 제국은 지중해는 물론 서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많은 유,무형의 흔적을 남겼다.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연안의 매우 넓은 지역을 장악한 로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상적인 국가로 묘사 된다.

 '로마'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BC 8세기 경 부터 AD 395년 까지 존재했던 ‘로마 제국’을 떠올릴 것이다. 제국이 분열된 뒤 형성된 동,서로마 제국에는 대부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로마 제국 분열 후 ‘서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은 매우 짧은 수명을 유지 했을 뿐이고, 로마 제국의 명맥을 잇는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은 문화와 지역의 차이로 인해 서구 사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무엇보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구 사회의 관심은 온통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유럽의 봉건사회에 쏠려 있었고, 더불어 전 유럽으로 확대 되는 ‘로마카톨릭(Roman Catholic Church)’의 영향력으로 인해 서구 사회의 역사는 특히 서유럽에만 집중 되었다. 그로 인해 서구 사회는 다른 (동)로마 제국에까지 관심을 쏟을 여력도 없었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로마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TV나 영화 등에서 대부분 로마 제국만을 그리고 있으니 그러한 인식은 더욱 고착화 될 수밖에 없다.



 동로마 제국은 대개 ‘비잔티움 제국(Byzantium Empire)’ 또는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이하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며 이전에 존재한 로마 제국과는 다른 국가로 인식 되도록 학자들에 의해 분류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제국이 그리스어로 로마 제국을 의미하는 ‘바실레이아 톤 로마니온(Basileia tōn Rōmaiōn)’ 혹은 ‘임페리움 로마노룸(Imperium Romanorum)’이라고 불린(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히 분열 전 로마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팍스 로마나’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 그 명맥을 잇는 비잔틴 제국은 비록 오늘날에는 별개의 명칭으로 불리곤 하지만 분명 로마 제국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는 ‘로마’이다.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수도를 옮긴 후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사망하고 제국이 동·서로 분열 되자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1백년도 안 되어 무너졌지만 비잔틴 제국은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이겨냈다.

 이 제국은 로마의 정치와 이념, 그리고 종교를 그대로 계승한다. 문화는 그리스권에 위치하여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두 문화와 세력의 완충 역할을 하였다. 비록 로마를 계승하고 있지만 제국의 문화는 그리스의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발전 양상을 보인다.



 이상 약술한 비잔틴 제국에 관한 자료는 국내에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비잔틴 제국에 관한 (대중적인) 대표 자료는 아마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로마제국 쇠망사(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와 ‘존 줄리어스 노리치(John Julius Norwich)’의 ‘비잔티움 연대기(Byzantium)’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George Alexandrovič Ostrogorsky)’의 ‘비잔티움 제국사(Byzantinische Geschichte 324-1453)’ 등을 들 수 있다. 기번의 책이 비잔틴 제국사를 정체와 후퇴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면 노리치의 책은 하나의 제국으로서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기번의 책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인식이 형성 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 제국’은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 역사를 살펴본다. 즉 제국의 천년사를 ‘쇠망’의 역사가 아니라 변화와 혁신의 역사,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새로운 국가로써 조망한다. 즉 이 책은 비잔틴 제국을 ‘흥망사’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 제국’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의 국가로써 기술한다. 로마 제국 못지않은 찬란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역사를 생생히 그려낸다. 로마 제국과의 연결 고리를 설명하고, 이후 어떻게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 했는지 설명한다. 문명의 꽃을 어떻게 피웠고 간직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쇠퇴해 가는지 역사의 현장을 그린다. 주요 인물(특히 황제)과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 되는 비잔틴 제국의 역사는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하게 느껴진다.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비잔틴 제국에 대한 관심은 특히 적은 우리나라에서 제국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간략히 조망하고자 할 때 참으로 유용 할 책이다. 이 책으로 개관을 잡고, 기번과 노리치의 책을 통해 좀 더 세세히 살펴보면 비잔틴 제국의 역사 전체를 그리는데 큰 부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