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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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으로, 보불전쟁 이후부터 1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프랑스를 가리킨다. 낙천적인 낭만의 시기, 경제적 번영과 과학 기술의 발달 속에 파리 만국박람회까지 열렸으니 당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어떠했겠는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리옹 꼬티아르가 선망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옥타브 미르보는 이러한 낭만적 분위기에 찬물을 뿌린다. 『어느 하녀의 일기』를 통해 벨 에포크의 환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작품은 마치 부르주아 가정에 하녀로 취업하여 그 실태를 고발한 잠입 르포 같다. 하위계층 여성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소설의 도발성은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뭔가 불순한 느낌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일기는 셀레스틴이 메닐-루아에 도착한 9월 14일부터 그곳을 떠나는 11월 28일까지 이어진다. 셀레스틴은 브르타뉴 출신으로, 어부였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유분방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타고난 영리함으로, 여러 가정을 거치며 노련한 하녀가 된다. 현관을 들어서면 그 집의 재정, 주인의 성품, 하인들의 노동량과 질, 그 자신의 위치까지 금세 알아차릴 정도다. 그녀의 특이성은 날씬하고 예쁜 외모에 깃든 당당함에 있다. 파리에서 문화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콧대가 높다. 한마디로 기품이 있는 하녀다. 반면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며 함께 즐길 용의도 충분하다. 매력적인 셀레스틴 앞에서 평가를 피해갈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둥이지만 부인에게는 꼼짝 못하는 랑레르 씨와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랑레르 부인을 모시게 된 셀레스틴은 이 시골마을이 감옥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지난 세월동안 일했던 가정과 주인들을 회상하게 되는데 그 면모들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가증스럽다. 졸부에 변태, 비열한 부르주아들은 하나같이 인색하다. 그들에게 하인이란 인간이 아닌, 제3의 부속물 같은 존재다. 하인들은 잠재적인 도둑이며, 그들의 노동력은 월급 이상으로 뽑아내야 한다. 하녀가 임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비가 주인 나리건 뜨내기이건 임신한 하녀는 쫓겨난다. 가정을 위해 일하는 고용인 부부도 임신이 허락되지 않는다. 기른 작물들이 썩어갈 지라도 하인들에게는 나눠줄 수 없다. 게다가 밖으로 나도는 아들을 붙들기 위한 정부로 하녀라면 싸게 먹히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다고 하인들이 당하고만 있을쏘냐. 주인의 눈을 피해 제 잇속을 차리고 재산을 불린다. 앞에선 굽실거리지만 뒤에선 조롱한다. 어떤 주인들은 어수룩해 하인들에게 이용당한다. 글을 읽으며 독자는 특히, 하녀라는 직업의 취약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녀로 일하기 위해서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야 한다. 일을 구하는게 급해 모든 조건을 수락하면 노예처럼 부려지다 쫓겨난다. 추천장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소개소 주인과 고용주들의 태도를 잘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이 난관을 거쳐 소개소를 나서는 순간 그녀들을 유혹하는 포주들이 따라 붙는다. 포주들의 감언이설을 떨쳐내고 드디어 취직하면 주인 나리와 마부, 배달부 같은 남자들의 유혹이 기다린다. 변덕스러운 주인의 손짓에 해고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정말 오갈 데 없는 하녀들이 머무는 수녀원은 더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하녀들의 노동은 착취당하며 빚은 더해간다. 노련한 하녀일수록 놔주지 않는다. 일할 만한 가정을 소개해주더라도 주인과 이미 얘기가 끝나, 수수료를 뗀다. 이 착취의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다.


이렇듯 해외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는 본토에서 하인들에 대한 착취로 나타났다. 셀레스틴을 내세워 부르주아와 정치, 종교 그리고 하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한 미르보는 허위로 가득한 세계 자체를 규탄하고 있다. 이런 시대가 어떻게 벨 에포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적으로 풍성하고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두운 면들, 일상 속의 희생들은 들여다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이러한 융성과 자부심 아래 깔린 교묘한 민족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리의 도발적인 하녀도 하류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절제와 무절제, 그 사이의 긴장과 허영을 즐기던 그녀는 카페의 여주인이 된다. 주인나리의 유혹도, 이웃집 대령의 유혹도 잘 견뎌냈건만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그 남자 때문에 성을 상품화한다! 그에게 이용당하면서도 행복한 셀레스틴은 그토록 조롱하던, 하인을 부리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백년이 지난 지금 봐도 부르주아의 호색은 외설적이며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하층민, 노동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미르보와 졸라, 두 지식인은 모두 프랑스의 국론을 양분했던 드레퓌스 사건에서, 親드레퓌스 진영에 섰던 인물이다. 평론가이자 예술 애호가로서, 미르보가 알리고 찬미하고 옹호한 문인, 화가, 조각가들은 아주 많다. 대표적으로 모네, 세잔, 고갱, 고흐가 있으며 조각가 로댕, 클로델, 마이욜이 있다. 아카데미 공쿠르의 회원으로서 발견한 메테를링크의 이름은 소설 속에서도 등장한다. 그 외에도 레옹 블루아, 쥘 르나르가 있고, 크누트 함순과 입센이 프랑스 내에서 인정받는데도 한 몫 했다. 미르보는 세상은 천재를 참아내지 못한다며 파리 살롱의 등단 형식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의 신랄한 혀가 그려낸 『어느 하녀의 일기』는 영화로 세 번 제작되었으며, 잔느 모로가 열연한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이 유명하다. 그리고 올해 개봉한 레아 세이두 주연의 작품이 있다.


(미르보에 관한 부분은 위키피디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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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2015-10-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매력적이고 당당한 하녀로군요ㅎ 읽어보고 싶어요!! 목로주점도 함께 ㅎ

에이바 2015-10-06 17:16   좋아요 0 | URL
목로주점은 서사성이 강하면서 대를 이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리즈물 중 하나라 스케일도 큽니다. 미르보 작품은 분류하자면 르포물이지요.

다락방 2015-10-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엇, 에이바님의 리뷰닷! 하고 달려왔어요. 역시나 읽기가 즐거운 리뷰입니다. 저 이책 있는데(뭔들 없겠습니까..), 역시 읽지 않은 책으로 존재... 읽고 싶은 생각을 부채줄해주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님!

에이바 2015-10-06 17: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책이 생각보다 쉬이 읽히는데 중후반쯤 이르면 온갖 군상들의 끝없는 위선에 좀 질린다고 할까 그래요.
 


이 작품은 모래 폭풍으로 인해 화성에 남겨진 우주비행사가 적성을 살려, 화성 농부로 거듭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동료가 가져온 노래 중에 노동요를 고른다. 그 후보곡 중에 데이비드 보위의 「Life on Mars?」가 있는데, 내게 떠오른 노래는 달랐다. 가사를 보면 도저히 주제가로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실제 우주비행사가 패기있게 불렀던 노래기도 하다.

 

바로 「Space Oddity」. 1969년의 오리지널 비디오.




캐나다 출신의 우주비행사, 크리스 햇필드가 우주 정거장에서 불러 화제가 되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가사를 조금 바꿔 부른다.




데이비드 보위의 이 노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사운드트랙에 실렸다. 주인공 월터의 짝사랑 상대역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가 부르는데, 보위가 재녹음을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전 출간된 『제임스 서버』 단편선에 실린 「월터 미티의 이중생활」을 각색한 영화이기도 하며, 이 사운드트랙에 실린 모든 노래가 다 좋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블루레이, 사운드트랙, 『제임스 서버』 단편선










「Space Oddity」의 'Major Tom' 은 월터를 가리킨다. 월터는 일상에서 벗어난 상상을 자주 하며, 이럴 때 그의 상태를 가리켜 'Zoned out' 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다음 클립을 보면, 월터는 좋아하는 여성에게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해 멋진 산악인(프랑스계?)이 된 상상을 한다. 그 때 상사가 이 노래의 가사를 읊으며, 「지상관제소에서 톰 소령에게, 응답하라.」면서 놀린다.

 



월터는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상상의 도움을 받는다. 다음 클립에서는 「Space Oddity」를 배경으로, 제대로 응답하는 용기를 낸다.



 

영화가 아주 뛰어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벤 스틸러의 연기와 영상미, 사운드트랙의 조화는 나무랄 데 없다. 링크하진 않았지만 롱보드 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가슴이 뚫린다. 지루한 일상에서의 해방감,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앤디 위어의 『마션』에서 나온 노래로 떠올린 월터 얘기만 실컷 했지만, 이 소설도 지루할 틈이 없는 무지 재미는 소설이다. 영화가 잘 빠졌다는데, 과연 어떠할지 기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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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5-10-0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형 서술이 가독성을 높여줍니다.ㅎㅎ

목록에 추가하겠습니다. 읽을 책은 많고 읽지는 않고, 휴우....

에이바 2015-10-05 17:45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ㅎㅎ 마션 재밌습니다. 기대한 바를 충족시켜주었죠. 8일에 영화 개봉합니다. ^^

one fine day 2015-10-05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션을 재미나게 읽은 1인으로서 영화 마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홀로살기에 큰 위안이 되었던 플레이리스트를 사운드트랙으로 얼마나 잘 구현했을지 기대가 되네요.

에이바 2015-10-05 17:46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개봉에 앞서 읽었는데 기대중입니다. 아바와 데이비드 보위는 필히 나올 것 같아요. ^^
 

-다시 주는 별점


콜리마 이야기, 바를람 샬라모프, 을유문화사 ★★★★★

꿈속의 꿈, 에드거 앨런 포, 아티초크 ★★★★☆

별도 없는 한밤에, 스티븐 킹, 황금가지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H. P. 러브크래프트, 현대문학 ★★★★

윈터 킹, 버나드 콘웰, 랜덤하우스코리아 ★★★★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시공사 ★★★☆

카페 프란스, 정지용, 아티초크 ★★★☆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

파수꾼, 하퍼리, 열린책들 ★★★☆



파수꾼, 하퍼리, 열린책들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부족함이 눈에 띄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 하다. 인종차별 문제를 미국 남부의 사고관으로 설명한다.


콜리마 이야기, 바를람 샬라모프, 을유문화사

상반기 스토너,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과 더불어 올해 읽은 소설 중 최고. 러시아 문학에 바라는 모든 기대를 채워준 소설. 


꿈속의 꿈, 에드거 앨런 포 / 카페 프란스, 정지용, 아티초크

아티초크의 두 시집은 시인의 시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더욱 만족했다. 


윈터 킹, 버나드 콘웰, 랜덤하우스코리아 

아서 왕 전설을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구나 싶었다. 콘웰 경의 다른 작품들도 볼 수 있길.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21세기 최초의 스페인 문학계의 밀리언셀러, 잊혀진 스페인 근대사를 추적하는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소설을 읽기 힘들다면...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H. P. 러브크래프트, 현대문학

번역의 질도 높아 러브크래프트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별도 없는 한밤에, 스티븐 킹, 황금가지 

최고의 작가답게 나무랄 데 없는 작품. 다크 타워 시리즈와 계절 시리즈에 관심이 생겼다.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시공사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기대치를 포함하여 리뷰엔 별 다섯을 주었다. 영국, 잉글랜드의 역사적 배경에서 환상성을 가져왔지만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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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의 책


  최초의 원전 번역(포르투갈어-한국어)이다. 영혼을 분절하여, 각 이명(heteronym)에게 성격과 역사, 인생을 부여한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 중에서도 그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반이명(half-heteronym),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산문집이다. 페소아의 대표작이며, 아주 좋은 입문서이기도 하다. 


  표지에 그려진 인물들은 페소아의 이명들.







  리틀 스트레인저


  『핑거 스미스』, 『벨벳 애무하기』의 작가 세라 워터스의 다섯번째 작품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배경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2차 대전 직후 쇠락하는 영국 귀족 가문의 대저택이 배경이다. 20세기 중반, 영국의 가치관이 변화한 시기, 상류 계급이 느끼던 위협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워터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충돌과 사라짐에 관한 이야기라고. 








  꿈꾸는 책들의 미로


  『꿈꾸는 책들의 도시』의 속편. 가상의 대륙 차모니아에서 벌어지는 시리즈 중 한 작품이다. 1편에서 화재로 파괴되었지만, 이백 년이 흘러 문학의 수도로 재건된, 부흐하임을 배경으로 한다. 부흐하임 3부작 중 2부. 책벌레들을 위한 책이라는데 어찌 피해갈 수 있으리오. 


  전편인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들녘에서 개정판으로 나왔다.








  THE 좀비스


  스티븐 킹, 조지 R.R.마틴, 닐 게이먼, 댄 시먼스... '좀비'로 대동단결한, 세계 최고 작가들의 모임. 작가들의 면모만큼 다양하고 독특한 시각으로 그려낸 작품집으로,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면서도 인간 내면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끌어낸다. 로메로에서 테크노에 이르는 다양한 스타일의 좀비 축제라니, 끌리지 않으십니까?


  반스 앤 노블 판타지&SF 북클럽 선정 도서,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선정. 







  조선소


  중남미 소설의 새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작가,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의 대표작이다. 이야기는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민족주의적 특성을 가진 중남미의 전통소설에서 보편적인 인간실존 문제와 근대성으로 발전한 것을 뜻한다. 산타마리아 3부작 중 하나로, 우루과이의 혼란스러운 정치·경제와 관료, 인간군상을 비판하며 현대인의 실존과 고뇌를 그려냈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32권.





(참고: 알라딘의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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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0-0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어엇, 에이바님 신간평가단 되셨어요? 아...기대돼요!! 이제 에이바님 서평을 자꾸 볼 수 있겠네요? 힛.
저기, [리틀 스트레인저]는 저도 어마어마하게 궁금해하고 있는 신간입니다.
:)

에이바 2015-10-01 21:4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중이에요! 그리거 리틀 스트레인저는 왠지 선정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예감이 있어요. ㅎㅎ

CREBBP 2015-10-0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틀스트레인저가 당첨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사라 워터스의 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불안의 책은 에이바님 평 믿고 저도 추천~

에이바 2015-10-01 21:50   좋아요 0 | URL
기네스님도 예감하셨군요. 어떤 날들도 유력할 것 같아 오네티의 작품을 리스트에 넣었어요. 페소아와 페소아들 읽으면서 요즘 행복해 하고 있어요. 어렵지만...
 
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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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낸 신작으로, 그의 일곱 번째 소설이다. 『파묻힌 거인』의 배경은 서기 500년에서 600년 사이로, 로마인들은 철수한지 오래이며 아서 왕은 이미 아발론으로 떠났다. 브리튼 족은 서쪽으로 쫓겨 가고 색슨족이 섬의 동쪽을 차지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섬을 덮은 자욱한 안개다. 안개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개가 생겨난 이후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제 일도, 오늘 일도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마저도 잊게 되는,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잊는 상황. 잃어버린 기억은 사소한 일일 수도,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생명체는 바로 도깨비[*1]이다. 토박이 괴물이라 언급되는 도깨비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도깨비, 엘프, 용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해 기독교도들은 토착 신앙의 주술적 요소도 믿고 있다. 망각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액슬과 비어트리스라는 브리튼 족 노부부다. 어느 날, 액슬은 아내와 '여행' 이야기를 한 사실을 기억해낸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있었고, 그가 멀지 않은 마을에 살고 있음도 기억해 냈다. 부부는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그들의 여정은 기독교 마을, 색슨족 마을, 수도원, 숲, 강, 다시 숲, 거인의 무덤 순으로 이어진다. 줄거리라 하면 이것이 다다. 그리고 소설을 휘감은 거대한 알레고리는 은근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당시 사람들은 삿된 것을 상징하는 어둠을 꺼리고 이를 떨치기 위한 주술을 믿었다. 공동체는 폐쇄적인데 이는 정치와 종교 문제이기도, 도깨비와 용이라는 두려운 존재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 인물들은 안개 문제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이보르는 안개의 원인은 하느님이 잊어버린 것이라며, 그분이 잊은 일을 인간이 어찌 기억하겠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어트리스는 혹시, 우리가 한 어떤 일에 하느님이 화가 났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한다. 색슨족 전사 위스턴[*2]과 현명한 조너스 신부는, 용 케리그 때문에 안개가 발생한 것이라 얘기한다. 아서 왕의 기사 가웨인은 이것이 멀린의 주술이었음을 확인해준다.


멀린은 왜 안개를 불러냈을까. 아서 왕 시절, 브리튼 족과 색슨 족은 전투에서 여자와 아이, 노인을 죽이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는다. 브리튼 족은 약속을 깨뜨리고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색슨 족의 증오를 일으킨다. 승리로 찾은 평화를 유지하고자 아서는 멀린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다. 증오를 희석시키기 위해 용 케리그를 이용한 거대한 주술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망각 위에 이루어진 것을 정당하다고,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하지 못하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는가? 가웨인은 아서의 결정을 옹호하며, 오래된 상처들은 망각 속에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스턴은 구더기가 아직 남았는데 어떻게 오래된 상처들이 낫겠냐고 반문한다.


한편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는 기억을 되찾으려 하면서도, 그 기억이 자신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다. 판도라가 열었던 상자를 다시 닫을 수 없듯이, 망각 속에 이룩한 평화가 깨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여정이 지속되면서 조금씩 그들은 기억을 떠올린다. 처음 길을 떠난 목적은 아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정이 진행될수록, 비어트리스가 느끼는 통증으로 인해 액슬의 두려움이 가시화된다. 부부는 색슨 족 마을에서도, 수도원에서도 치료법을 찾지 못한다. 잠든 비어트리스는 평온해 보이며, 그를 바라보는 액슬은 행복을, 이후엔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이, 픽시 도깨비들이 말한다. 그녀를 넘겨요, 그녀를 구할 치료법이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비어트리스가 마을에서 만났던 색슨족 여자, 폐가에서 만난 노파, 가웨인이 만난 과부들은 모두 뱃사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과 함께 섬으로 가려고 했는데, 뱃사공이 남편을 태워다주고 나는 내버려뒀다고. 어쩌면 뱃사공은 아케론을 건너는 카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은 죽음을 상징한다. 잠든 아내를 바라보다 떠나기로 결심한 액슬, 아들의 무덤이 저 섬에 있고 그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비어트리스의 말. 결국 이 여행은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용서와 화해를 위해, 함께 한 시절의 기억들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뱃사공의 시험은 오히려 떠날 사람과 남겨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선의처럼 느껴졌다. 산 사람은 배에 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아름다운 유산을 전승한다. (『화씨 451』) 모든 기록을 삭제, 검열하여 그 사람이 존재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없앨지라도, 기억으로 그 사람을 되살려낼 수 있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암묵적으로 동의한 망각의 커튼을 젖혀 역사적 사실을 복구하는 작업도 기억이다. (『살라미나의 병사들』) 사관의 목을 치고 기록한 역사에도 틈새가 있고, 입이 막혀도 양심선언을 하는 언론인들이 있으며, 물증을 없애 이룩한 완전 범죄에도 허점이 있다. 기억은 의심에서 시작되며 그 문은 단단히 걸어 잠글 수 없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곧 홍수가 되어 쏟아진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으며, 그로 인한 결과도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색슨 족이 증오를 기억해 내어,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과 부모가 자식을 잊는 비극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기억이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내었듯이, 소년 에드윈이 한 약속, 브리튼 족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하라는 그 약속에는 브리튼 족 부부가 보여주었던 우정에 대한 기억이 함께 할 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미래에 내릴 결정은 소년의 몫이다. 위스턴이 브레누스 경과 액슬에 대해 품은 감정이 다르고, 그가 인정을 베풀듯이 말이다. 이시구로는 색슨 족 여성의 입을 빌려 얘기한다.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함께 나눈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우리에겐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1] 도깨비: 어째서 서양 판타지 배경인 작품에서 도깨비라는 단어를 썼을까. 번역가도 고심한 부분이겠지만, 초자연적인 존재를 통칭하여 도깨비라 부를 순 있다. 그러나 소년을 공격한 것은 오우거(오거Ogre)이다. 『반지의 제왕』의 오크, 롤플레잉 게임에 등장하는 괴물로 사람들은 오우거에 익숙하다. 본문에서도 이를 가리켜 괴물이라 하며, 식인귀로도 번역할 수 있다. 차라리 주석을 다는 편이 좋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 엘프는 그대로 쓰였기 때문이다, (26쪽의 ‘변장한 엘프’) 요정에 가까운 픽시(Pixie)는 픽시 요정이 아닌, 픽시 도깨비(255쪽, 342쪽)로 번역되었다. 나에게 도깨비란 김서방 호구에 가까운 이미지라 더욱 그러했다.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도 용이 아니라지만 이는 이미 혼용되고 있기에...


[*2] 색슨족 전사 위스턴: 도깨비의 팔을 뽑았다는 점, 용에 맞선다는 사실 때문에 베오울프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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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9-24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즈오 이시구로.를 한 번 타이핑해 봅니다.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책은 아주 흥미롭네요.
도깨비 번역에 대한 님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ㅎㅎ
제 생각에도 `오거`라는 번역이 더 가까울 것 같고요. `오거`를 떠올리면 `슈렉`이 떠올라 적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깨비라면, 또 떠오르는 그림이 정해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요.

오랜만에 만나니, 용에 맞선다는 `베오울프`도 반갑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에이바 2015-09-24 17: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사실 처음인데(영화는 봤어요) 일본계 영국인임에도, 일본문화가 녹아든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게 특이하게 느껴졌고요. 아무래도 이민자 출신 작가들은 모국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잖아요, 단발머리님이 좋아하시는 줌파 라히리도 그렇고... 이시구로는 그런 범주를 거부하는 것 같아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쓰고요.

저는 판타지라는 말에 혹해서 읽었는데 완전 속았어요! 아서 왕 이야기도 나온대서 더 기대했는데 겉만 판타지이지 작가가 얘기하는 건 다른 내용이었어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도 꼽히니 한 번 읽어보셔요. `남아 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도 좋다고 합니다. 이 작품 속 도깨비는 읽는데 의아하게 느껴져 찾아봤더니 오우거더라고요. 그래서 사족을 달았습니다...

다락방 2015-09-2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응? 서양 작품에 도깨비?? 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깨비는 제게도 도깨비 방망이들고 춤을 추는 뿔난 존재로 인식되어지거든요. 노래주머니 라는 혹을 뺏어간....

가즈오 이시구로를 두 권 읽고 다른 그의 작품들도 모셔놨는데, 하하하하,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자꾸 나오면 제가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남아 있는 나날]을 읽어야겠어요.

에이바 2015-09-24 17:2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오우거가 생소할 독자를 위해서라면 주석을 다는 방법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해요. 신화 속 존재를 번역함에 있어 그 명명이 쉽지 않네요. 가즈오 이시구로 스타일이 원래 좀 몽환적인가요? 두 번 읽고 쓴 리뷰거든요. 보통 한 번 읽고 처음 감성 유지하면서(?) 쓰거든요...

2015-09-2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4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9-2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이력을 보니까 부커상을 받은 적이 있더라고요. 다음 달이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 되요. 벌써 도박사들이 노벨상 수상 후보자들을 점치고 있는데, 역시 하루키가 많이 언급되었어요. 저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작가도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근접하다고 생각해요. 노벨상 위원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작가에게 상을 줬으니까요. ^^

에이바 2015-09-30 23:48   좋아요 0 | URL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라 하는데 저도 너무 늦게 읽은 감이 있어요. 벌써 노벨상 시즌이군요. ^^

2015-09-26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30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