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타 슈레브의 작품을 처음 읽다. 조종사가 죽자 그 아내가 남편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다는, 제목처럼 진부한 줄거리로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문법책을 보듯 반듯한 문장이 계속 읽게 만들더니(그래서 최근작이 아니라 중세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든다) 끝내 결말 부분에 가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배반과 배반으로 얽힌, 우리가 과연 어떤 한 사람을 정말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계속 품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청나게 팔리고 평도 좋지만 글쎄 그래도 너무 진부한 소재가 아닌가 싶다.
여성 작가들의 칙릿에 질려 남자 작가 작품으로 닉 혼비의 작품을 고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똑같은 장소에서 자살을 결심한 네 사람의 이야기인데, 닉 혼비 특유의 위트는 별로 느껴지지 않고 네 명의 주인공에게도 그다지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소설이었다. 미성년자와의 스캔들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티비토크쇼 진행자 마틴, 중증장애아들을 뒀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년 여성 머린,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괴로워하는 피자배달원 제이제이, 언니의 실종으로 인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십대 문제아 제스. 그나마 머린에게 가장 공감이 갔는데. 결국은 90일만 더 살아보자는 제안이 성공한다는 이야기. 아무리 힘들어도 석달만 석달만 힘을 내서 살아간다면 길고긴, 험난한 인생살이도 견딜만 하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겠다. 각자의 문제를 혼자만 안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 타인과의 소통, 우정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해야한다는 메시지나 긍정적 결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 다소 실망스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은 모두 머린의 대사. -What I've come to realize over the years is that we're less protected from bad luck than you could possibly imagine. -If you don't go out, and never meet anyone, then nothing happens.
짧은 분량 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 그러나 분량이 짧다고 항상 책이 빨리 읽히는 것은 아니다. 유명했던 이언 매큐언의 난해한 문장이 많이 간단해졌다는데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용은 별 것 없고 말이다.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가서 첫날밤을 실패로 보낸 남녀의 이야기인데, 대부분이 신혼여행 첫날 이야기이고 극히 일부분이 과거회상, 마지막 일부가 남자 주인공이 살아온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인생에서 '만약 그때 이렇게 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은 누구나 해보는 생각이라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서구의 60년대의 상황이 잘 나와있다지만 내가 거기에 공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도 이언 매큐언, 이언 매큐언 하길래 기대를 많이 하고 읽어서 그런지 실망이 꽤 크다. 역시 내 영어실력이 부족한 걸까. 아무래도 심리소설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작품의 대부분이 실패한 첫날밤 이야기라니 너무 따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암튼 이래저래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길게 길게 늘여쓰는 작가들의 재주도 대단하지 않나 싶긴 하다.
역시 재밌다. 얽히고 섥힌 사건들을 따라가다보면 힘겨운 일상도 잊혀지게 마련. 라스베가스 배경이 좀 나와서 재밌었다. 이 소설의 주 배경인 뉴저지에 있는 아틀랜틱 시티는 무시하면서 라스베가스는 다들 가고 싶어하더군. 이 시리즈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자동차 이름이 실명으로 나온다는 것. Civic, Explorer, Sentra, Hyundai, Ferrai, Mazda..등등 차에 대한 이미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약방의 감초같은 룰라의 정신없는 대사들도 재밌고. 뚱뚱한 흑인 여자를 보면 혹 룰라가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근데 항상 멋지게 나오는 모렐리나 레인저는 절대 상상이 안 된다. 왤까.
겨울을 만끽하고 싶어서 읽은 책. 뉴햄프셔가 배경인데 나같은 사람은 못 살 것 같다. 하긴 솔제니친은 러시아를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며, 러시아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러시아와 기후가 비슷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살았다지. 암튼 덕분에 안 그래도 추운데 더 오싹해졌다. 애니타 슈레브 이 작가 처음엔 문장이 참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묘사가 참으로 섬세하고 객관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진부한 이야기인데 너무나 묘사가 섬세해서 이야기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맨해튼에서 잘 나가던 건축가가 졸지에 아내와 어린 둘째딸을 교통 사고로 잃고 큰 딸(Nicky)과 단 둘이 남게 된다. 그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정리해서 시골로 시골로 향하다가 아주 외진 뉴햄프셔 지방에 정착해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가구를 만들어 팔며 근근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한겨울 숲속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게 되어 아기를 구해주게 되는데 그 아기 엄마가 찾아오고 눈 때문에 발길이 묶인 아기 엄마를 며칠 재워주면서 딸은 오랜만에 엄마같은 포근함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그동안 못 했던 말도 하게 된다. 아기를 구해주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일들로 니키와 니키 아빠는 자신들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고 치유해 나갈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딸은 상징적으로 첫 생리를 시작하고 구해준 아기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걸로 작품은 끝난다. 줄거리를 요약하니 참으로 싱거운데 열 살에 엄마와 사랑하는 어린 여동생을 갑자기 잃어서 힘든, 하지만 힘겨워하는 아빠를 위해 내색하지 못하는, 낯선 환경에 놓여진 채 희망없이 살아가는 열 두살 여자 아이의 심정이 너무나 잘 나타나있다. 아기를 버린 엄마가 니키 머리를 땋아줄 때 느끼는 감정(살살 잠이 오는 포근함), 아빠에게 아빠만 아내와 딸을 잃은 게 아니라 나도 엄마와 동생을 잃었다고 항변하는 모습, 아빠와 딸은 아빠와 딸일 뿐이지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언급 등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아이가 화자인 소설은 따분해지기 쉬운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