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성장을 향한 갈망 - 영분별과 영적성장을 위한 영성훈련 지침서 영성 훈련 시리즈 1
김현배 지음 / 베다니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에베소서와 디모데서 등 성경 곳곳에 신자들의 영적 성숙에 관한 말이 나온다. 오늘날 교회 생활을 하는 교인 중 영적 성숙, 영적 성장을 갈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모든 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많은 교인들이 그것을 갈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위해 실질적으로 열심히 훈련과 노력을 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라고 물으면 어떠한 답이 나올까? 아마 '별로'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정확한 통계에 의한 추산이 아니라 순전히 감에 의한 추산이긴 하지만 얼추 맞는 답일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교인들이 영적 성숙을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면 교인 수 천만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적 성장은 크리스천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 없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봉양한다는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모습이다. 아이가 어찌 부모를 섬긴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을 만한 지적, 선체적 능력이 전혀 없기에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와 같이 영적으로 미숙한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기에 온전한 섬김이 불가능하다. 더 나은 섬김, 온전한 섬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능력을 길러야 한다. 반드시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성경에 그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이 명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위해 노력한 많은 선배들의 방법을 배워야 한다.  

 시중에 영적 성장에 관한 책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추상적인 말들만 늘어 놓고 있고, 실질적이며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상당히 부족하거나 과장하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방법론을 다루는 책은 흔하지 않고, 누구도 그것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방법을 제시하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검증이 없는 방법론은 있으나 마나한 것,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영적성장을 향한 갈망'이라는 이 책은 상당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영분별을 다루는 책이다. 영분별을 하여 대적들에 대항하는 능력을 기르고, 마침대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이끄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기에 이 책은 영적 성장을 돕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은 영적 성장을 매우 갈망하기에 그것을 위한 방법을 찾아 다녔지만 본인의 노력 부족인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기에 보내주신 지인과 이 책을 통해 영적 성장을 향한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책은 앞서 말한 영분별 방법과 대적들에 대적하는 방법 등을 다루고 있다. 상당히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그 능력을 제대로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저자 본인이 직접 경험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돌보는 교인들과 그 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방법이기에 검증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믿을만 하고, 상당히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그에 대한 교과서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단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교과서는 전문서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이다. 알아야 할 부분만 짚고 넘어가는 것이기에 더 자세한 부분은 참고서를 참고하거나 자신이 직접 실천해가며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그것을 보완해야 한다. 보완은 이 책의 저자나 자신의 목회자 등에게 받으면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참고하되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기만 하고, 연습과 행함이 없으면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절대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강조하는 것이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연습을 하나마나 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기 좋으라고 하는 자기 만족일 뿐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진정한 영적 성숙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 죄악사 -상
조찬선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히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이 지음 받고 종교가 생긴 것이지, 종교가 생기고 인간이 지음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따름으로 그것이 종교가 된 것이지, 종교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그것을 따르게 된 게 아닌 까닭이다.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이다. 그리고 힌두교와 그 외에 소수 종교가 세계에 분포 되어 있다. 이들 종교 중 유독 눈에 띄는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일 것이다. 두 종교가 여러 종교 중 가장 많은 신자 수를 자랑하고 있고, 서로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반목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종교는 내부적으로 여러 파로 나뉘어 있어 그들 간에도 오랜 기간 반목과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역사가 오랜 만큼 인류 문화와 기술 등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또한 많은 병폐를 낳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대립이자 병폐는 단연 십자군 전쟁 일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2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약탈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인간의 씻지 못할 과오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는 근현대사를 주름잡는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로 인해 문학과 문화에 발전을 이루었다. 기독교로 인해 노예해방,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의 노예제는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그리 칭찬 할 만 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기독교는 인류 문명에 득과 실을 가져 왔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면만을 본다면 장점만 있는 종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책은 기독교의 2천년 역사 동안 기독교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을 고발한다. 기독교는 선의 종교라 스스로 부르짖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추악한 과거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것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그러한 일면을 모두에게 고발한다. 

 먼저 기독교 내에 만연된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한다. 성직자의 잘못 등을 고발한다. 그리고 선교 등으로 인한 기독교의 외적 잘못을 지적한다. 이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큰 사건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그 죄악상을 드러낸다.  

 이 책을 보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생히 알게 된다. 기독교가 저지른 죄들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 비록 활자로 보지만 눈으로 보는 듯 생생히 느껴진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끔찍한 죄들을 저지를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죄의 유혹에 약하기에 그러한 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죄를 그리도 태연하게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참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와 오늘 우리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기만 하려는 책이 아니다. "보아라, 선의 종교라 자칭하는 네가(기독교가) 이래도 선의 종교인가? 너는(기독교는) 위선의 종교이다!" 라고 꾸짖는 것을 목적으로 출간된 게 아니다.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여 잘못을 꾸짖고, 그것을 통해 사죄와 용서를 얻어내기 위해 출간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난 과거의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담고 출간 되었다. 앞으로 모든 종교가 합심하여 인류 평화를 이루길 바라며 출간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보고 단순히 분노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 책의 목적에서 한참 빚나간 것이고, 평화와는 또다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의도로 출간 되었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목사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보면 그는 결코 목사가 아니다. 그는 확실히 삯꾼이요, 거짓 교사이다. 왜냐 하면 그의 구원관이 심각하게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관은 기독교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 상권 84p. 

라고 말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수차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에 대한 결론은 분명하다. 그는 기독교,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 목사가 아니다. 그는 명백히 종교 다원주의자이다. 그가 말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공영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주장이지 기독교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도 인류의 평화를 원한다. 다만 그가 목사라면 목사다운, 목사의 관점에서 주장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를 비롯해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가 자꾸만 죄악을 범하는 이유가 무언지 아는가?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에 속한 자들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자와 같이 자기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선의 종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분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전쟁과 기근이 그치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기독교로 인한 인류의 혼란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분께 온전히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면 인류에 혼란이 멎을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자가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주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혼란이 발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참 구원의 종교로써 이 땅에 평화 곧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전도하는 것이다. 온전히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혼란이 멎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신자들이 온전한 신자는 아니라는 반증이다.  

 온 종교가 저자의 주장대로 함께 공존공영을 위해 애써야 한다.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이 아니다. 오직 기독교의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만이 참이다. 다른 종교의 구원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기독교의 방법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을 명심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배타성을 버리고 말이다. 마음은 고자세 그러나 태도는 저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자신을 교만하고, 우월하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지키되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말이다. 굽신거리라는 말이 아니다. 관용과 섬김을 보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간과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의 눈이 먼 까닭일까?  

 기독교의 구원은 이 땅에서의 평화가 아니다. 물론 이 세상에 평화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다가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 진정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구원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단순히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저자가 주장하는 구원관을 보면 내세적 구원은 전혀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관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기독교의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확언하건데 그는 목사가 아니다. 단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선생일 뿐이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이 못내 아쉽고, 저자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누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도 해당 된다. 기독교에도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지난날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은 단순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와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된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잘못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잘못인 것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기독교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하나님께 한 발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회개이다. 지금과 같이 그것을 무시한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 죄악사 -하
조찬선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히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이 지음 받고 종교가 생긴 것이지, 종교가 생기고 인간이 지음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따름으로 그것이 종교가 된 것이지, 종교가 만들어지고 인간이 그것을 따르게 된 게 아닌 까닭이다.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이다. 그리고 힌두교와 그 외에 소수 종교가 세계에 분포 되어 있다. 이들 종교 중 유독 눈에 띄는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일 것이다. 두 종교가 여러 종교 중 가장 많은 신자 수를 자랑하고 있고, 서로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반목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종교는 내부적으로 여러 파로 나뉘어 있어 그들 간에도 오랜 기간 반목과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역사가 오랜 만큼 인류 문화와 기술 등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또한 많은 병폐를 낳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대립이자 병폐는 단연 십자군 전쟁 일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2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총 9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루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약탈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인간의 씻지 못할 과오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는 근현대사를 주름잡는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로 인해 문학과 문화에 발전을 이루었다. 기독교로 인해 노예해방, 노예제 폐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의 노예제는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그리 칭찬 할 만 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기독교는 인류 문명에 득과 실을 가져 왔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면만을 본다면 장점만 있는 종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책은 기독교의 2천년 역사 동안 기독교가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을 고발한다. 기독교는 선의 종교라 스스로 부르짖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추악한 과거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그것이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그러한 일면을 모두에게 고발한다. 

 먼저 기독교 내에 만연된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한다. 성직자의 잘못 등을 고발한다. 그리고 선교 등으로 인한 기독교의 외적 잘못을 지적한다. 이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독교로 인해 발생한 큰 사건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그 죄악상을 드러낸다.  

 이 책을 보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생히 알게 된다. 기독교가 저지른 죄들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지 비록 활자로 보지만 눈으로 보는 듯 생생히 느껴진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끔찍한 죄들을 저지를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은 죄의 유혹에 약하기에 그러한 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죄를 그리도 태연하게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참으로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와 오늘 우리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단지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기만 하려는 책이 아니다. "보아라, 선의 종교라 자칭하는 네가(기독교가) 이래도 선의 종교인가? 너는(기독교는) 위선의 종교이다!" 라고 꾸짖는 것을 목적으로 출간된 게 아니다. 기독교의 죄악을 고발하여 잘못을 꾸짖고, 그것을 통해 사죄와 용서를 얻어내기 위해 출간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난 과거의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을 담고 출간 되었다. 앞으로 모든 종교가 합심하여 인류 평화를 이루길 바라며 출간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보고 단순히 분노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 책의 목적에서 한참 빚나간 것이고, 평화와는 또다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의도로 출간 되었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히 목사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보면 그는 결코 목사가 아니다. 그는 확실히 삯꾼이요, 거짓 교사이다. 왜냐 하면 그의 구원관이 심각하게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구원관은 기독교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만이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 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 상권 84p. 

라고 말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수차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에 대한 결론은 분명하다. 그는 기독교, 정확히 말하면 개신교 목사가 아니다. 그는 명백히 종교 다원주의자이다. 그가 말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공영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주장이지 기독교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도 인류의 평화를 원한다. 다만 그가 목사라면 목사다운, 목사의 관점에서 주장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거를 비롯해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가 자꾸만 죄악을 범하는 이유가 무언지 아는가?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에 속한 자들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자와 같이 자기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선의 종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분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전쟁과 기근이 그치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기독교로 인한 인류의 혼란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분께 온전히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이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면 인류에 혼란이 멎을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자가 주님을 제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주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혼란이 발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참 구원의 종교로써 이 땅에 평화 곧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전도하는 것이다. 온전히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혼란이 멎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혼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기독교의 모든 신자들이 온전한 신자는 아니라는 반증이다.  

 온 종교가 저자의 주장대로 함께 공존공영을 위해 애써야 한다.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이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들은 참이 아니다. 오직 기독교의 사랑과 행복과 윤리와 구원만이 참이다. 다른 종교의 구원 방법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오직 기독교의 방법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것을 명심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배타성을 버리고 말이다. 마음은 고자세 그러나 태도는 저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자신을 교만하고, 우월하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지키되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말이다. 굽신거리라는 말이 아니다. 관용과 섬김을 보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주장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간과했다. 아니 무시했다. 그의 눈이 먼 까닭일까?  

 기독교의 구원은 이 땅에서의 평화가 아니다. 물론 이 세상에 평화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기독교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다가 다른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 진정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구원관은 그것을 무시한 채 단순히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저자가 주장하는 구원관을 보면 내세적 구원은 전혀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의 구원으로 그친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관이 아니다. 기독교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기독교의 진정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확언하건데 그는 목사가 아니다. 단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 명의 선생일 뿐이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이 못내 아쉽고, 저자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누구나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도 해당 된다. 기독교에도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지난날 저지른 수많은 죄악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은 단순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와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된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잘못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잘못인 것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기독교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이들에게 사과와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하나님께 한 발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회개이다. 지금과 같이 그것을 무시한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NBONBLUE 2010-03-2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교리는 인간의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고 한다.
그럼 질문1, 캐톨릭과 불교의 교류는 케톨릭이 이단이란 말인가?
질문 2, 기독교가 전래되기이전의 이 땅의 조선민중 아니 우리들의 선조는 모두 구원받지 못한 인종들이란 말인가?

질문3, 이세상에 알지도 못하였기에, 전래되지도 못하였기에 원초적으로 예수님을 믿을래야 믿을 수도 없었던 민중들을 하나님이 구원에서 제외시켰다면, 그런 하나님은 쫌팽이하나님???아니면 인류가 공통으로 합심하여 버려도 좋을 무가치한 하나님이 아닐까?
질문4,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이고 구원받지 못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문4.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명제로 저자는 목사가 아니라고 단정함에는 개신교의 교리가 심층에 깔려 있다. 그렇다면 교리는 누가 만든 것인가? 인간이 만든 교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재단한다? 구원의 다원론을 인정한 캐톨릭과 부정한 개신교는 분명 상호 모순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교리가 옳다는 주장은 어디에 그 존재근거를 두는가?
충언1. 인간의 찢어진 눈깔구멍으로 하나님을 재단치 말라.
충언2, 그대가 밎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쓰레기통에 쳐 박아도 쓰레기 통이 아깝다.
충언 3, 구원은 생전의 구원인가? 사후의 구원인가? 죽어서 천당이라면 이세상은 지옥이란 것이 당연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진리는 단하나...온 인류가 하나님의 천국에 하루라도 빨리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전인류 동시에 지금 당장 집단자살뿐이다..그렇다면 예수의 이웃사랑은 무슨 개망발인가???

쩐디닥 2010-03-23 19:26   좋아요 0 | URL
자문자답 하시는 걸 보니, 쓰신 글을 보니 서로 뜻은 통하지 않고, 불필요한 논쟁만 오갈 것 같기에 아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날마다새로운 2010-11-0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자는 보편적인 지식만 가지고 기독교를 논하고 있군요.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적사건 어쩌고 하면서 늘어 놓으면 진짜인줄알고 혹해서 동조하게 되지만, 정말 한심한 사람이란 생각밖에 안드는군요.역사적 사건과 배경의 참모습은 덮어둔채 알량한 지식만 가지고 기독교를 논하다니

쩐디닥 2010-11-09 12:59   좋아요 0 | URL
다른 내용은 그럴 수 있다고해도 목사라는 이가 구원에 관한 진리를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혀가 내둘러지더군요. 목사가 아닌 이가 쓴 책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겠지만 목사라는 이가 어떻게 기독교 구원의 진리를 부정하고, 다르게 말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자유 2015-02-1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티기독인들의 떡밥이 된 책 !
 
배부르리라 - 작은 교회 희망의 씨앗
이태형 지음 / 좋은생각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교회는 크고 작은 교회가 있다. 여기서 크고 작음은 두 가지 관점에서의 크기이다. 먼저 외적 크기로 예배당의 크고 작음이다. 다음으로는 내적 크기로 교회의 질적 수준을 말한다. 한국에는 정말 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중 외적으로 큰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회는 작은 교회이다. 그런데 외적 크기와 내적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외적으로 큰 교회라도 내적으로는 작을 수 있다. 외적으로는 작더라도 내적으로는 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자본주의와 성과주의 등에 빠져 큰 교회가 좋은 교회, 성공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통탄 할 일이다. 교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세속주의에 빠졌다.  

 과연 교회에 성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누가 감히 하나님을 위한 일에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말을 듣지 못하면 성공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크면 하나님의 일을 다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에 빠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성공 했다며 그것에 안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가장 먼저는 목회자들의 잘못이다. 그들 스스로 부패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시켜 교회를 부패시켰다. 물론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일반화가 아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가 그렇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작은 교회이다. 그러나 큰 교회가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에 작은 교회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작은 교회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힘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생각이다. 본질을 들여다 보지 못한 생각이다. 한국의 수많은 작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큰 교회의 손길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작은 교회가 포진하여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여기 열 개의 교회가 있다. 모두 작은 교회이다. 작다고 말하는 것은 서두에서 말한 두 가지 중 외적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그 열 교회는 작은 교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작은 교회가 겪는 어려움을 보여 준다. 작은 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 준다. 외적으로는 별로 보잘 것 없는 교회들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작은 교회는 쓸모 없는 교회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나온 교회는 작은 교회의 모범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외적으로는 별로 보잘 것 없지만 내적으로는 참으로 야무지다. 외적으로 큰 교회 못지않게 큰 일을 감당하고 있다. 열 교회의 특징은 모두 섬김의 본을 잘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의 섬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섬김의 대상인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섬김을 말한다. 여기 작은 교회들은 자신의 손길과 능력이 닿는 지역 주민들을 모두 섬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들을 섬긴다. 참으로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모두 인내했고, 끝까지 섬겼다. 그렇기에 오늘의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아직 달려 갈 길이 멀지만 현재의 모습은 외적으로 큰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작은 열 교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목회자들이 모두 목회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사례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돈을 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무튼 열 교회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야 말로 참 교회가 아닌가 싶다. 크기에 상관 없이 그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분을 제외한 구성원들만을 놓고 봤을 때 교회의 중심은 교인들이다. 그리고 그 교인들의 중심에는 목회자가 있다. 그것은 목회자가 바르지 못하면 교인들 또한 바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의 외적 크기가 너무나 크다보면 한 목회자의 - 담임목사 - 손길이 모든 교인들에게 닿지 못하기에 목회자가 아무리 바르다 하더라도 모든 교인이 바르게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목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외적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둘 중 어느 한 교회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큰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작은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적 크기이다.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른지가 중요하다. 교회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 서로 간에 교제와 양육 등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외적으로는 교인들 각각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지, 자신의 가정과 이웃을 잘 돌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 내적, 외적 모습 모두가 잘 이루어질 때 건강한 교회, 바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한다. 기독교 일각에 것을 못 마땅하게 본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생각이다. 교회가 처한 상황과 역할에 따라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해야 하는지 개인적인 일을 목회와 병행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그러한 여건과 역할을 무시한 채 무조건 모든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은 바르지 않다. 작은 교회임에도 목회자가 목회를 핑계로 교회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자립하지 못한다.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벌면 교회는 자립할 수 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점은 목회자는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교인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또한 교회는 목회자에게 들어가는 사례비를 아껴 다른 곳에 재정을 사용할 수 있어 좋다. 그렇다고 현실과는 반대로 모든 목회자가 자립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와 같이 목회에 전념해야 할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하고, 그렇지 못한 목회자는 바울과 같이 자립하여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의 사정에 따라 목회자의 상황을 결정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상당히 많은 욕을 먹고 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성과주의, 세속주의에 물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가고 있다. 물론 또한 일반화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교회가 더 많다. 하지만 그런 교회가 세상에 너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각성의 외침이 있기 때문이다. 자정을 요구하고 있기에 아직은 절망적이지 않다.  

 부디 한국 교회가, 정확하게는 목회자들이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 했으면 좋겠다. 모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날을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셉의 인생 수업 - 꿈을 축복으로 승화시킨 하나님의 꿈쟁이
원용일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매우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것을 거꾸로 보면 그들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며 살았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 믿고 살면 편히 살지 못한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그것은 한 면만을 본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제대로 된 믿음으로 산 성경 인물들의 삶을 크게 보면 그들은 결국 축복을 받았다. 여기서 축복이란 만사형통을 뚯하기도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만사형통보다 더 큰 축복, 생을 마감한 후 결국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성경 인물들은 다 주목 할 만하지만 특히 여기서 주목 할 인물은 요셉이다. 꿈의 사람 요셉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참으로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릴적 아버지의 편애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렸다. 애굽의 군대 장관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지만 집 안에 모든 것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모함으로 간신히 죽음은 면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풀려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채 오랜 시간을 보내다 놀랍게도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매우 놀라운 신분의 급상승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기복이 심한 인생을 산 인물이 있을까? 그와 같이 급격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일을 어느 누가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백이면 백 견뎌내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만은 예외였다! 그의 그 놀라운 인내력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  

 요셉은 꿈의 사람이라고 불린다. 형들에게 꿈꾸는 사람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꿈쟁이, 몽상가가 아니었다. 꿈을 현실로 이룬 진정한 꿈쟁이었다. 그가 꿈을 이룬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매사에 최선을 다 했고, 지독한 인생 수업을 받았다. 그것을 모두 이겨냈기에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이다.  

 

 ’요셉의 인생수업’ 

 이 책을 통해 요셉이 어떤 인생 수업을 받았고, 그가 겪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인생 수업은 ’갈등’, ’비전’, ’성실’, ’섭리’, ’태도’ 등 14가지이다. 요셉이 각각의 수업을 통해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준다. 비단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요셉의 인생 수업은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14가지의 수업을 통해 인생에서 겪는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지혜를 준다. 요셉과 함께 받는 그 수업으로 큰 도전과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 모르는 이는 이 책을 살펴 봄으로 부족한 것들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은 신분적으로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평범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참으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닥친 인생의 어려움을 모두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들에게 버려져 노예로 팔렸고, 감옥에도 갇혔지만 그는 하나님을 신뢰 했다. 현재 상황에 낙담하고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 빠지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꿈을 이루어 주실 거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인내하고, 노력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말이다. 성경에 써 있지는 않지만 그도 하나님을 원망 했을지 모른다. 절망에 신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떨치고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자신의 현재에 충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다. 그렇기에 그는 마침내 꿈을 현실로 이룬 놀라운 축복을 얻은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빠지든 좌절하면 안 된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처절해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면 마침내 그분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