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문제
김효성 지음 / 옛신앙출판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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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마 카톨릭(이하 카톨릭)이 극도로 타락한 중세시대. 16세기 종교개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카톨릭은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 하였다. 사람들을 혹세무민 하여 주의 도(道)로부터 그들을 이탈 시켰다. 종교개혁은 이런 카톨릭으로부터 바른 교리를 지키고,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5세기가 지난 현재. 개신교는 지난 카톨릭의 과오를 동일하게 범하고 있다.

 독일의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자유주의 신학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는 성서비평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 신학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개신교 신학은 본연의 모습을 잃었다. 정통의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통을 지키려는 자와 새 사상을 전파하려는 자 사이에 혼란이 가중되고, 분열과 반목이 거듭 되었다.

 신학에 혼란이 발생하자 개신교회는 중심을 잃었다. 신학이 교회의 정체성을 세워주지 못하자 교회는 변질 되었다. 외적으로 선교적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교인수를 늘리고, 교회의 덩치를 키우는 게 사명인 양 그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사와 목사,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이권과 기득권 다툼이 치열하게 진행 되었다. 내적으로는 은사운동과 열린 예배 등 비성경적 행동이 교회를 혼란하게 하였다. 기독교 윤리는 사회 윤리를 받아들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교회는 총체적으로 세상성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스스로 세상의 포로가 되었다. 구별된 자로서의 역할과 자격을 스스로 버렸다.

 

 '현대교회문제'

 

 이 책은 현대교회에 나타난 여러 문제, 이를테면 자유주의신학, 연합운동, 은사운동, 기독교 윤리, 열린 예배 등 교회의 혼란과 상실을 다루고 있다. 현대교회에 나타난 주요 문제들을 다루며 성경적 답을 제시한다. 특히 자유주의신학과 카톨릭, 그리고 연합운동 등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말미에서는 근본주의 신학을 옹호한다. 그것의 오해를 변호한다. 총체적 결론으로 교회의 바른 진로를 제시한다. 배교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며 무엇이 교회의 바른 행동이고,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말한다. 

 일단의 입장에서는 이 책에 제시된 답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 될 것이다. 이맛살이 찌푸려 질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사려 깊게 청종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꼴이 될 것이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적의 동조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고 그 해결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교회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배교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 가운데 근대와 현대 철학에 물든 신학은 진리의 깃발을 스스로 내던졌다. 신학으로부터 옳은 답을 제시 받지 못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처처에서 외치는 거짓 교사와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엉뚱한 데로 가고 있다. 적은 안팎에서 교회를 유린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내분에 정신이 팔려 적의 공격에 적절한 응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지독하게 당하고 있다. 교회는 과연 이대로 당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힘없이 무너질 것인가? 

 정의와 공법이 흐르지 못하고 있는 교회에 언젠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선지자들의 미약한 목소리에 콧웃음을 치던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보다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아우성을 칠 것이다. 배교의 시대에 묵묵히, 그러나 한결 같이 주의 도를 따르는 자만이 심판의 날에 두려움 없이 주를 맞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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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톤 신학
데이빗 F.웰스 / 엠마오서적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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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이었던 프린스톤 신학교의, 특히 구학파 신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조지 마스덴, 마크 놀, 데이비드 웰스, 앤드류 호페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의 글이 실려 있고, 데이비드 웰스가 편집하였다. 그리고 부록으로 역자의 글이 수록 되어 있다. 
 
 조지 마스은 '개혁주의와 미국'에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개혁주의 현황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그리고 마크 놀은 '프린스톤 신학'에서 프린스톤 신학교의 설립 배경과 그것의 설립 이후 프린스톤 신학을 누가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 시켰는지 등을 대략적으로 다룬다. 데이비드 웰스와 앤드류 호페커는 각각 찰스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의 주요 업적을 다룬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개혁주의가 쇠퇴해 가는 새 시대에 그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추가적으로 역자 박용규는 프린스톤 신학에서 지적되는 문제인 스코틀랜드의 보편 실재론의 영향에 대해 정리한다. 특히 이 책에서 조지 말스든이 주장한 - "성경 무오는 스코틀랜드의 보편실재론이 만들어 낸 교리"라는 - 내용에 반박한다. 
 
 이 책을 통해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한 부분인 프린스톤 신학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알린 찰스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의 노력을 엿 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적인 조류와 윤곽을 이해하기에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 누군가 지적 했듯이 - 무엇이 원저자의 글이고, 또 무엇이 인용문인지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원저자의 잘못인지 역자의 잘못인지 알 수 없지만 인용문은 분명하게 인용표시를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하던 프린스톤 신학교.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변화에 휩쓸려 마침내 신학의 변질을 겪는다.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로써의 역할을 버리고,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등 자유주의의 물결에 편승한다.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하지(Charles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enridge Warfield), 그레샴 메이첸(Gresham John Mache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등 걸출한 신학자들을 통해 정통신학을 고수하던 프린스톤은 개혁주의 보루의 기능을 상실한다.
 
 신학은 여전히 진통 중에 있다. 고수하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가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새 시대에는 과연 기존의 정통이 그 자리를 계속 지킬까? 아니면 더 나아간 미래에는 지금의 새 사상이 정통이 될까? 현재의 역사적 진통이 후대에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고,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서로 자신의 입장을 계속 견지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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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미래 - 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하비 콕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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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은 앞으로 종교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 했다. 종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종교는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일부 종교는 도리어 신도 수가 증가 - 종교 간 수평 이동일 수 있지만 - 하고 있다. 과연 종교의 미래는 어떨까?

 

 여기 종교의 미래, 정확하게는 기독교의 미래를 예견하는 이가 있다. 그는 바로 현대신학자인 하비 콕스이다. '세속도시'라는 대표작과 그 외에 수많은 책을 낸 그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10대 신학자에 선정되는 등 현대신학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최신작이자 교수직을 총결산하는 기념비작인 '종교의 미래'에서 그는 기독교의 미래를 전망한다.

 

 '종교의 미래'

 

 이 책에서 하비 콕스는 기독교의 역사를 크게 세 토막으로 구분한다. 그것은 '신앙의 시대', '믿음의 시대', '성령의 시대'이다. 그는 본문을 통해 그러한 기독교의 발자취를 부분적으로 더듬어 나간다. 주요한 내용은 신앙과 믿음의 차이, 기독교 신앙이 믿음으로 퇴화 되는 과정 등을 이야기 한다. 본문에서 제시하는 기독교 역사의 여러 역사에 나타난 여러 징조들을 통해 기독교는 "성령의 새 시대에 들어가려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예측한다.

 

 기독교는 최초에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 되었다. 유럽을 통해 대서양을 건너 북중미 대륙으로 전해졌다.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 등 세계 곳곳으로 전해졌다. 그런 기독교 역사의 중심은 지중해, 유럽, 미국으로 이어졌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큰 힘을 얻었다. 그러나 현재 특히 유럽에서는 힘을 잃고 있다. 대신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등 기존에 힘을 발휘하던 지역들 외에 신흥 지역에서 큰 힘을 얻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의 특징은 오순절교를 통한 성령의 사역과 능력의 강조이다. 각종 방언과 은사가 중심이 된 그 특징적인 현상은 하비 콕스가 예견한 '성령의 시대'의 바탕이 된다.

 

 신흥 지역은 오랜 기간 유럽과 미국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받고, 큰 고통을 당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중남미와 아시아에서 발전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지역들은 이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서서히 기독교의 또 다른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과연 새 중심 지역과 기독교의 역사는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그 역사가 자못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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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그 이상의 축복 - 존 맥아더의
존 맥아더 지음, 정길호 옮김 / 소망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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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하늘로 승천하시지 전에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9, 20절)”
 
 즉,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전도를 하라는 것이다.
 
 전도는 신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고말고 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인을 포함해서 많은 신자들이 전도를 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러는지는 신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신자들이 신앙생활 중 가장 어려워하고, 꺼려하는 것 중 하나가 전도이니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오히려 적극 해야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전도. 그 이상의 축복’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존 맥아더 목사이다. 그는 철저한 성경 강해자로 유명하다. 설교와 수많은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는, 이 책에서는 전도의 내용과 방법 등을 전한다.
 
 본문은 총 3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1장에서는 전도의 자세를 말한다. 2장에서는 전도의 내용을, 그리고 마지막 3장에서는 전도의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전도이지만 동시에 복음의 내용,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담고 있다. 사실 전도 시에 전해야 하는 내용이 그것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전도와 복음에 관한 내용은 참으로 표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를 할 때에 무슨 내용을 전해야 할지 모를 때 이 책을 보면 전할 내용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전도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면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은 교과서적이기 때문에 전도를 해야겠다는 열의는 - 사람에 따라, 각자의 현재 상황과 마음 등에 따라 다르겠지만 -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굳이 단점을 찾아내야 한다면 그것이 단점일 수도 있다. 대신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책은 전도에 관한 참으로 표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 매우 큰 장점이다.
 
 전도에 관한 다른 대부분의 책들은 내용보다는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다. 대부분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전도 시에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 그 본질을 놓치곤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는 내용인데 말이다. 물론 전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도 필요하다. 그러나 전도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회심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우리는 단지 도구이다. 그렇다면 방법보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더 치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도 전도의 방법을 다루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책들과 달리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히 다르고, 특히 더 참고 할만하다.
 
 
 
 성경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누구도 복음을 듣지 못하면 무엇을 믿어야 할지 스스로 알 수 없다. 아무 것도 듣지 못해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주위에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 사실 굳이 알 필요도 없지만 - 마지막 때는 이미 도래 했고,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품으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탕자를 향해 복음의 소식을 더욱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어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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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으로서의 음악, 음악으로서의 신학
돈 E. 샐리어스 지음, 노주하 옮김 / 대장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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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음악과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음악으로 마음이 치유 되기도 하고, 병들기도 한다. 음악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음악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오죽 했으면 태교 음악이라 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게까지 음악으로 좋은 영향을 주려 할까? 그만큼 인간은 음악, 즉 소리에 민감하다.

 

 인간만이 음악에 민간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또한 음악에 민감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기쁘게 해 드리는 한 가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렇게 찬양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감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 물론 이것이 찬양의 본질적인 목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의 부가적인 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찬양,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 음악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신학으로서의 음악, 음악으로서의 신학'

 

 신학과 음악의 관계와 영향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저자는 돈 셀리어이다. 그는 에모리대(Emory University) 부속 캔들러신학교(Candler School of Theology)에 개설된 종교음악 프로그램 석사과정의 학장으로 40년 간 기독교 신학을 가르쳤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학과 음악 사이에 연관성을 깊이 생각한다. 신학과 관계된 음악의 옳은 방향을 살펴본다. 특히 음악이 신학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반대로 신학이 음악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을 차근차근 알아본다. 신학과 음악 사이에 놓인 이러한 복잡한 연관성을 이해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를 펼친다.

 

 물론 저자의 시도와 노력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눈여겨 볼 만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책은 후주까지 포함해서 122 페이지로 무척 얇다. 책은 얇지만 내용이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머리를 싸매며 읽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내용이 학문적이기 때문에 꽤 생각하며 읽어야 제대로 따라 갈 수 있다.

 

 

 

 신학과 음악은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본인은 그 두 관계를 이렇게 규정하고 싶다. 신학은 음악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 짓는다. 음악은 신학이 정한 영역 안에서 신학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즉 신학은 내용물이고, 음악은 그릇이다.

 

 음악, 특히 많은 고전 찬송가는 신학을 매우 밀도 있게 압축하여 담고 있다. 비록 찬송가를 예로 들었지만, 음악은 기독교 신학의 정수의 한 가지를 매우 한정된 양에 고밀도로 표현한다. 이렇게 음악은 신학의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물론 그렇다고 음악을 신학에 종속시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이 신학 아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 둘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려는 것 뿐이다.

 

 아무튼 어떠한 면에서 신학은 음악이 될 수 있고, 또 음악은 신학이 될 수 있다. 둘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서로 간에 적절한 도움과 화합은 신앙에 큰 이로움을 제공 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신학과 음악을 통해 자신의 신앙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 둘을 통해 신앙의 새로운 능력을 개발하고, 영역의 확장을 꽤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깊이 탐구하는데 적절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매우 유익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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