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임계장'이 임씨 성을 가진 계장님인가 했었다. 알고 보니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었다. 이 책은 저자인 조정진 씨가 공기업을 퇴직하고 60세부터 63세까지 임시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겪은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대한 고발서라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소위 에세이 시대를 맞이해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이 많은데 이 책도 그런 부류의 책들과 함께 분류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은 그 처참함이 너무 충격적이라 나이브하게 이 책을 그런 책들과 함께 분류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읽어가면서 십오년만의 타향살이를 접고 귀국해서 겪었던 일련의 일들이 떠올랐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오랜만에 복귀한 직장에서 왜 그리 분위기가 험악해졌는지, 마트나 아파트 등에서 마주치는 노동자들이 왜 그리 한결같이 불친절한지, 왜 험악한 표정과 무례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 시기가 IMF이후였다고 한다면, 더 심화된 것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 이후였다고 한다면..이로부터 10년, 20년이 훌쩍 넘어선 지금, 점점 심화된 이 사태들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말도 안 되는 노동 조건 아래에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늙은 소'처럼 묵묵히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임계장'이 비단 임시 계약직 '노인장'만이 아니라 모든 비정규직에 해당되는 일이라, 읽으며 목이 메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렇듯이 책의 의도와는 다른 사항들에 관심이 갔다. 이 책은 임시 계약직 노동자의 노동일지이며, 따라서 비인간적인 근무 조건과 환경에 집중해서 읽어야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책에는 한국사람들만이 지니는 특이한 사항들이 있었다. 개인적인 세세한 사항들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저자는 자녀의 학비를 위해 아파트 경비원과 빌딩 경비원이라는, 격일로 24시간 근무를 해야하는 일을 동시에 했다. 그의 자녀들이나 배우자가 그의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자녀들은 학교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등등이 궁금해졌다. 책에 나온 바로는 저자는 대학교 3학년인 대학생 자녀의 학비와 대학 졸업 후 로스쿨에 진학하려는 자녀의 학비 마련을 위해 임시 계약직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교 학비와 대학원 학비는 자녀들 본인이 감당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물론 저소득층의 자녀들이 빚만 한껏 지고 대학교를 졸업한다는 넋두리도 많이 들리지만 미국만 해도 이 일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자본의 논리인 것 같지만 버락 오바마도 미셸 오바마도 다들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아이비리그를 졸업했고, 버락 오바마도 그의 저작들이 빛을 봤기 때문에 마흔도 훌쩍 넘은 나이에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대학 학비는 한국의 몇 배라 더 어마어마한데도 그들은 그것을 부모에게 미루지 않고 당연히 본인이 짊어져야 할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고소득층에서는 그러지 않겠지만 그것은 논외로 해야한다.) 


만 18세가 되면 자녀가 부모의 집을 나와 독립을 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면 조정진 씨의 삶이 조금 달라졌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집 자식들은 안 그러는데 내 자식만 그러라고 하기 미안해서, 다들 자녀가 중고등학교 때는 학원에 보내고, 대학교 때는 학비를 대주고, 결혼 시기가 되면 기둥 뿌리를 빼서 결혼자금을 대기 위해 이렇게 임시 계약직 노동자가 된다. (거칠게 말하면 그렇다고 해두자.) 그들이, 부모들이 만 18세가 넘은 자녀들에게 집세와 생활비를 받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학비, 용돈을 대 주는 것을 당연시 하는 이 문화가 가볍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임계장들을 더 많이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다소 외람된 생각을 해 본다.  결혼비용도 대부분 부모가 부담하고 나중에 자녀가 낳은 손주들까지 돌봐야 하는, 이 가족 내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구조가 아니 죽을 때까지 자식을 거두어야 한다는 부모들의 뼈 속 깊이 박힌 생각들이 바뀌지 않는 한 더 많은 임계장들이 거리로 나와 그들의 일자리는 더 열악해질 것이다. 이 구조가 더 많은 임계장을 양산하고 더불어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하거나 해도 아이를 낳지 않게 한 것은 아닌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계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누가 보나 뻔하다면 누가 부모가 되려고 하겠는가. 


전태일도 다시 울고 갈 임계장 이야기에 괜히 한국의 답답한 가족 구조가 떠올라 한껏 더 마음만 답답해졌다. 무엇이 더 먼저이고 무엇이 더 나중일까. 무엇이 더 문제고 무엇이 더 시급한 걸까. 모든 것이 문제다.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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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018 2021 출간 연도 순이다. 최근으로 올수록 글밥은 적어지고 그림이 늘었다. 최근 추세인 듯한데 나에게는 그게 더 좋다. 우지현이라는 봇물을 톡 건드리면 다양한 그림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멋진 그림과 그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들, 그와 관련된 작가의 이야기들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물론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든다. '풍덩'이 하나의 주제로 모인 듯한 그림들이 나와서 제일 좋은 듯 하다. 앞으로 어떤 책들이 나올까 계속 궁금해 지고 전작들도 더 찾아봐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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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 완전한 휴식 속으로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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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처럼 우울은 물에 녹는다. 기분이 찌무룩할 때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기분이 달라진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욕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월등히 기분이 나아진다. 집에서 샤워만 해도 그러할진대 수영장에 가면 효과는 배가 된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나쁜 감정들이 씻겨나가고, 이리저리 헤엄치다 보면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진다. 우울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옅은 농도로 희석된다. 물에는 그런 정화의 기능이 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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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 완전한 휴식 속으로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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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부르는 아름다운 책. 수영도 제대로 못 하는 종말같은 이 시대에 맞춤인 책 같기도 하다. 다같이 책으로 풍덩! 에세이는 짧고도 깊이가 있고 그림들은 아름답다. 여기에 무얼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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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편집자, 디자이너 등등 책을 펴내는데 관련된 모든 사람의 합이 잘 맞아야 나올 수 있는 책이란다. 저자 입장이라면 책이 이렇게 아름답게 나왔다니 너무 행복할 것 같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지와 중간중간 나오는 우지현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다. 그림 자체로도 멋지고 내용과도 조화가 잘 이루어져 멋진 책의 오라를 만들어낸다. 윈윈효과. 


곽아람의 신작이 내 손에 들어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우선 전작인 '바람과 함께, 스칼렛'을 읽었었다. 


두 권을 비교해 보니 전작을 읽은 것이 완전 예습이 되었다. 한층 성숙해진 저자 곽아람의 모습도 보이고. 저자와 함께 나이드는 느낌도 든다. 


세라, 앤, 스칼렛 등은 내용이 살짝 겹치기도 하지만, 신간에 나오는 스무 명의 메인 캐릭터들이 모두 여자라는 점, 책 속 그림들도 다 여자라는 점, 그 그림을 그린 사람도 여자라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물론 독자들도 대부분 여자들일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작품들은 고전 작품과 현대 작품들이 골고루 선정되었고, '유리가면'에서부터 '마스다 미리'작품 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긴즈버그'까지 다루는 작품들이 전방위라는 점이 멋지다. 특히나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이나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 등과 같은 최신작이 다루어진 것도 좋았다. 역시나 곽아람의 뛰어난 작품 선정 능력, 분석 능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책읽기'라는 부제도 좋고, 무엇보다도 제목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를 읽는 순간 이것이 나의 모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살아내면서 느끼는 다양한 모멸감을 품위있게 대하는 방법은 바로 책읽기이며, 이는 정확하게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책읽기가 아니라면 이 지리멸렬한 일상을 품위있게 버텨나가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광화문 용돈녀'라며 40대 독신녀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하고 낀 세대인 40대의 처지를 마스다 미리의 마리코 목소리를 빌려 털어놓기도 한다. 


원래 의도는 가벼운 자기계발서였다는데 이런 멋진 책이 나와서 무엇보다 다행이고, 연애 이야기를 써보라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니 그 부분에서도 먼 훗날 곽아람의 연애에 대한 생각을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물론 유독 연애 이야기만은 꺼내지 않는 곽아람으로 유명하다지만 세월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헛되더라도 희망을 품어 본다.


저자와 같은 세상에 살며, 함께 늙어가며, 그의 성숙과 나의 성숙이 겹쳐지며 느끼는 독서의 즐거움과 감동이 새삼 사무친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이야기를 해서 그 점도 좋았다. 처음부터 그 이야기를 했다면 정말 지쳤을 것 같다. 우리도 '폴리애나'처럼 '기쁨 찾기 놀이'를 하며 이 시기를 버텨나가야 겠다. 인생이란 결국 버티는 것이므로. 버텨나가는 데 이 책이 참으로 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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