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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르리라 - 작은 교회 희망의 씨앗
이태형 지음 / 좋은생각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교회는 크고 작은 교회가 있다. 여기서 크고 작음은 두 가지 관점에서의 크기이다. 먼저 외적 크기로 예배당의 크고 작음이다. 다음으로는 내적 크기로 교회의 질적 수준을 말한다. 한국에는 정말 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중 외적으로 큰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회는 작은 교회이다. 그런데 외적 크기와 내적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외적으로 큰 교회라도 내적으로는 작을 수 있다. 외적으로는 작더라도 내적으로는 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자본주의와 성과주의 등에 빠져 큰 교회가 좋은 교회, 성공한 교회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통탄 할 일이다. 교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세속주의에 빠졌다.
과연 교회에 성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누가 감히 하나님을 위한 일에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말을 듣지 못하면 성공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크면 하나님의 일을 다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에 빠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성공 했다며 그것에 안주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가장 먼저는 목회자들의 잘못이다. 그들 스스로 부패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시켜 교회를 부패시켰다. 물론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일반화가 아니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회가 그렇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작은 교회이다. 그러나 큰 교회가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에 작은 교회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작은 교회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힘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생각이다. 본질을 들여다 보지 못한 생각이다. 한국의 수많은 작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큰 교회의 손길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작은 교회가 포진하여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
여기 열 개의 교회가 있다. 모두 작은 교회이다. 작다고 말하는 것은 서두에서 말한 두 가지 중 외적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그 열 교회는 작은 교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작은 교회가 겪는 어려움을 보여 준다. 작은 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 준다. 외적으로는 별로 보잘 것 없는 교회들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작은 교회는 쓸모 없는 교회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나온 교회는 작은 교회의 모범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으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외적으로는 별로 보잘 것 없지만 내적으로는 참으로 야무지다. 외적으로 큰 교회 못지않게 큰 일을 감당하고 있다. 열 교회의 특징은 모두 섬김의 본을 잘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의 섬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섬김의 대상인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한 섬김을 말한다. 여기 작은 교회들은 자신의 손길과 능력이 닿는 지역 주민들을 모두 섬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들을 섬긴다. 참으로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모두 인내했고, 끝까지 섬겼다. 그렇기에 오늘의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아직 달려 갈 길이 멀지만 현재의 모습은 외적으로 큰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작은 열 교회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목회자들이 모두 목회에만 전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사례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돈을 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무튼 열 교회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야 말로 참 교회가 아닌가 싶다. 크기에 상관 없이 그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분을 제외한 구성원들만을 놓고 봤을 때 교회의 중심은 교인들이다. 그리고 그 교인들의 중심에는 목회자가 있다. 그것은 목회자가 바르지 못하면 교인들 또한 바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의 외적 크기가 너무나 크다보면 한 목회자의 - 담임목사 - 손길이 모든 교인들에게 닿지 못하기에 목회자가 아무리 바르다 하더라도 모든 교인이 바르게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목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외적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둘 중 어느 한 교회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큰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작은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적 크기이다.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른지가 중요하다. 교회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 서로 간에 교제와 양육 등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외적으로는 교인들 각각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지, 자신의 가정과 이웃을 잘 돌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 내적, 외적 모습 모두가 잘 이루어질 때 건강한 교회, 바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한다. 기독교 일각에 것을 못 마땅하게 본다. 하지만 그것은 부족한 생각이다. 교회가 처한 상황과 역할에 따라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해야 하는지 개인적인 일을 목회와 병행해야 하는지가 결정된다. 그러한 여건과 역할을 무시한 채 무조건 모든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은 바르지 않다. 작은 교회임에도 목회자가 목회를 핑계로 교회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자립하지 못한다. 목회자가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벌면 교회는 자립할 수 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점은 목회자는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교인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또한 교회는 목회자에게 들어가는 사례비를 아껴 다른 곳에 재정을 사용할 수 있어 좋다. 그렇다고 현실과는 반대로 모든 목회자가 자립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와 같이 목회에 전념해야 할 목회자는 목회에 전념하고, 그렇지 못한 목회자는 바울과 같이 자립하여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교회의 사정에 따라 목회자의 상황을 결정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상당히 많은 욕을 먹고 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성과주의, 세속주의에 물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길로 가고 있다. 물론 또한 일반화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교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교회가 더 많다. 하지만 그런 교회가 세상에 너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각성의 외침이 있기 때문이다. 자정을 요구하고 있기에 아직은 절망적이지 않다.
부디 한국 교회가, 정확하게는 목회자들이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 했으면 좋겠다. 모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날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