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취향, 차별의 또 다른 말

 

 취향은 사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흔히 취향이라고 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제목 <개인의 취향>처럼 취향은 개인과 항상 붙어 다닌다. 누구는 아디다스보다 나이키를 좋아하고, 누구는 트로트보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서 좋다는데 다른 반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이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아디다스를 좋아하는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혹자는 나이키가 더 예쁘니까…”, “클래식은 아무래도 트로트보다 고상하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고상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안 예쁘고 천박하다고 외면 받던 것이 지금은 예쁘고 고상한 것으로 환영 일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취향은 사회적 산물이다. 취향은 시대, 지역, 교육수준,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나이키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아디다스보다 좋은지 판단 할 수 없고 트로트와 클래식 역시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탁월한 것/천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 구도 안에서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객관적 분류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되고. 그 자리에서 높음/낮음의 형식으로 지배관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홍성민, 2012: 41)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 주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다시 고급 취향/대중 취향으로 나누는 것이다. , 취향은 차별의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그 차별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개인적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예술에 대한 취향은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 가구, 패션 등도 여기에 속한다. 클래식 공연장과 유명 호텔의 식당에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아마 출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르메질도 제냐 양복을 입고 롤렉스 시계를 찬 사람은 햄버거 가게와 힙합 공연장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서로 간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일상의 모습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이어져 있고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홍성민, 2012: 42)   

 

문제는 교육이다

 

 부르디외는 교육이, 문화 활동이 지배관계로 이어지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술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때는 나름의 해독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해독능력은 공부를 통해서, 예술작픔에 자주 노출되면서 길러진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안목은 바로 교육의 산물이다. (홍성민, 2012: 42)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의 아이는 어릴 때부터 흔히 고급 취향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의 높은 경제적 수준과 문화적 수준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습득하기 까지 오래 걸리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음악으로는 클래식, 그 중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은 설문지에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주로 <평균율 피아노곡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꼽았다. (홍성민, 2012: 73)   

 이것들은 오랫동안 피아노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피아노곡들이고 작곡가도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집단운동, 신체적 접촉이 많은 운동 보다는 골프, 테니스, 요트, 승마, 스키, 펜싱 등을 즐긴다. 이 운동들은 혼자서 운동할 수 있는 장소와 운동용품을 구매하기 위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페어플레이가 엄격히 요구되는데, 이것은 통제된 인간 관계의 양상(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동작을 할 수 없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급 취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홍성민, 2012: 72)

 그리고 교육이 전환 전략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학력 자격을 부여하는 학교 제도는 계급 간 경계와 사회적 이동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통해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물려준다. (홍성민, 2012: 125) 돈으로만 자녀에게 물려줄 경우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경제적 자본을 문화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해서 재생산을 할 경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돈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한 비난과 지탄이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에 대한 찬사와 칭찬으로 바뀐다.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유학을 하고 해외의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사회의 문화소비 형태가 다양할수록 이러한 전환 전략, 은폐 전략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은 권위와 명예의 재생산에 투입되는 의례(儀禮)와 전략(戰略)등을 포함하는 매우 유동적인 성질의 자본을 지칭한다. 경제적 계산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본으로서, 가령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의 작품가격, 개런티 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 유형의 자본은 기본적으로 신뢰도의 척도가 되기도 하며, 때때로 부인되기도 용인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자본유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제자본이 상징자본으로 전환되어 표면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자본의 전환 및 은폐현상은 문화소비양식이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이 높다. (Bourdieu, 1997: 33)

 

예체능 교육의 필요성

 

해결책은 있을까. 물론 경제적 자본이 문화적〮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민중계급이 고급 취향을 익힌다고 해도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변할 가능성은 요원하고 심지어 학력 인플레이션처럼 자신은 어느 정도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다는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기대치가 억압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허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예체능 교육의 비율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는 가정교육에서 고급 취향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취향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클래식과 미술작품은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체념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후 나는 클래식 보다 락이 좋고, 순수미술보다 팝아트가 좋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수능에 수렴되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예체능 교육은 수능에 반영이 안되기 때문에 예체능 교육이 최소화 되기를 원한다. 아예 없어져 버린다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능 점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에 처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사고다. 수능은 상대평가다. 따라서 다 같이 체육수업을 많이 하고 음악수업을 많이 하면 자신의 점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가정교육에서 쌓을 수 없는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다.

 

랑시에르와 보편적 가르침

 

 부르디외는 학교를 통해 상속이 이루어지고 재생산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면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문제는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학교의 신화, 즉 학교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뒤집는다. 학교는 중립적 기구며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출신계급의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학교는 지배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결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만드는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형일, 2012: 233) 부르디외의 논리를 따르면 노동자의 자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문화적 자본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자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자식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계급적 취향의 차이가 사회적 신분을 구분한다고 분석해냈다. ,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신분적 위계질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분석과 동일한 논리가 『구별짓기』에서도 반복된다.

 

 부르디외는 미적 판단과 취향이 계급이 가진 자본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것들이 지배계급은 지배자의 자리에, 피지배계급은 피지배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상징적 폭력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각 계급은 이 미적 판단과 취향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계급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민중계급은 순수한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순수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문화적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결국 민중계급은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주형일, 2012: 234)

 

 지배의 구조를 밝혀서 그 논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이론이 반대로 지배의 구조를 탄탄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한 자리에서 계속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다른 계급의 언어와 시간과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정해 놓은 계급, 정체성, 문화, 취향, 지식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즉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 해방은 우선 미적 해방이었다. 그것은 조건에 의해 강요된감각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주형일, 2012, 235)

 

 다시 말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는 노동자 시인들의 경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구술과 산문 밖에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운문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통속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개인적인 실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교섭하는 일이 아니라 공적 토론과 시위에 속하는 집단적인 일이라고 결정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들의 질서에 대한 단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실천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채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선언하게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단절과 일맥상통한다. 불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불가능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선험적으로 한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해 평민이 말하거나 노동자가 주인 없이 생산하는 것은 지배적인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한편 불가능한 것의 의미는 가능한 것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이택광, 2013: 120)

 

 랑시에르는 문제는 분할 즉, 모든 것에 대해 각자의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할을 부수고 넘어서는 것이 곧 해방이다. 그는 자코토의 교육 원리에서 그 근거를 발견했다.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것의 핵심은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 능력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아무 평민이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이 지능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해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똑같이 시인의 글을 쓸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순수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명도 멸시와 차별을 받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이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이란 보이는 것의 질서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들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이택광, 2013: 102) , 제대로 된 교육과 공부는 지배/피지배를 나누는 경계와 그것을 지속시키는 구별짓기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참고문헌

 

Bourdieu,, Pierre,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역, 서울, 새물결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이택광,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서울, 자음과 모음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서울, 현암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리메이크 열풍그리고 박정희라는 판타지

 

 당시의 인기가수가 과거의 명곡을 리메이크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지만지금의 양상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가히 리메이크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불후의 명곡>, <히든 싱어> TV 프로그램들도 리메이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한국 가요 시장의 상황과 궤를 함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시작으로 EXO까지 남녀불문하고 아이돌’ 가수들이 현재 한국 가요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그들의 인기는 여전하지만 한편으로 5년 넘게 지속된 이러한 유행에 많은 사람들이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가 이제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문제는 새로운 모습의 가수와 노래가 등장할 가능성 역시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아이돌 가수들이 귀여움섹시함중성적 매력 등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하지만더 이상 파격적이지도 새롭지도 않다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한다이것이 리메이크의 유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회자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다한 쪽에서는 경제 부흥의 영웅으로한 쪽에는 무자비하게 인권을 탄압한 폭군으로 그를 재조명한다둘 다 전적으로 맞는 것도틀린 것도 아니다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치가 개입된 사실판단에 의한 논쟁은 싸움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이문세와 김광석의 노래의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리메이크 열풍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이택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 호명 받고 있는 박정희는 역사적 개인이라고 보기 어렵다오히려 박정희는 이런 역사적 사실성을 탈색시킨 채위기에 처한 증상의 임계 상황에서 출몰한다박정희는 더 이상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을 표현한다박정희가 고통스러운 증상이라는 뜻이 아니다대중이 원하는 건 증상이 예전처럼 다시 쾌락을 주는 것이다박정희는 쾌락을 주지 못하는 증상으로부터 다시 쾌락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는 대중의 요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택광『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지금의 경제와 정치 상황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대통령 한 명이일국의 차원에서 어두운 현실을 단번에 장밋빛으로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들은 초인적인 인물의 등장을 기대한다바로 그 자리에 이만큼 잘살게 해준” 박정희가 위치하고 있다.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현재의 가요계와 정치 상황과 그 속에서 호출되는 김광석과 박정희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이택광 교수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할 수밖에 없는데, “박정희라는 기표가 점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 어떤 기표로 대체되어도 좋은 텅 빈 결여의 자리라는 말처럼 사실 김광석이 아니라 유재하이문세라도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과거의 정치인이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단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박정희와 김광석이라는 텅 빈 기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금 즐거움이 결여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P.S 그렇다 해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김광석의 노래는 정말 좋다.   

     이 글은 '페루애'님의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메이크라는 표현이 꽤 와닿습니다.

까레이 2014-01-02 11:39   좋아요 0 | URL
사실 제 글도 곰곰발님 글의 리메이크죠ㅋㅋ 박정희에 대해서도 리메이크라는 표현을 썼으면 좀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요ㅋㅋ 나중에 교쳐야겠어요ㅋㅋ
 

신문 예찬, 우리 꼰대는 되지 말자

 

 신문은 정말 싸다. 가판대에서는 한 부에 800,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김밥과 똑같다. 정기구독을 하면 신문 한 부의 가격은 더욱 낮아진다. 하루에 500원이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싸도 너무 싸다. 특히 한겨레 신문 토요판이 그러한데, 몇 백원을 내고 사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삼각김밥 사먹을 돈으로 가판대에서 신문 한 부를 사고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덜 시켜먹고 신문 정기구독을 하자. 몸은 지방이 줄어 날씬해지고 머리는 지식과 상식으로 탄탄해질 것이다.

 

신문, 세상을 열어주는 창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은 얼마나 될까. 초능력과 재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 하루가 48시간이고 전세기로 세계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비슷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는 나라, 지역, 성별, 경제적 수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대개 그것들에 기초한, 그것들과 관련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환경을 둘러싼 경계를 초월하는 세상을 접하는 것을 직접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간접 경험에 보다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에 책과 신문이 있다. 그 안에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를 통해서 나의 국적, 성별, 계급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과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카메룬의 소설과 칠레 철학자의 책을 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프랑스의 『르 몽드』와 독일의 『슈트도이체 자이퉁』을 읽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매달려 있는 줄은 무엇일까

 

 미국의 과학자 샘 해리스와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샘 해리스는 “꼭두각시는 자기를 조종하는 줄을 사랑하는 한 자유롭다”라고, 피터 버거는 사회학이 우리가 사회의 꼭두각시임을 보여주지만 그냥 꼭두각시와 달리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발견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우리가 사회라는 줄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라고 하더라도 그 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회학이 아니라 어떤 공부라도 그것은 우리가 매달린 줄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고 이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이후에 그 줄을 사랑할 것인지, 줄에게 반항할 것인지를 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시위 때문에 길이 막혀 짜증난다고 욕을 하는 것과 시위가 벌어진 이유와 시위의 정당성을 생각해 본 후에 비판을 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바로 그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매달려 있는 줄 즉 정치, 경제,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언론을 믿지 않는다고?

 

 지인들과 가끔 신문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언론, 특히 그 중에서도 신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럼 뭘 믿는데?”. 물론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던”(권석천, 『중앙일보』, 2013. 8. 28.) 사실이 그 말 속에는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모든 신문을 거짓말쟁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신문을 (안 믿으니 그렇겠지만)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조중동이라서 비난하고 한겨레는 한겨레라서 비난한다. 내가 『중앙일보』를 들고 있을 때는 꼴통보수라고 눈을 흘기고 『한겨레21』을 들고 있을 때는 빨갱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홍세화 씨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생각의 좌표』에서 얘기했다.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견해는 견고하다. 택시기사는 어떤 계기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고, 또 어떤 계기로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한겨레를 읽지 않은 채 품고 있는 한겨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나처럼 같은 택시노동자 출신으로서 조금 전까지 죽이 맞아 얘기를 나누었고 지금 한겨레에서 일하는 사람의 한겨레는 그런 신문이 아닙니다라는 얘기를 통해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없다.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 택시기사는 자신이 빠진 함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택시기사 뿐인가? 우리는 정보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신문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치 개입이 철저하게 배제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접하고 사실에 대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

 

 흔히 요즘 정치권의 문제로 소통의 부재를 꼽는다. 모든 사람이 불통을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가? “너나 잘해따위의 말로 정치권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한 번 돌아보자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가 한 강연에서 꼰대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꼰대는 달리 꼰대가 아니다. ‘꼰대는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가 할 얘기를 머릿속에 이미 정해 놓는다. , 상호작용으로서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뭐라고 하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심보선 교수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꼰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살짝 바꿔서 얘기하자면, ‘꼰대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해서 남의 생각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 대해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신문을 펴보지도 않은 채 조중동수구보수라고 한겨레를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핏대를 세우고 그토록 비판하던 불통의 모습이자 꼰대의 행동이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일 매일 수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접하고 싶은 정보만 접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신문은 나와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트위터에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만 맞팔을 하고, 페이스북에서 역시 내가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사람과만 친구를 맺는다. 정보는 홍수를 이루지만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무람없고 건방지게도 신문을 보는 방법을 추천해보려 한다.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무 자르듯 나누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조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자신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보수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중에 하나를 보기 바란다. 반대로 자신이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읽기 바란다. 이 방법이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지점의 신문을 본다고 갑자기 그 쪽으로 쓸려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살짝 바꿔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 사람은 못 돼도 꼰대는 되지 말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베스트셀러는 사지 않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사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활의 작은 기조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사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나지만 예전에 몇 번 샀던 적이 있었고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사게 될 날이 오는 일은 예전에 샀던 베스트셀러 책을 기억해내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낮은 일일 것이다. 이택광 교수의 비평서, 심보선 교수의 시집 및 비평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평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않는 한 베스트셀러를 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은 몇 달만 지나면 헌책방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요즘 헌책방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책들은 <안철수의 생각>, <엄마를 부탁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이다. 잠시 베스트셀러로 영광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지만 이제는 헌책방의 책장만 차지하고 있는 골칫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베스트셀러의 운명이다. 원래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몇 천원만 내면 구입할 수 있다.

 두 번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것들뿐이다. 베스트셀러’s’가 아니라 베스트셀러라서 그런지, 자기계발서 아니면 힐링이라는 이름의 감성팔이를 하는 책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봐야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므로 읽을 필요가 없고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 마음을 다스려봐라고 말하는 힐링책들을 읽으면 있던 힘도 사라지고 짜증만 날 뿐이다. 다소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지성이 밑받침되지 않는 감상은 건전한 비판의식을 잠재우는 마취제”(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최영미)라는 최영미 작가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좋아요’ 100개도 모자란다.

 큰 이유가 위의 두 가지고 작은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자기계발서와 힐링책은 읽어도 남들과 할 수 얘기가 없다. 친구에게 그 책들의 말대로 야 그건 너가 게을러서 그런 거야,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해”,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야라고 고리타분하게 말하는 것은 왕따를 자처하는 일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예능프로를 보고 얘기를 하는 게 훨씬 낫다.

 두 번째, 돈이 아깝다. 책을 사는 데 있어 나름의 작은 기준이 있는데, 시집을 제외하고는 일단 글씨가 많은 책이 장땡이다. 책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철저히 읽는 사람의 몫이고 글씨의 양이 책의 질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글씨보다 그림이 글씨보다 여백이 많은 책을 보면 지레 질이 별로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사기가 꺼려진다.

 세 번째, 이왕이면 오래된 책을 산다. 베스트셀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많이 인쇄한다. 10년 안에 절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살려면 나중에도 살 수 있다. 책이 절판되는 주기를 10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2013년에 출판된 책보다는 2003년에 출판된 책을 그보다는 1993년에 출판된 책을 사는 것이 나중에 책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절판된 책들 중에는 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외의 부수입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아직 그래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아까워서 팔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책을 사는 데 있어 크고 작은 이유를 늘어놔봤다. 사실 책을 고르는 것에 정답은 없다. 좋다고 하는 약이 모든 사람에 좋은 것이 아니듯, 좋은 책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좋을 수는 없다. 본인이 봤을 때 좋은 책, 필요한 책을 고르면 그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함께 읽읍시다. 지금 우리의 지성 네트워크를 위하여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집에서 혼자 읽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는 일, 즉 독서 토론회에 참여한지 6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학교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시작해 지금은 학교를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혼자 책 읽기를 강요당하고 있다. 도서관은 친목이 아니라 침   묵의 공간이, 독서실이 되었다. 독서에서 행위는 배제됐고, 책을 읽을수록 마음의   양식이 살찌니 정신의 비만이 우려된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정열과 혁명의 책   도 혼자 읽는 조용한 독서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읽은 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지 못한다. 노동이나 자본, 탈핵 같은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책을 혼     자 읽으면 뭐하나.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그 교양을 쌓아서 어디에 쓰지? 그것     이 삶을 더 비참하거나 힘들게 만들지는 않는가.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지고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계급, 세계화 같이 거대한 담론을 다룬 책이라면 그 강도가 훨씬 심해지는데, 알아봐야 씁쓸한 이물감만 커질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을 절로 떠오르게 한다.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착각)라는 심보선 교수의 시처럼 말이다 

하지만 함께 읽는다면 다르다. 나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때로는 날선 논쟁을 통해 때로는 의기투합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장대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나와 다른 성별, 나이, 지역의 사람과 토론을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과 사고를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생각, 나의 일상, 나의 주변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혼자 읽는 것이 나와 내가 판단한 저자의 모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라면 함께 읽는 것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그들 각각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들이 만들어내는 다대다(多對多)’ 소통이다. 토론의 인원이 5명이라면 그 5명에 더해 그들이 판단한 저자의 모습 5명이 더해져 10명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이다.

토론 속에서 경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난다. 이택광 교수는 프랑스 철학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활발하고 자유로운 지식인 공동체를 들고 있다. 이 공동체의 가운데에는 에콜 노르말 대학이 있었고, 거기에는 루이 알튀세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에콜 노르말과 알튀세르가 특별히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한 일은 학계의 지식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연 것뿐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을 지칭해서 개념의 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서로 부딪히고, 예술과 정치학이 서로 조우하는 갈등과 종합의 과정이 이런 초청 강연과 세미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철학자로 언급하는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또는 조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론가들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 통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이런 사실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철학에서 수학〮철학〮정치〮예술〮신학, 심지어 사랑까지도 공평하게 자신의 입장과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콜 노르말의 분위기는 지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성차의 한계도 넘어서는 사상의 용광로였다고 발리바르는 회상한다. 이런 유니섹슈얼이라고 부름직하다는 발비라브의 말에서, 새로운 사상이 출현 할 수 있는 조건은 기존의 한계들을 극복하는 상상력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택광,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물론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토론회가, 그 외의 수많은 토론회들이 과거 개념의 당에 비하면 규모와 수준에 비하면 한참 모자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적인 한계와 성차의 한계를 넘어서 함께 얘기를 나누고 사유하는 정신만은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같은 책에서 “(인문학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비판적 사유는 푸대접을 받는 상황에서)막연하게 인문학의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선 자리에 지성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에서 나의 깜냥으로 나름의 지성의 네트워크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읽읍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참고

아직도 책을 혼자 읽으시나요?, 하승수, 『한겨레21, 2013. 11. 15 987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이택광, 자음과모음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