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는 은 정말 이 되어버렸다

 

 뻔한 이야기지만 동네의 작은 서점이 하나둘 없어지고 있다이제 책을 사는 일은 동네가 아니라 인터넷과 종로광화문신촌 등 도시에서 이루어진다큰맘을 먹지 않는 한 책을 구경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책을 사는 것은 일상을 떠나 일이 되어버렸다.

 나름의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인터넷에서는 항상 할인을 하고 큰 서점에서는 책뿐만 아니라 학용품은 물론이고 액세서리까지 살 수 있다문제는 이런 물질적 장점이 아무리 많아도 동네 서점이 주는 정신적 만족을 메꿀 수 없다는 데 있다.

 책이 주는 매력 중 하나는 낭만 혹은 똥폼’, 지적 만족 혹은 지적 허영심이라고 생각한다어디선가 보았던가 들었던, ‘오늘 책 세 권을 샀다저녁은 굶어야겠다고 지금도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동네 서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이야기다지나가다 우연히 서점을 들렀고 다시 우연히 굉장히 좋을 책을 발견하게 되고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지만 근사한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사고 마는 것이다비록 저녁은 굶게 되었지만 그는 얼마나 뿌듯했을까마치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 혹은 가난한 독학자가 된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어느 때보다 열심히 책을 읽었을 것이다.

 책을 사려면 지하철을 타고 종로의 큰 서점을 가거나 인터넷을 켜고 주문을 해야 하는 지금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정확한 예상과 확실한 의도에 의해 책 구매가 이루어진다돈이 부족하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책을 사는 일에 낭만(또는 똥폼’)은 사라졌고 계획과 계산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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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멘토와 그 이유

 

걸작도 졸작도 없다

 

  나에게 멘토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어쩌면 아주 많기 때문에 일일이 꼽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지만 세 사람이 걸어가면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고견을 다시 한 번 꺼낼 수 밖에 없다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에 방문했던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는 졸작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다졸작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공자의 말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 의 등장하는 세 사람 중 한 명인 불선자(不善者)’가 콜라니가 말한 졸작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비록 보통보다 모자라지만 그 사람과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나름대로 안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깨닫는다면 나의 사고와 이해는 한층 더 유연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걸작과 선자(善者)’와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다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고 뛰어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나의 생각과 세상을 보는 눈은 더욱더 깊고 넓어질 것이다방법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걸작과 선자의 행동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나름대로 분석해보는 것이다그리고 좋은 점은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은 나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지 졸작도 걸작도불선자도 선자도 없는 게 아닐까졸작과 걸작불선자와 선자를 나누는 일은 결국 나에게 달렸다공자의 말에 담긴 의미 역시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무엇보다 고정관념과 편견도 배제한 채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와 열린 마음이 가장 필요한 멘토가 아닐까.

 

멘토와 도반(道伴사이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

 

  내 주변에는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죽비로 내려치듯 항상 따끔한 충고를 해주시는 교수님, 글쓰기의 선배이자 스승이신 기자 선생님여자문제와 시사문제는 물론이고 언제든 영화와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 이들 모두는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질문과 반성하게끔 만드는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다항상 가까이 하고 싶다.

 좋은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끊임없는 사유만이 있을 뿐이다그 사유는 또 다른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다시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어낸다이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나의 깜냥은 조금씩 커져간다그리고 좋은 질문을 갚기(?) 위해 나 역시 좋은 질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그럼으로써 나는 또 조금 커진 것이다.

 한 교수님으로부터 질문이 없는 자신을 항상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다그 말이 가슴에 새겨진 후 나는 항상 질문을 하려고 노력한다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 해도 괜찮다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관해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새로운 생각과 창조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언젠가는 괜찮은 질문을 하는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그때는 멘토아니 적어도 누군가의 도반(道伴)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도반,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의미다가장 좋아하는 말이다멘토가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도반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이자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멘토를 찾기보다는멘토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누군가의 도반이 되고 싶다.

 짝사랑처럼 나 혼자만 도반이라고 생각하는 관계라도 좋다어쩌면 더 좋은 일일지 모른다내 마음대로누구와도 도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신문영화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도반이다나는 오늘도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도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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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 ‘수상한 그녀를 둘러싼 불편한 현실

 

 영화 <수상한 그녀>의 기세가 대단하다. 곧 관객 수 5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흥행에는 원맨쇼에 가까운 배우 심은경의 빼어난 연기가 한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심은경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영화 <써니>에서 주목을 받은 심은경이 이제는 혼자서도 영화를 책임질 수 있는 배우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못내 찝찝하다. ‘수상한 그녀의 맹활약은 감동을 일으키고 폭소를 자아내지만 그녀를 둘러싼 수상하고 불편한 현실은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오말순 왜 수상하게 되었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말순(나문희 분)의 남편은 독일 탄광에서 죽는다. 갓난아이는 전적으로 그녀의 책임이 되었다. 가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성격은 지독해졌고 돈을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키워낸 교수 아들(성동일 분)은 그녀의 유일한 자랑이자 희망이다

 이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의 모습이다. 자신의 인생보다는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를 보여준다. 그녀에게 사랑은 사별한 전 남편뿐이다. 박 씨(박인환 분)를 좋아하는 맘이 있지만 재혼은 머나먼 이야기다. 그저 아들 사랑, 손주 사랑뿐이다. 노인에게 가족에 대한 사랑 외 다른 사랑은 모두 꼴불견으로 비쳐진다. 이는 노년의 여자를 모두가 멀리 질러버리고 싶은 골프공으로 비유한 영화의 첫 장면이 그대로 보여준다.

 노년의 여자가 골프공이라면, 노년이 사랑을 이루기는 물에 빠진 골프공을 꺼내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박씨의 외동딸 박나영(김현숙 분)이 아버지와 오두리(심은경 분) 사이를 두고 재산을 목적으로 접근하는 여자로 몰아가는 영화의 한 장면은 노년의 결혼과 사랑을 둘러싼 유산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재혼을 하는 순간 연금이 사라지는 현재의 유족연금제도는 노년의 사랑을 가로막는 단단한 벽이다.

 오말순이 청춘 사진관을 통해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된 것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 아닐까. 젊어진 오말순, 오두리는 젊어진 자신의 몸을 어색해하지만 이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한승우(이진욱 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젊어진 박 씨와 즐겁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사랑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다.

 

모성은 과연 본능인가?

 

 오말순은 가수가 되고 싶었다. 노래 실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오두리는 오말순의 꿈을 현실로 만든다. 오두리는 오말순의 손자(진영 분)와 함께 밴드를 시작한다. 그리고 곧 국내 최고의 무대에 서게 된다.

 영화가 이대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오말순은 오두리의 몸으로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하나씩 이뤄가고 이진욱과 행복하게 살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히, 손자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하고 우연하게 그날 수술이 많아서 피가 부족하다. 그리고 다시 우연의 일치로 손자의 혈액형과 오두리의 혈액형이 똑같다. 오두리는 손자를 위해 수혈을 결심한다.

 피를 뽑으면 오두리는 다시 오말순으로 돌아간다. 오두리가 자신의 어머니 오말순임을 알고 있는 아들 현철은 오두리를 말린다. 그냥 가라고, 젊은 몸을 얻었으니 자신만을 위해 새 인생을 살라고 말이다. 하지만 오두리를 거부한다. 다시 태어나도 너의 어머니일 것이며, 네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결국 오두리는 수혈을 하고 다시 노인의 몸으로 돌아온다.

 가족의 사랑을 다룬 전형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감동은커녕 허무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의 사랑과 행복은 오두리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모성은 본능적인 것, 숭고한 것,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젊음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오말순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 그것을 포기한다.

 차라리 현철의 말대로 그냥 갔더라면,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인 한승우를 당장 만나러 갔더라면 어땠을까. 영화의 초반부에 노인문제 전문가인 현철이 대학교 수업시간에 노인에 대해 어떤 고정관념과 편견이 떠오르는지 학생들에게 묻는다. 노인, 그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희생, 과거에 어머니와 아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그들은 지금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다시 희생을 강요당한다.   

 

문제는 여전하다

 

 오두리의 수혈로 손자는 살아났고 오두리는 다시 오말순으로 돌아갔다. 다 함께 손자의 공연을 보러 간다. 원수지간이었던 오말순과 며느리는 갑자기 친한 사이가 되었다. 눈에 띄기가 무섭게 며느리를 구박하고 야단치던 오말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서로 장난스러운 농담을 주고받는다. 누가 마법을 부렸는지 수십 년을 동안 앙숙이었던 고부관계가 한순간에 좋아졌다.  

 둘의 우호적 관계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혹 나중에 아들과 며느리는 오말순을 다시 노인 요양원에 보내려 하지는 아닐까. 그러면 오말순은 다시 청춘 사진관으로 달려가 젊은 몸으로 변하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 걸까.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갈등이 밀봉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여전히 그들 곁에 머물고 있다. 영화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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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좋군요.

까레이 2014-02-10 19: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ㅋㅋ 페루애님 글 보고 속이 뻥뚫리는 기분이었어요ㅋㅋ
 

플랜맨, 근대성에 대한 성찰

 

정원사의 삶, 정재영

 

정재영은 플랜맨이다. 시계와 알람이 없으면 불안 증세가 찾아오고, 조금이라도 삐뚤어진 것을 참지 못하고, 1급 결벽증으로 더러운 것이라면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으며, 모든 일은 규칙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일어나서 잠에 들기까지 모든 일이 계획에 의해 돌아간다. 6시에 일어나 6 5분에 이불을 개고 6 10분에 씻고 항상 똑같은 시간에 정확히 출근을 한다.

 그에게 계획적으로 된다는 것은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는 근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모든 것은 계획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이성에 대한 믿음의 반영이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갖고 철저한 계획대로 행동한다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 여기에 비합리적인 세계에 이성과 합리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이 더해져 믿음은 더욱 공고해진다.

 발전을 통해서 인간은 시계로 매사를 정확한 시간에 통제할 수 있고 위생용품의 발달로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발전과 진보와 궤를 함께하는 책을 다루는 도서관 사서는 그의 성격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직업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에 따르자면 이는 그가 근대인에 빗대어 표현한 정원사의 생활방식에 정확히 부합한다.

 

근대 이전에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냥터지기의 자세와 비슷했다면, 근대의 세계관과 관행을 나타내는 비유로는 정원사의 마음가짐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

 정원사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또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자지가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작은 부분에는) 질서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정원사는 자기가 가꾸는 정원에 어떤 종류의 식물이 자라야 하고 어떤 식물이 자라면 안 되는지 더 잘 안다. 그는 우선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춘다. 그는 적합한 종류의 식물들(대체로 그가 씨를 뿌리거나 심은 식물들)은 성장하도록 하고, 그 외의 식물들, 즉 이제는 잡초라 개명된 것들을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써 대지에 자신이 미리 생각해 놓은 디자인을 강요한다. 달갑지 않은 불청객인 잡초는, 그가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달갑지 않은 존재로서 그의 디자인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가장 명민하고 전문적인(아마도 누군가는 직업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유토피아 창조자(utopia-makers)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원사다. 정원은 언제나 정원사가 머릿속에서 그려낸 청사진 속의 이상적으로 조화로운 이미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낸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인류가 유토피아라는 국가에 닻을 내리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모두스 비벤디』, 160

 

 정원에 원하는 식물을 정해둔 위치에 심듯이 항상 계획과 계산에 의해 움직이고, 정원에 불청객인 잡초를 걸러내듯이 더럽고 잘 모르는 것은 만지지 않는다. 정재영은 가장 완벽한 정원사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  

 

정반대의 여자, 한지민

 

 한지민은 정재영과 정반대의 사람이다. 둘의 차이는 화성과 금성 사이의 거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에게 계획은 없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다. 늦잠을 자고 싶으면 늘어지게 자고 잠이 안 오면 밤을 새면 그만이다. 그녀의 직업(?)은 가끔 부모님이 운영하는 편의점을 돕고 홍대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일이다. 사서와 대척점에 있는 직업이다.

 여기서 한지민과 정재영의 직업은 그냥 지나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정재영이 어떻게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 되었는지 다소 뜬금없는 이유가 등장하지만 일단 사서와 록(Rock)을 하는 음악가의 차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둘은 정확한 이항대립이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야만과 싸워 이룬 문명의 기념비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책은 인류의 진보를 상징한다. 항상 계획과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성격과 사서라는 직업의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한지민은 음악가다. 게다가 기성 음악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는 록음악을 한다. 책과 사서가 이성의 영역에 가깝다면 음악과 음악가는 감성의 영역에 가깝다. 그녀는 규칙보다는 파격을, 계획보다는 무계획을, 음악과 일상생활 모두에서 추구한다.

 

무엇을 위한 시간관리와 계획일까

 

 정재영의 모습은 마치 기계와 같다. 코드를 꽂는 순간 작동되고 뽑기와 동시에 동작이 멈추는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시간에 밥을 먹고 잠에 든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학교와 회사를 가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으며 다음날을 위해 비슷한 시간에 잠을 청한다. 계획에 없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다음부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원칙에 입각한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 산업현장의 생산성을 높일 목적으로 고안된 테일러리즘은과 포디즘은 이제 산업현장과 사무실은 물론 가정을 포함한 일상생활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일종의 생존전략으로서의 시간관리는 노동세계의 가치, 즉 생산성과 효용성을 높이고 낭비하는 시간은 줄인다는 원칙에 기초한다.

조주은, 『기획된 가족』, 196

 

 시간관리가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쓸모없는 시간을 줄인다는 목적이 있다면, 과연 정재영에게 있어 시간관리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띠고 있을까. 그가 철저한 시간관리를 통해 특별히 효용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시간관리를 위한 시간관리를 하는 것이 아닐까.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분업은 많은 장점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노동 소외와 인간 소외 등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에서 나사못을 조이는 일을 하는 찰리는 이후 보이는 모든 것을 조이려고 하는 병에 빠진다. 즉 나사를 조이는 이유와 목적이 사라진 채 일에만 강박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정재영도 다르지 않다. 조금 특이한 성격이라는 말로 가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맹목적인 강박관념이 숨어있다.

 

비정상인이라는 시선

 영화에는 정재영뿐만 아니라 다른 비정상인이 등장한다. 정재영은 자신의 강박증을 고치기 위해 병원을 찾는데 그곳을 찾은 다른 사람과 강당에 모여 집단 치료를 받는다. 치료는 당사자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백하고 의사와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조언과 용기를 주는 식이다.

 문제는 이들이 꼭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치료라는 말을 썼지만 대신에 개화, 교화, 계몽 등 어떠한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 그들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아닌 바뀌어야 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이러한 생각은 병원에 걸린 그림을 통해 드러난다. 그 사진은 영장류에서 시작돼 지금의 인간까지의 진화 과정을 표현한 그림이다. ,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며 이성을 통해 끝없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무한히 뻗어나갈 발전의 앞 길을 막는 존재는 계몽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만 한다.

 

 미셸 푸코는 이성적인 것, 정상인 것과 다른 것으로 치부되고 억압되어 온 미쳤다는 것이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담론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광기는 이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게서 배제되어야 할 속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차 광기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지배적인 것이 되어 간다.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 정신의 근본으로 삼고자 했던 근대 철학은 광기를 이성의 타자로 배제시키고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 속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언어는 이성의 언어에서 제외되고 금지된다. 광기의 언어에 침묵이 강요됨에 따라 광기에 대한 담론은 풍성해진다. 미친 사람의 말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지만 미친 사람에 대한 연구와 담론은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증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과 비이성을 구분하고 광기를 배제하는 담론은 17세기에 감금이란 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실천된다. 감금을 통해 미친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된 것은 미친 사람뿐만 아니다. 걸인, 노숙자, 자살 시도자, 음탕한 자, 신성모독자 등 사회적 규범과 동떨어진 것,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것은 모두 감금의 대상이 됐다. (…)

18세기 후반이 되면 광기는 의학적 담론이 다뤄야 하는 대상이 된다. 미친 사람은 이제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 수용소에서 관찰되고 치료받아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의학적 접근은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치료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배제시키는 근대적 담론의 수정판일 뿐이기 때문에 미친 사람은 더욱더 정상인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다. 미친 사람의 말은 정신의학이 다뤄야 할 대상일 뿐 그 자체로는 완전한 침묵을 강요받는다.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86

 

 푸코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통해 광기와 비정상이 사회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이성과 정상 역시 사회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성의 기능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의 구현을 통한 인간의 해방과 진보를 주장하는 계몽적 이성은 사실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권력의 장치인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비정상적인 습관과 성격을 고쳐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눈물 겹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한 곳에 모여 끝내 비정상을 극복한 서로를 축하해준다. 모두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치료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 마음껏 비를 맞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정재영과 한지민, 영화의 마지막에 같이 비를 맞으며 뛰어간다. 아직 비를 맞는 것이 어색한 정재영이지만 한지민의 손에 이끌려 함께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다.

 비는 언제부터 피해야 하는 것이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비를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에 젖은 몸이 일상에 귀찮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습기와 축축함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젖은 이후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축축한 상태로 버스를 타야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일정부분 근대화와 관련한다. 농경시대에는 비가 생명과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한지민에게 비는 시원함과 즐거움이다. 근대의 생활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사는 그녀에게는 말이다. 정재영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활방식에 녹아들게 된다. 때로는 계획적으로 때로는 무계획적으로 살아갈 정재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진 만큼 행복 역시 늘어나지 않을까.         

 

 

참조

 

Bauman, Zigmund(2010), 『모두스 비벤디』, 한상석 역, 후마니타스,

조주은(2013), 『기획된 가족』, 서해문집

주형일(2012),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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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3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돈 받고 원고 팔아도 되겠습니다. 좋군요. 제가 6개월 동안 읽은 알라딘 서재 글 중 톱 10이군요...ㅎㅎㅎㅎㅎ. 이 영화 급 땡기는데요. 봐야겠네요...

까레이 2014-01-31 15:30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ㅋㅋ
근데 이 영화 뒤로가면 병맛입니다.... 신파가 따로 없습니다...

소재는 좋은데 이야기 풀어나가는 게 영...
 

삐끕인생론, 싸구려 댄스를 추자

 

 며칠 전, 친구 필호가 아는 형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얘 글 많이 써요. 약간 삐끕느낌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하지만 담담한 느낌을 지향하는 나에게 삐끕이라니, 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향은 지향일 뿐 엄밀한 사실이다. 나는 삐끕이다. 정확히는, ‘B이다. 하지만 B급을 비급이라고 발음하면 안 된다. ‘자장면보다 짜장면돈가스보다 돈까쓰가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지듯, ‘B특유의 싼 맛과 부족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삐끕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강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삐끕은 전혀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B급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흔히 고급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클래식과 추상적인 미술을 감상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고 그나마 중간예술인 사진과 영화를 볼 뿐이다. 영화 중에서도 A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급에 머물러있는데, 가끔 A급 흉내를 내볼 요량으로 타르코프스키나 히치콕 같은 거장의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지만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B급 본능이 올라와 하품이 나오고 딴짓을 하고 만다.

 B급 성향은 예술에 대한 취향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 깊숙이 퍼져 있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탁월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고, 책을 좋아하지만 고전은 어려워 읽지 못하고, 심지어 얼굴과 키마저도 딱히 잘생기지도 크지도 않은 그저 어중간한 B급이다. 태어날 때 이미 B급으로 운명지워진 것일까.

 그 때문인지(라고 핑계를 대며) 대학교도 B급이고 성적마저도 A+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B+만 받아도 감지덕지한 실정이다. 취업을 할 때 학점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이라면 다행이다(제가 본 회사에 최적화된 B급 인재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나의 한심함에 혀를 차거나 불쌍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조금 잔인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한참 못난 녀석이네하고 스스로를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이런 B급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B급인 나의 깜냥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은 나름의 장점이 있는데, 현실은 씨끕인데 삐끕을 꿈꾸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사회학자들의 표현의 빌리자면 계급의식, ‘본인의 계급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B급을 넘어설 수 없는 걸 알기 때문에 목표를 정할 때도 B급으로 정한다. 사실 학점 A+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안 받는 것이다(사실 받고 싶어요). A+을 받기 위해 앞으로의 인생에 별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책의 구석에 있는 말까지 외우느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다른 책을 보자는 것이 학점에 관한 나의 우스꽝스러운 철학이다.

 “포기하면 편해”, <슬램덩크>의 안감독님 한 말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A급을 포기하면 편하다. A+ 학점을 포기하고 B+을 목표로 하면 시험기간에도 보고 싶었던 책을 볼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다. A급은 아예 포기했으니, B급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고 재미있게 B+로 지낼까 고민만 하면 된다.

 옷도 마찬가지여서 명품 옷을 사는 일을 포기하는(정확히는 포기 당하는) 순간 다양한 디자인에 가격도 싼 구제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품 옷 한 개 조차 사기 힘든 십 만원으로 구제 옷을 사면 집에 들고 오기 힘들만큼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이제 그 많은 옷들을 어울리게 잘 조합해서 입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삐끕이 함부로 에이끕흉내를 내려고 하면 쓸데없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길 뿐이다. 그저 싸구려 댄스를 추고, 싸구려 인생을 살면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홍상수 역시 어떻게 보면 B급이다. 정말 촌스럽게도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고 역시 B급이 최고야라고 조용히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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