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차별의 또 다른 말

 

 취향은 사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흔히 취향이라고 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제목 <개인의 취향>처럼 취향은 개인과 항상 붙어 다닌다. 누구는 아디다스보다 나이키를 좋아하고, 누구는 트로트보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말 그대로 개인의 취향이다. 좋아서 좋다는데 다른 반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나이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아디다스를 좋아하는 사람,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과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혹자는 나이키가 더 예쁘니까…”, “클래식은 아무래도 트로트보다 고상하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고상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안 예쁘고 천박하다고 외면 받던 것이 지금은 예쁘고 고상한 것으로 환영 일이 부지기수인데 말이다.      

 취향은 사회적 산물이다. 취향은 시대, 지역, 교육수준, 경제적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나이키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아디다스보다 좋은지 판단 할 수 없고 트로트와 클래식 역시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탁월한 것/천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사회적 구도 안에서 가능하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객관적 분류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되고. 그 자리에서 높음/낮음의 형식으로 지배관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홍성민, 2012: 41) 미학적 취향이 사회적 주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다시 고급 취향/대중 취향으로 나누는 것이다. , 취향은 차별의 또 다른 말이다.

 하지만 그 차별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특히 개인적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예술에 대한 취향은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전통적인 대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 가구, 패션 등도 여기에 속한다. 클래식 공연장과 유명 호텔의 식당에서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 아마 출입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르메질도 제냐 양복을 입고 롤렉스 시계를 찬 사람은 햄버거 가게와 힙합 공연장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서로 간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일상의 모습들이 사실은 매우 밀접한 취향의 논리로 이어져 있고 일상의 문화가 사람들의 쾌락과 감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의 형성 과정은 사회적 분류 체계로 작동함으로써 사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억압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홍성민, 2012: 42)   

 

문제는 교육이다

 

 부르디외는 교육이, 문화 활동이 지배관계로 이어지는데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술적인 그림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때는 나름의 해독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해독능력은 공부를 통해서, 예술작픔에 자주 노출되면서 길러진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안목은 바로 교육의 산물이다. (홍성민, 2012: 42)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가정의 아이는 어릴 때부터 흔히 고급 취향이라고 일컬어지는, 부모의 높은 경제적 수준과 문화적 수준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습득하기 까지 오래 걸리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음악으로는 클래식, 그 중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은 설문지에서 좋아하는 음악으로 주로 <평균율 피아노곡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꼽았다. (홍성민, 2012: 73)   

 이것들은 오랫동안 피아노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피아노곡들이고 작곡가도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집단운동, 신체적 접촉이 많은 운동 보다는 골프, 테니스, 요트, 승마, 스키, 펜싱 등을 즐긴다. 이 운동들은 혼자서 운동할 수 있는 장소와 운동용품을 구매하기 위한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페어플레이가 엄격히 요구되는데, 이것은 통제된 인간 관계의 양상(큰 소리를 내거나, 거친 동작을 할 수 없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고급 취향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홍성민, 2012: 72)

 그리고 교육이 전환 전략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학력 자격을 부여하는 학교 제도는 계급 간 경계와 사회적 이동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자본을 학력자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통해 상속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물려준다. (홍성민, 2012: 125) 돈으로만 자녀에게 물려줄 경우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경제적 자본을 문화적 자본과 상징적 자본으로 전환해서 재생산을 할 경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돈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한 비난과 지탄이 개인적인 노력의 성과에 대한 찬사와 칭찬으로 바뀐다.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유학을 하고 해외의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사회의 문화소비 형태가 다양할수록 이러한 전환 전략, 은폐 전략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은 권위와 명예의 재생산에 투입되는 의례(儀禮)와 전략(戰略)등을 포함하는 매우 유동적인 성질의 자본을 지칭한다. 경제적 계산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본으로서, 가령 지명도가 높은 예술가의 작품가격, 개런티 등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 유형의 자본은 기본적으로 신뢰도의 척도가 되기도 하며, 때때로 부인되기도 용인되기도 하는 불확실한 자본유형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경제자본이 상징자본으로 전환되어 표면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자본의 전환 및 은폐현상은 문화소비양식이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그 가능성이 높다. (Bourdieu, 1997: 33)

 

예체능 교육의 필요성

 

해결책은 있을까. 물론 경제적 자본이 문화적〮상징적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막을 수 없고 민중계급이 고급 취향을 익힌다고 해도 그들의 계급적 위치가 변할 가능성은 요원하고 심지어 학력 인플레이션처럼 자신은 어느 정도 높은 학력 수준을 갖고 있다는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자신의 기대치가 억압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허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공교육에서 예체능 교육의 비율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는 가정교육에서 고급 취향을 배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취향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클래식과 미술작품은 내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하고 체념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운 후 나는 클래식 보다 락이 좋고, 순수미술보다 팝아트가 좋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을까.

 현재 한국의 모든 교육의 목표는 수능에 수렴되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예체능 교육은 수능에 반영이 안되기 때문에 예체능 교육이 최소화 되기를 원한다. 아예 없어져 버린다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능 점수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현실에 처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사고다. 수능은 상대평가다. 따라서 다 같이 체육수업을 많이 하고 음악수업을 많이 하면 자신의 점수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가정교육에서 쌓을 수 없는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다.

 

랑시에르와 보편적 가르침

 

 부르디외는 학교를 통해 상속이 이루어지고 재생산이 된다고 했다. 따라서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면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문제는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학교의 신화, 즉 학교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을 뒤집는다. 학교는 중립적 기구며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달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출신계급의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학교는 지배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노동자의 자식들이 결코 학교에 진학할 수 없도록 만드는 동어반복적인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형일, 2012: 233) 부르디외의 논리를 따르면 노동자의 자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문화적 자본이 없기 때문에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적 자본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자식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계급적 취향의 차이가 사회적 신분을 구분한다고 분석해냈다. ,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신분적 위계질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 대한 분석과 동일한 논리가 『구별짓기』에서도 반복된다.

 

 부르디외는 미적 판단과 취향이 계급이 가진 자본들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히면서 그것들이 지배계급은 지배자의 자리에, 피지배계급은 피지배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하는 상징적 폭력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각 계급은 이 미적 판단과 취향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계급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민중계급은 순수한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순수 미학을 자신의 미학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문화적 자본을 축적할 수 없다. 결국 민중계급은 문화와 예술의 장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주형일, 2012: 234)

 

 지배의 구조를 밝혀서 그 논리를 깨뜨리고자 하는 이론이 반대로 지배의 구조를 탄탄히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할당한 자리에서 계속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다른 계급의 언어와 시간과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사회가 그들에게 정해 놓은 계급, 정체성, 문화, 취향, 지식의 경계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즉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 해방은 우선 미적 해방이었다. 그것은 조건에 의해 강요된감각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주형일, 2012, 235)

 

 다시 말해 말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한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하는 노동자 시인들의 경우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구술과 산문 밖에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글을 쓴다. 그들은 운문으로 글을 쓴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통속적인’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의 시를 쓴다. 내가 보기에 이런 개인적인 실천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교섭하는 일이 아니라 공적 토론과 시위에 속하는 집단적인 일이라고 결정하게 하는 집단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것들의 질서에 대한 단절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실천은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채 생산할 능력이 있다고 노동자들 스스로 선언하게 하는 훨씬 더 근본적인 단절과 일맥상통한다. 불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중의 지위를 가진다. 한편으로 불가능을 주장하는 것은 가능한 것의 영역을 선험적으로 한정하는 데 사용된다. 다시 말해 평민이 말하거나 노동자가 주인 없이 생산하는 것은 지배적인 논리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한편 불가능한 것의 의미는 가능한 것의 울타리를 무너뜨린다. (이택광, 2013: 120)

 

 랑시에르는 문제는 분할 즉, 모든 것에 대해 각자의 자리를 정하고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분할을 부수고 넘어서는 것이 곧 해방이다. 그는 자코토의 교육 원리에서 그 근거를 발견했다.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것의 핵심은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으며 그 능력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공부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아무 평민이나 스스로를 인간이라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자신과 모든 사람이 지능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해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똑같이 시인의 글을 쓸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순수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명도 멸시와 차별을 받지 않고 쉽고 편하게 이러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학교 교육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시에르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혁명이란 보이는 것의 질서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역량들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이택광, 2013: 102) , 제대로 된 교육과 공부는 지배/피지배를 나누는 경계와 그것을 지속시키는 구별짓기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참고문헌

 

Bourdieu,, Pierre,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정일준 역, 서울, 새물결

주형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이택광,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 서울, 자음과 모음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서울,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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