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대하소설을 떠올리면 단연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다. 다음 권의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지 읽을 수록 읽어내릴 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하고 첫장이 마지막장이 될때까지 밤잠을 설치게 했던 이야기꾼 조정래의 장편소설은 처음 접한다. 한권이라 금방 읽힐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하소설 못지 않은 긴 시간을 담고 있고, 각 인물들의 처지가 한 인물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잘 이어 읽어야 했고 기억과 현실이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스릴도 느낄 수 있다. 한국적인 너무도 한국적인 소설의 배경이랄 수 있는 6.25 전쟁전 이데올로기가 한창 불꽃을 일어나고 있던 한 농촌에서 벌어진 지주가문의 몰락는 그 중심의 선 대장장이의 배점수가 있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2대를 걸쳐 일어난다. 각 네편의 중편이 한 권의 장편이 되기에 연작소설의 느낌을 들게 한다. 이름도 바꾸고 한 기업의 사장이 되어 신분도 출신도 모두 바꾸고 살아가는 황만복의 원래 이름은 배점수다. 어느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은 그동안 잊으려고 한 아니 잊고 싶었던 일로 혹여 가족들에게 아니 자신에게 죄를 물으려는 것은 아닌지 밤잠을 설친다. "배점수씨,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소름끼치는 낮은 목소리의 숨통을 조이는 어조가 연상되게 한다. 과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궁금증을 더하게 하는 소설의 시작이다. 점수는 동생 순월이가 마을 지주인 신주사네 아들 병철이와 친구들의 의해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만 오히려 죽도록 매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분이 풀리기도 전에 아버지에 이끌려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게 된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가고 지주계급이었던 신주사네가 친일로 몰리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 만큼 어떤 벌이 시원하게 해소해 주지 못했던 중 노동자 농민들의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면 그를 혁명의 앞에 서게 했던 방선생과의 만남이 이어진다. 그들의 한을 풀어줄 일임과 동시에 삼봉산의 혈을 끊어야 한다고 선동자의 말에 창을 내리 꽂고 신씨가문의 남정네들을 모조리 몰살하는 데 앞장서게 된 뒤 모두 38명의 사람을 죽이게 된다. 혁명의 성공을 자신했던 방선생의 자살은 배점수는 산으로 북으로 도망다니게 된 신세가 된 뒤 아내와 칠성이는 마을사람들에게 붙잡히고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을 내세운 철저한 계획이나 실행을 하는 등의 일련의 추리소설을 연상시키지만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는 이야기다. 아버버지가 저지른 일을 알아가는 현재의 아들이 난리통에 도망간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칠성이와 조우, 결국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고 죽는 점수의 결말은 다소 허탈하게 만든다. 역시라는 찬사가 나오게 하는 글의 매력에 빠지게 하고 하룻밤에 한 권을 읽었던 이십대의 하얀밤이 떠오르게 했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