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외국 살던 시절, 한국책에 목말라 있던 시절 우연히 전자책을 사 보게 되면서 부터 였던 것 같다. '옥상에서 만나요' 였던 것 같은데 완전 내 스타일이라 그 다음부터 그의 모든 책을 다 사 보게 되었던 것 같다. 그것도 다 전자책으로. 해외에 살면 전자책 마니아가 아니어도 전자책을 사보지 않을 수가 없어서 본의 아니게 전자책 마니아가 되었었다.
귀국해 우리 나라에 살게 되면서 실컷 한국책을 읽던 와중에 정세랑의 신작 출간 소식을 접했으나 차일피일 구매를 미루다가 결국 또 전자책으로 그의 책을 사서 보게 되었다. 전자책, 종이책 둘 다 마구잡이로 읽는 스타일이지만 이제 본국으로 왔으니 굳이 전자책을 고집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사실 요즘 눈의 피로 때문에 전자책을 멀리하고 있던 상황) 정세랑=전자책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새 클릭클릭으로 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간만에 읽은 전자책은 역시나 편리했다. 클릭 몇 번으로 바로 읽을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그 즉시성과 편리성이 놀라웠다. 물론 읽으면서 그것도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일부러 천천히 읽어가면서, 이 책을 쪼물딱쪼물딱 하면서 읽었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종이책을 샀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긴 했다. 생각해 보니 종이책으로 정세랑 책을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전자책 책장에는 그의 책이 가득하지만 말이다.
각설. 전자책 종이책 타령은 그만하고.
믿고 보는 정세랑이라 그의 첫 에세이라니 더 반가웠다. 읽고 보니 역시나 였고. 근 십 년 전에 했던 여행기를 손질해서 팬데믹 시절에 출간한 기막힌 타이밍과 더불어 그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 여행이 금지된 지금 이 시절과 맞물려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이틀 동안 아끼며 읽었다.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여행지가 정세랑과 함께라면 그렇지 않았다. 이틀 동안 행복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최대 가능성' 과 '자기 결정권'이라는 말이 정말 크게 와 닿았고, 외국에서 살아가는 것의 힘겨움(유명 운동선수들의 아내를 예로 들며 자기 일이 없고, 친구가 없고, 언어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자기 일이 있어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결혼을 하면 누구의 커리어를 우선으로 할지 힘겨루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싸움으로 사라지는 여성 예술가들이 적지 않다'는 언급은 책이라는 매체에서 처음 본 것 같아 반가웠다. 비단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전방위에 걸쳐 다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덧붙이고 싶다. 또 수많은 유명 남성 문인들이 아내들을 착취했다던데 정세랑 본인도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책의 부분이 있었는데 새삼 공감이 되었다. 나는 늘 유명 남성 예술가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내의 거취나 생활을 더 궁금해했던 일인이었기에. 그런데 그 역사가 오래 된 것이라니. 왜 그 생각을 못 해봤을까 싶었다. 뿌리깊었을 것이다. 다른 유형의 여성 노동의 착취와 더불어.
정세랑의 여행 추억과 내 여행 추억이 맞물리면서 상승 효과를 낸 듯하다.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이 겹치기도 하고 빗겨 가기도 하고. 내가 가본 곳은 고작 뉴욕, 런던, 아헨이 아닌 다른 지역의 독일, 오사카가 아닌 다른 지역의 일본이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겹치는 듯 겹치지 않는 그 느낌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여행이 멈춘 시기에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가상의 경험을 하고 싶어' 이 에세이를 냈다는 그에게 감사한다. 그 목표는 천 퍼센트 달성된 듯 하다.
다른 것이 종말이 아니라 여행이 금지된 현 상황이 종말이 아닐까 하던 소설가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끔찍한 종말의 시대에 '정세랑과 함께 여행하는 가상의 경험'이라니 얼마나 소중한가. 정신을 차리고 전자책으로 나마 쪼물딱거리며 계속 조금씩 곱씹어 봐야 겠다. 계속 봐도 질리지 않을 듯한 책. 같은 책을 거의 다시 안 보는 나로서는 정말 최대의 찬사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