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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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르지 쾨베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세 소년으로 아직 어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없다. 아빠가 노동수용소로 떠날 때쯤 유대인들의 처우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빵 배급표를 받고, 허락 없이 도시 경계를 넘지 못하고 저녁이 되면 통금, 창문도 가려야 한다. 사람들의 눈초리에 증오와 경멸이 스민다. 수용소에서 일하기에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 동원되고 죄르지도 정유회사에서 일한다. 어느 날, 출근하는데 경찰관이 버스를 세우더니 유대인들을 내리게 한다. 몇 대의 버스를 세워 같은 일이 반복되고 해가 떨어질 때쯤 행진을 시킨다. 도착한 곳 연병장에서 독일군을 봤다. 독일로 노동이주를 할 사람을 찾습니다. 어차피 가게 될 거지만 미리 가면 좋은 대우를 받아요. 젊고, 진취적인 독신들 신청하세요. 사람들은 기차에 실려 이동한다. 그들을 감시하던 헝가리 경찰이 금붙이를 요구한다. 독일놈들 주느니 동포에게 주는 게 낫잖소! 더러운 유대인들! 물이 부족하다. 옆 칸의 노파가 죽었다.

도착한 곳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죄수복을 입은 이들이 왔다. 여러 언어가 동시에 들린다. 뜨문뜨문 독일어로 묻는다. 지쳐도 안 돼. 병들어도 안 돼. 쌍둥이 안 돼. 난쟁이 안 돼. 어린이 안 돼. 너 몇 살? 죄르지가 답한다. 열네 살. 아니 열여섯 살. 네? 열여섯 살. 몇 번 다짐한 그가 사라지고 우르르 밀려 의사 앞에 선다. 의사가 묻는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요. 짧게 보고 사람들을 분류하는 의사의 잔인한 미소. 도살장 같다. 죄르지는 자신이 건강한 그룹이라는데 약간 우월감을 느낀다. 건강한 사람을 골라내는 거라면 나도 할 만 하겠어. 어차피 일을 할 거라면 말이야. ‘식수 아님’이란 푯말이 적힌 곳에서 물을 마신다. 화학약품 맛이 많이 났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독일군은 제지하지 않았다. 목욕 전 안내사항입니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니 귀중품을 맡기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금붙이를 내놓는다. 죄르지는 그들을 돕는 죄수들에 위화감을 느낀다.

모든 체모를 밀렸다. 목욕 후 허름한 죄수복과 신발, 모자를 받았다. 건너편 여자들도 민머리가 되었다. 혼란스러우나 수프를 먹을 수 있다고 들어 기뻤다. 말린 쐐기풀수프라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어 쏟아 버렸다. 연기냄새가 이상하다. 가죽공장인 줄 알았는데 실은 화장터란다. 수용소에서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 때문이라 한다. 잠자리는 가구도 전등도 없는 창고 시멘트 바닥이다. 화장실은 하루에 두 번 간다. 아침은 춥고 낮은 찐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배고픔이었다. 사흘째 저녁, 부헨발트로 이동했다. 동물원도 있고 시설이 크고 건물이 멋지다. 군인들이 빠르고 정확하다. 문득 헝가리경찰이 떠오른다. 저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일까?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게 맞을까. 64921, 번호를 받았다. 음식과 잠자리는 아우슈비츠보다 조금 낫다. 목욕탕과 화장터가 있다. 시골수용소인 차이츠로 이송되었다. 목욕탕, 화장터 둘 다 없다. 처음으로 구타당했다. 헝가리 사람 번디 치트롬을 만났다.

살아남으려면 자포자기 하지마라. 잘 씻어라. 아껴서 나눠먹어라. 번디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하나 더, 고집이 필요하다. 기억, 희망, 즐거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자존심, 존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대인 무리로부터 배척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처음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이 경험들이 나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다.” 배급이 줄었다. 기력이 쇠한다. 외모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도 유한하고 생존법칙이 모든 걸 결정”함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흔들”리는데 고작 석 달이었다. 육신이 급격히 늙고 망가지니 정신도 무기력하고 예민해졌다. 무릎 통증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 병들고 더러운 몸에 경멸적 시선이 떨어진다. 소년은 원래 자신이 이렇지 않았음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누가 믿을까. 무마취 수술. 부헨발트로 옮겨진다는 말에, 쐐기풀수프를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기쁨을 느낀다.

크고 깨끗한 나치친위대 건물에서 치료를 받는다. 번호가 짧고(수형기간이 김) 붉은 삼각형(정치범)을 단 사람들이 많다. 육년째 수감중이라는 의사가 나이와 이곳에 온 이유―어떤 죄를 지었니―를 묻는다. 인종이 달라서요. 엄마 아빠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요.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수감자들의 레지스탕스, 미군의 진입으로 부헨발트는 해방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 어느 기차역. 사람들이 떠나고 한 남자가 다가와 묻는다. 가스실을 본 적 있습니까. 봤으면 여기 없겠지요. 그는 잠시 생각한다. 가스실이 있었다는 걸 확인한 게 아니라 들어 알고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만족해 돌아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전차를 탔다. 돈이 없다. 표가 없으면 내리라는 말에 한 남자가 부끄럽지 않으냐 일갈한다. 신문기자라던 남자는 같이 연재기사를 쓰자고 한다. 새엄마는 가게 직원이던 쉬퇴 씨와 재혼했다. 동네 노인들을 만났다. "전적으로 그것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갔다"는 소년의 말에 화를 낸다. 우린 가해자가 아니야, 피해자라고. 우리도 힘들었어.

인간을 인간답게 머무르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절멸수용소를 다른 극한 상황과 비교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이 재현불가능한 비극 앞에 로빈슨 크루소 류 재난소설은 픽션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가 자행되는 곳에서 이전의 세계―안락하고 온유하던 원래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죄르지는 분노를 느낀다. 낯설고 고된 노동도 할 만 했다. 그래서 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씩 몸이 상하고 삐걱거리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도 나는 나답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혼을 담은 그릇이 깨지는데 혼이 어찌 견딜까. 수용소를 뒤덮은 무기력과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길이 없던 소년은 그냥 아프지 않게 죽고 싶었을 뿐이었다. 돌아온 부다페스트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생활을 지속하고 있고 늙어버린 노인의 눈을 한, 절뚝이는 걸음마다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년만이 텅 빈 눈 아래 분노를 느낀다. 분노를 태울 연료도 없이.

소년은 생각한다. 침묵하고 동조한 것도 잘못이다. 아니, 사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과 학대가 잘못이다. 수용소로 가기 이전에 이미 무언가가 유대인을 다른 부류로 만들어놓았고 서서히 자라난 증오가 범죄를 묵인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조차 없던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용소 내에서 따돌림 받고 그제서야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유대인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쓰이는 용어라면 말이다. 귀향길에 들렀던 기차역에 있던 사람. 그는 가스실의 존재를 묻는다.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유대인들을 데려갔지만 설마 그런 방식으로 학살했겠어, 나치들이 문제지 나는 그 죽음에 책임이 없어. 누가 봐도 수용소에서 나온 행색의 소년에게 전차 삯을 치르라하자 부조리하다며 일갈한 신문기자는 진실을 알리고 역사에 이바지하자며 소년을 꾄다.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특종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이 지옥이라고 명명한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년의 악몽을 들쑤시면서.

소년의 분노는 독일을 향해 있지 않으며, 수용소의 삶을 지옥으로만 묘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질서정연한 독일 군인에 대한 칭찬과 감탄이 자리하며 자신의 경험을 제3자인 마냥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타인의 아픔엔 공감하나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쉽게 피로해한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픔 역시 토로한다. 나도 힘들었어, 우리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지. 그리고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종국엔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외면하는 것이다. 증인들은 화장터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는 사라질테고, 그 일들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렇게 나치의 행위를 묵인했다는 죄책감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진다. 집단적인 망각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망각의 시대에 모두가 불편해하는 일들을 자꾸 끄집어내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극을 미학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발화 순간 왜곡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면, 어떤 방식이든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증인들은 수용소에서 사라졌으며, 시간과 삶의 흐름으로 인한 남은 증인들의 기억―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쇼아》를 비롯하여 홀로코스트를 전달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문학, 애니메이션, 영화, 다큐멘터리, 수많은 목소리들……. 비극을 미학화하여 소비하는 방식이 윤리적으로 옳지않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증언을 남겨야 한다. 비단 나치 홀로코스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폭력과 피해에 대해서, 공적인 기록은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많은 증언들이 확보될수록,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방향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를 지우려는 시도들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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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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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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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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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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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0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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