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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글을 통해 타자의 아픔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나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을까? 힘듦과 아픔을 끄집어내어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그 때의 느낌과 감정들을 수없이 되새긴다. 기존의 감정을 강화시키거나 다른 감정을 덮입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때론 기회가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내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대단한 건지 꺼내 보이며 봐달라고 징징대기를 수번을 거친다. 기억으로 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대학생때부터 시작했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현재의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며 바라보는 자세도 배워가고, 또한 과거의 나는 어떠했으며 수많은 사건들 중에 나를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쳤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더듬어 가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과거 사건으로 인해 지금도 남아 있는 감정의 덩어리, 또는 찌꺼기들의 출처를 파악하는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한 두번, 수번을 반복하고 나면, 그 사이에 과거 힘든 일들은 나의 관심에서 슬며시 뒤로 물어나 있고, 그동안 새로이 쌓여있던 것들을 다루기 시작하는 작업들이 연속해서 진행된다.
가족만큼 폐쇄된 집단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의 이유를 대며 객관화 할 수 없고, 드러내기 힘든 가족사. 가족의 구성원의 단 한사람이라도 비정상적인 어른 또는 아이가 존재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그것들로 파생되는 수백만개의 결과물. 가족 안에서 권력과 힘을 가진 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연약한 가족 구성원들을 향한 억압과 폭력. 그곳에 한번 갇혀버리면 빠져나오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출입의 선택은 적어도 어른(또는 힘을 가진자)에게만 있다. 아이들에게는 선택이라는 옵션조차도 주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드는 수많은 억압과 제약이 존재하는 작은 세상에 갇히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욕망은 존재하지만..바깥 세상의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곳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다른 형태의 위험과 두려움에 맞서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끔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아버지 없이 나 혼자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다는 생각을 하면 공포가 밀려온다" (이북, 56% 지점) 모드는 곁에 있었던 선생님과 동물들 덕분에 용기를 품었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사악한 탈출의 시도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소소하게 규책을 바꾸고 때로는 꽤 크게도 어겨보지만 아버지가 죽는다는 협박은 실현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서서히 사악한 생각이 고개를 내민다" (이북, 57% 지점)
모드의 경험과 동일한 선상에 놓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비교적 서로간의 균질한 요소를 지니는 가족 공동체가 구성원들간의 사고가 획일화되거나 억압된 행동을 강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초1 때 다리에 화상을 입고 한달 입원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내내 그 때의 사건의 원인은 본인의 탓이었음을 내 앞이나 가족들 앞에서 자주 자책하시곤 했다. 자책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사건의 결과물인 다리의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허벅지 안쪽의 1/2를 차지할 정도로 작지 않은 흉터이지만, 어릴때는 허벅지의 대부분이 흉터로 덮여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나깨나 흉터 걱정이셨다. 키가 자라면서 점점 흉터의 portion은 작아졌다고 기뻐하시긴 했지만, 흉터가 모두 사라질거라는 희망은 없었기에, 여러가지 대책을 간구하셨다. 그 중에 하나는 흉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게 함으로 흉터의 존재를 (일시적 또는 의도적으로)사라지게 하는 것은 흉터에 대한 나와 타인의 부정적인 반응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라고 부모님은 생각하셨던 것 같다. 짧은 반바지, 치마를 못입게 하셨다. 매끄럽지 않은 나의 허벅지가 상대방에게 불쾌감/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은 나에게도 그 반응을 직접 마주할 자신이 없게 만들었다. 짧은 반바지를 입지 말라는 부모님의 권유가 온전히 나의 안위와 안전을 위함을 알았기에 그들이 만들어 준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을 못했다. 이 사실은 친구와의 친밀도를 확인시키는 도구로도 사용하기도 했다. 나의 흉터를 보이고 알리는 일은 마치 '너는 나의 베프야' 같은 선포였다. 하지만 상대방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엄청난 비밀을 폭로했는데, 상대방은 '그럴 수 있지' 정도로 가볍게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나도 '사악'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자유를 누려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생각이 들었고, 공고해 보이던 울타리를 뛰어넘을 용기와 자신감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넘어오기까지, 지나한 시간들이 필요했고, 바들바들 마음조리며 시도했던 작은 도전이 쌓이고, 그리고 많은 이들의 관심과 격려들이 결국에는 벽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올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넘어 선 그곳을 바라본다. 그곳은 또 다른 많은 이들의 편견, 선입견, 관심없음들이 쌓여 만들어진 곳이었다.
나의 반바지에 대한 자유함은 '정상적인 몸'에 대한 편견으로부터의 도전일 수 있다. 그리고 모드의 자유함은 '정상적인 가족,부모'에 대한 편견으로부터의 도전일지 모른다. 나의 몸을 바라보는 타인의 의식을 고려하여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바라볼때 무지와 편견의 눈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모드의 고백으로 알게되 모드의 삶은 한 개인의 뒤틀린 생각과 신념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를 바라보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 또는 관계 안에서 나 역시 내 신념과 가치관에 무제한으로 무게를 실어 상대방의 자유를 침범하고 제약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꺼내 펼쳐 놓고,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짓눌리고 뒤틀린 인간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에 등돌리지 않고 아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그 아픔의 주인공이자 곧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완전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