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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ㅣ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우메자와 리카가 횡령을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사는데 현금이 모자랐고, 인출기에 다녀오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마침 고객에게서 부탁받은 돈이 있어 얼마를 꺼내 값을 치른 뒤, 금액을 채워 놓았다. 그렇게 빌려 쓰고 채우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고, 익숙함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카는 은퇴한 고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단정한 외모와 다정함 덕에 실적이 높았다. 그래서 횡령할 수 있는 금액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작은 고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남편과 소원했던 리카는 고타의 관심에 행복했다. 띠동갑 차이가 나는 대학생, 젊음이 주는 싱그러움과 애정 어린 손길은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리카는 자신의 저축과 고객의 예금을 허물어 고타의 빚을 갚아준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돈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가꾸는데도 쓰였고 고타와 시간을 보낼 호텔의 스위트룸과 고타의 외국 여행 경비, 급전이 필요한 친구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에게도 돌아갔다. 처음엔 갚을 생각이었지만 씀씀이가 커지자 횡령액수가 늘어났고 나중엔 돌려 막는데 급급해진다.
태국으로 도피한 리카는 강가에 서서 생각한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만약’들은 말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가능성들이기에 부질없다.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자, 들키면 도망쳐서 또 새로운 삶을 살면 돼, 이러한 도덕과 현실의식의 부재는 아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쇼핑, 아니 충동적인 소비가 주는 자극에 중독되었다. 상황의 비윤리성은 차치하고, 무형의 돈을 유형의 상품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의미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손쉬운 대출제도로 인해 더 악화된다.
한편, 리카의 동창 유코는 고통스러울 만큼 절약하는 모습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딸 지카게는 도둑질을 하게 되고, 아이를 야단치는데 남편이 얘기한다. 이제는 조금 써도 되지 않을까, 너무 절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키는 대출을 받아 딸이 갖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주는데,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코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절약했지만,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격한 절약과 무절제한 소비 둘 다 좋은 답이 아니었다.
리카를 사회로 내보내고, 그녀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하던 마사후미는 출장에서 돌아와 말한다. 이제는 아이를 가져 보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 사치하며 해외여행도 가고 그렇게 살아 보자. 진작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계획이 있었다면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고가의 선물, 생활비 등 모든 것을 고타에게 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원했던 관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사후미는 리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 리카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책임을 질 것인가, 자유로워질 것인가.
리카의 횡령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상한 정의감’은 이 행위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애인과 제대로 사랑하던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비용을 마련해 두던지…. 평범했던 이가 어마어마한 횡령사건을 벌인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지만,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드러낸다. 눈 닿는 곳 모두가 돈이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런 욕망이 허상으로 둔갑하는 순간, 현실은 깨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현실에 붙들어둘까. 여러모로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