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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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운데에서도 이길 수 없는 사랑은 연민에서 시작된 사랑이라 생각한다. 이미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져 그 방향을 향한 채로 시작한 감정이기도 하고, 묘하게 사람의 양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최근에 본 퀴어 영화 《내가 사랑한 남자》가 있다. 수영코치 뤼카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마르탱에 질겁한다. 일단 뤼카는 함께 살고 있는 연인 리즈가 있고, 동성애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르탱은 뤼카 주변을 맴돌며 줄기차게 들이댄다. 그러던 어느 날, 뤼카는 우연히 마르탱이 에이즈 환자이며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르탱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한편 리즈는 연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뤼카는 마르탱에게 가 버린다. 그 애는 아프잖아…. 나중에 마르탱이 사라졌을 때는 화풀이를 한답시고 리즈에게 이런 말도 한다. 너는 좋겠다? 걔가 없어져서 말이야. 리즈는 말을 잇지 못한다. 뤼카의 말에 반박하는 건 마르탱을 모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거다. 그 사람은 나 없이 안 돼, 알잖아, 너는 괜찮잖아. 너는 건강하잖아. 너는 나 없이도 다른 사람 만날 수 있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나도 니가 필요하다고. 새로운 사람, 불쌍한 사람에게 가 버린 이의 귀에 남겨진 이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다.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가 그런 내용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샤르가 패닉이 되어 이브를 껴안고 ‘내 아기, 내 아기’를 되뇔 때,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행간에 감춰진 많은 것들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보다 충격적이고, 보다 잔인한. 이브를 향한 리샤르의 감정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은 그 칼날을 무디게 했다. 이브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며, 복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리샤르. 뱅센 숲이나 불로뉴 숲에서 이브의 고통을 지켜보던 그. 이브를 만들고, 이브를 가르치고, 이브를 돌보는 리샤르는 그녀에게 미갈(독거미)이라 불린다.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이브를 고립시키기 위해 리샤르 역시 자신을 포기한다. 세상에 두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서로의 존재에 맞춰진 시계. 나만 바라보고, 내가 주는 것을 취하며, 결국 나에게 매달리는 존재. 관음하던 고통은 전이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거미줄에 잡힌 먹이를 가련히 여긴 순간부터, 조금씩 허물어지는 거미줄 위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자신을 예감하면서, 리샤르는 결국 자신의 피조물에 굴복한다. 제어당하고, 제어하는 입장의 전복. 하지만 리샤르는 피그말리온과 같은 결과를 맞이하진 못할 것이다. 이브는 여전히 리샤르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리샤르는 여전히 미친 사람이므로.


함께 한 시간동안 체득한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리샤르는 이브가 자신을 떠날까 봐, 이브는 리샤르가 언제 예전으로 돌아갈지 몰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서로를 구속하고 제한하면서, 서로에 한없이 매달리면서. 마치 세상에 두 사람만 남아 있는 것처럼, 서로만을 바라보면서. 파괴적인 감정은 강력한만큼 깨지기 쉽고, 그 안에 자리한 서로에 대한 연민은 다시 그 조각을 붙일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견딜 수 있는 선을 학습하고 그 언저리에서 머물, 불안한 관계. 아, 움직일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어져만 가는 그 감정은 비틀린 사랑일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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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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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외르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장르와 분위기는 다르지만 리안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 소설에 비할 것은 아닌데, 읽는 내내 뭔가 산만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등장인물들의 내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시점을 통해 복선을 제공한 뒤 마지막에 사실을 밝히는 방식은 이미 다양하게 사용되었지만, 『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는 그다지 세련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감상이다. 기름칠이 부족하여 톱니바퀴가 약간씩 삐걱이며 돌아가는 기분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니 다음 작품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보다 조화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우를 것이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요 네스뵈의 작품과 비교하면 캐릭터 설정이나 풀어내는 스타일 같은 것이 약간 부족해 보인다. 미아 크뤼거가 해리 홀레에 뒤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 주인공 캐릭터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으나 사건 현장으로 돌아오게 되는 클리셰를 볼 수 있다. 항상 그를 지지하는 조력자들(보통 동료나 직속상사)도 있기 마련이고, 외부(윗선)에서는 그이의 심리적 불안을 염려하고 방해하고 뭐 그런…. 그러고 보니 이제는 북유럽발 스릴러가 완전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인지 궁금하다. 소설의 배경은 노르웨이지만 왠지 모르게 미국 느낌이 난다. 요즘은 그 경계가 무너지는 추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설에 등장하는 종교집단의 대표적 예들이 그 나라를 연상시켜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첫 장부터 확 빠져들 정도는 아니다. 2장으로 넘어가기까지가 좀 고비였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소재들이 산개한, 그런 산만한 느낌이 강해서이다. 그래도 수사가 시작되는 2장부터는 조금씩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미아 크뤼거와 홀거 뭉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점은, 다른 캐릭터들의 매력을 살릴 수 있는 부분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파트 또한 좀 어설프게 분배된 기분인데, 특히 가브리엘이라는 캐릭터가 그랬다. 캐릭터 이력과 등장횟수에 비해 평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쉽다. 아무래도 미아의 인물 설정에 할애하는 부분과 복선에 집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주변부 캐릭터에 대한 안타까움은 빌런으로 등장하는 말린(크게 스포일러가 아니라서 언급함)에게도 그러했는데- 예를 들어 거울 이야기도 좀 더 풀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부수적인 부분은 쳐내는 게 맞다. 작품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전개되어서인지 리뷰를 쓸수록 아쉬운 점들이 생각난다…. 극이 막바지로 치닫는 과정에서 스스로 입을 여는 설정도 약간은 어설퍼 보였고, 진짜 빌런이 드러나는 시점도 생각보다 큰 충격이 아니었다. 그 동안 폭력과 자극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지도. 스릴러 소설을 읽으면서 나한테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판단하는 여부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느냐에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그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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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난다 2016-10-22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낀 거랑 거의 정확하게 일치해서 댓글 달러 들어왔습니다
저도 요 네스뵈 작품이랑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캐릭터 과거사/마음의 소리는 1명만으로도 족한데 두명이나 그러고 있으니 ㅠㅠㅠ 여기에 비중이 너무 실려있어서 추리과정도 영 공감이 안 가고 살인자는 사람 2~3명의 인격을 짬뽕해놓은 느낌이었어요. 뭔가 한 사람의 행동, 발언으로 안 맞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에이바 2016-10-22 10:0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신명난다님. 아주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주인공 설정에 공들인 것은 알겠는데 자연스레 풀어나가는 역량이 부족해 보였어요. 결국은 캐릭터도 평면적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요. 맞아요. 범인의 사고나 행동도 납득이 되지 않고 스토리도 별로였어요. 요 네스뵈 작품은 이에 비하면 훨씬 노련하다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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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 이름은 들어 봤지만 얼굴은 모르던 젊은 피아니스트의 매력을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이 아니라 그이가 쓴 글 덕분이었다. 책을 펴자마자 쏟아지는 추천의 글 때문에 책장을 도로 덮을까도 했다. 본편을 시작하기도 전에 광고로 힘을 다 빼는 느낌. 왜 여러 사람의 추천사를 이렇게 한꺼번에 싣나 의문이 들었다. 혹 내용의 빈약함을 이런 식으로 무마한 것일까? 그런 의심은 책장을 넘기면서 사라진다. 진솔하고 매력적인 글을 읽으며 인간 손열음을 좀 더 알고 싶어졌다.

클래식 관련 책을 보면 음악가의 삶에 대한 가십 혹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분석으로 빠지거나 한다. 간혹 어떤 글에서는 ‘연주자’로서 겪는 고민도 엿볼 수 있지만- 손열음처럼 전공지식으로 무장하고서도 이렇게도 쉽고 편안한 글은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하고 감탄하다 깨달았다. 손열음은 사람이다. 연주를 들려주는 기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좋은 해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 말이다.

그거야 다른 연주자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이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글에서 우러나오는 교양 때문이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 본 사람의 글. 클래식 음악은 서양 문화의 총체이니만큼 악기 연습 외에도 익혀야 할 ‘문화’가 상당하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동양에서 자란 이가 서양 문화를 흡수해 그 토양에서 자란 이들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해외 리뷰에서 아시아 연주자들을 손가락만 잘 돌리는, 테크닉에 치중하고 깊이는 없다는 지적을 하던데 어떻게 보면 일리 있는 말인 것 같기도 열등감이냐 싶기도 하고 그렇다.

1장은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정말 좋다. 피아니스트들은 수학적 머리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치려면 체력적으로 받쳐주어야 하고 하는 이야기들이 속속 떠오른다. 손가락의 두께나 연주자의 체중이 음색을 달리할 수 있다는 것, 페달 사용을 통해 연주자의 취향과 실력을 알 수 있다는 것. 알던 이야기들도 손열음의 글에서 확인하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즐거움이 크다. 진지하게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무겁지 않게, 읽는 이를 납득하게 하는 설득력. 글을 참 잘 쓴다. 2장은 작곡가들, 3장은 이 시대 음악가들, 3장은 손열음의 취향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손열음은 천재일까? 한예종 전 총장의 호들갑스러운 칭찬이나 모 기업 전 회장의 아낌없는 후원을 보면, 그리고 그이의 우수한 콩쿠르 성적을 보면 그런 것 같다. 한예종의 지원 아래 ‘한국에서’ 공부하고 ‘세계에서’ 통했다는 음악계의 자부심은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외국에서 공부한 교수에게 수학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대체로) 유학을 가는데- 콩쿠르에 통한다는 시스템적 자부심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늘도 깊이 있는 해석, 혼을 담은 연주를 위해 영혼을 제련할 그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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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6-10-07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읽고 싶네요~~!! ^^

에이바 2016-10-07 15:45   좋아요 0 | URL
이 책은 1장이 참 좋아요. 손열음이 글을 참 잘 쓰더라고요.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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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르지 쾨베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세 소년으로 아직 어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없다. 아빠가 노동수용소로 떠날 때쯤 유대인들의 처우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빵 배급표를 받고, 허락 없이 도시 경계를 넘지 못하고 저녁이 되면 통금, 창문도 가려야 한다. 사람들의 눈초리에 증오와 경멸이 스민다. 수용소에서 일하기에 어린 아이들도 노동에 동원되고 죄르지도 정유회사에서 일한다. 어느 날, 출근하는데 경찰관이 버스를 세우더니 유대인들을 내리게 한다. 몇 대의 버스를 세워 같은 일이 반복되고 해가 떨어질 때쯤 행진을 시킨다. 도착한 곳 연병장에서 독일군을 봤다. 독일로 노동이주를 할 사람을 찾습니다. 어차피 가게 될 거지만 미리 가면 좋은 대우를 받아요. 젊고, 진취적인 독신들 신청하세요. 사람들은 기차에 실려 이동한다. 그들을 감시하던 헝가리 경찰이 금붙이를 요구한다. 독일놈들 주느니 동포에게 주는 게 낫잖소! 더러운 유대인들! 물이 부족하다. 옆 칸의 노파가 죽었다.

도착한 곳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죄수복을 입은 이들이 왔다. 여러 언어가 동시에 들린다. 뜨문뜨문 독일어로 묻는다. 지쳐도 안 돼. 병들어도 안 돼. 쌍둥이 안 돼. 난쟁이 안 돼. 어린이 안 돼. 너 몇 살? 죄르지가 답한다. 열네 살. 아니 열여섯 살. 네? 열여섯 살. 몇 번 다짐한 그가 사라지고 우르르 밀려 의사 앞에 선다. 의사가 묻는다. 몇 살이지? 열여섯이요. 짧게 보고 사람들을 분류하는 의사의 잔인한 미소. 도살장 같다. 죄르지는 자신이 건강한 그룹이라는데 약간 우월감을 느낀다. 건강한 사람을 골라내는 거라면 나도 할 만 하겠어. 어차피 일을 할 거라면 말이야. ‘식수 아님’이란 푯말이 적힌 곳에서 물을 마신다. 화학약품 맛이 많이 났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독일군은 제지하지 않았다. 목욕 전 안내사항입니다.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니 귀중품을 맡기세요.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금붙이를 내놓는다. 죄르지는 그들을 돕는 죄수들에 위화감을 느낀다.

모든 체모를 밀렸다. 목욕 후 허름한 죄수복과 신발, 모자를 받았다. 건너편 여자들도 민머리가 되었다. 혼란스러우나 수프를 먹을 수 있다고 들어 기뻤다. 말린 쐐기풀수프라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어 쏟아 버렸다. 연기냄새가 이상하다. 가죽공장인 줄 알았는데 실은 화장터란다. 수용소에서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 때문이라 한다. 잠자리는 가구도 전등도 없는 창고 시멘트 바닥이다. 화장실은 하루에 두 번 간다. 아침은 춥고 낮은 찐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배고픔이었다. 사흘째 저녁, 부헨발트로 이동했다. 동물원도 있고 시설이 크고 건물이 멋지다. 군인들이 빠르고 정확하다. 문득 헝가리경찰이 떠오른다. 저들은 본질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일까?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게 맞을까. 64921, 번호를 받았다. 음식과 잠자리는 아우슈비츠보다 조금 낫다. 목욕탕과 화장터가 있다. 시골수용소인 차이츠로 이송되었다. 목욕탕, 화장터 둘 다 없다. 처음으로 구타당했다. 헝가리 사람 번디 치트롬을 만났다.

살아남으려면 자포자기 하지마라. 잘 씻어라. 아껴서 나눠먹어라. 번디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하나 더, 고집이 필요하다. 기억, 희망, 즐거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자존심, 존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대인 무리로부터 배척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처음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이 경험들이 나를 근본적으로 흔들지는 못했다.” 배급이 줄었다. 기력이 쇠한다. 외모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정도 유한하고 생존법칙이 모든 걸 결정”함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 흔들”리는데 고작 석 달이었다. 육신이 급격히 늙고 망가지니 정신도 무기력하고 예민해졌다. 무릎 통증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 병들고 더러운 몸에 경멸적 시선이 떨어진다. 소년은 원래 자신이 이렇지 않았음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누가 믿을까. 무마취 수술. 부헨발트로 옮겨진다는 말에, 쐐기풀수프를 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기쁨을 느낀다.

크고 깨끗한 나치친위대 건물에서 치료를 받는다. 번호가 짧고(수형기간이 김) 붉은 삼각형(정치범)을 단 사람들이 많다. 육년째 수감중이라는 의사가 나이와 이곳에 온 이유―어떤 죄를 지었니―를 묻는다. 인종이 달라서요. 엄마 아빠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요.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수감자들의 레지스탕스, 미군의 진입으로 부헨발트는 해방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 어느 기차역. 사람들이 떠나고 한 남자가 다가와 묻는다. 가스실을 본 적 있습니까. 봤으면 여기 없겠지요. 그는 잠시 생각한다. 가스실이 있었다는 걸 확인한 게 아니라 들어 알고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만족해 돌아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전차를 탔다. 돈이 없다. 표가 없으면 내리라는 말에 한 남자가 부끄럽지 않으냐 일갈한다. 신문기자라던 남자는 같이 연재기사를 쓰자고 한다. 새엄마는 가게 직원이던 쉬퇴 씨와 재혼했다. 동네 노인들을 만났다. "전적으로 그것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갔다"는 소년의 말에 화를 낸다. 우린 가해자가 아니야, 피해자라고. 우리도 힘들었어.

인간을 인간답게 머무르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절멸수용소를 다른 극한 상황과 비교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이 재현불가능한 비극 앞에 로빈슨 크루소 류 재난소설은 픽션일 뿐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가 자행되는 곳에서 이전의 세계―안락하고 온유하던 원래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죄르지는 분노를 느낀다. 낯설고 고된 노동도 할 만 했다. 그래서 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조금씩 몸이 상하고 삐걱거리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도 나는 나답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혼을 담은 그릇이 깨지는데 혼이 어찌 견딜까. 수용소를 뒤덮은 무기력과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길이 없던 소년은 그냥 아프지 않게 죽고 싶었을 뿐이었다. 돌아온 부다페스트는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생활을 지속하고 있고 늙어버린 노인의 눈을 한, 절뚝이는 걸음마다 뼈가 달그락거리는 소년만이 텅 빈 눈 아래 분노를 느낀다. 분노를 태울 연료도 없이.

소년은 생각한다. 침묵하고 동조한 것도 잘못이다. 아니, 사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과 학대가 잘못이다. 수용소로 가기 이전에 이미 무언가가 유대인을 다른 부류로 만들어놓았고 서서히 자라난 증오가 범죄를 묵인했다.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조차 없던 소년은 이디시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수용소 내에서 따돌림 받고 그제서야 자신이 유대인 같다고 느낀다. 유대인이라는 게 그런 식으로 쓰이는 용어라면 말이다. 귀향길에 들렀던 기차역에 있던 사람. 그는 가스실의 존재를 묻는다.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유대인들을 데려갔지만 설마 그런 방식으로 학살했겠어, 나치들이 문제지 나는 그 죽음에 책임이 없어. 누가 봐도 수용소에서 나온 행색의 소년에게 전차 삯을 치르라하자 부조리하다며 일갈한 신문기자는 진실을 알리고 역사에 이바지하자며 소년을 꾄다.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특종을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이 지옥이라고 명명한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년의 악몽을 들쑤시면서.

소년의 분노는 독일을 향해 있지 않으며, 수용소의 삶을 지옥으로만 묘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질서정연한 독일 군인에 대한 칭찬과 감탄이 자리하며 자신의 경험을 제3자인 마냥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타인의 아픔엔 공감하나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쉽게 피로해한다.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픔 역시 토로한다. 나도 힘들었어, 우리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지. 그리고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종국엔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외면하는 것이다. 증인들은 화장터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 목소리는 사라질테고, 그 일들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그렇게 나치의 행위를 묵인했다는 죄책감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진다. 집단적인 망각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기억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망각의 시대에 모두가 불편해하는 일들을 자꾸 끄집어내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비극을 미학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발화 순간 왜곡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면, 어떤 방식이든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증인들은 수용소에서 사라졌으며, 시간과 삶의 흐름으로 인한 남은 증인들의 기억―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기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쇼아》를 비롯하여 홀로코스트를 전달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문학, 애니메이션, 영화, 다큐멘터리, 수많은 목소리들……. 비극을 미학화하여 소비하는 방식이 윤리적으로 옳지않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증언을 남겨야 한다. 비단 나치 홀로코스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폭력과 피해에 대해서, 공적인 기록은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많은 증언들이 확보될수록,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방향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를 지우려는 시도들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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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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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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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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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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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자와 리카가 횡령을 시작한 것은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사는데 현금이 모자랐고, 인출기에 다녀오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마침 고객에게서 부탁받은 돈이 있어 얼마를 꺼내 값을 치른 뒤, 금액을 채워 놓았다. 그렇게 빌려 쓰고 채우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은 금방이었고, 익숙함이 불편함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얼마 걸리지 않았다. 리카는 은퇴한 고객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단정한 외모와 다정함 덕에 실적이 높았다. 그래서 횡령할 수 있는 금액이 컸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작은 고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남편과 소원했던 리카는 고타의 관심에 행복했다. 띠동갑 차이가 나는 대학생, 젊음이 주는 싱그러움과 애정 어린 손길은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리카는 자신의 저축과 고객의 예금을 허물어 고타의 빚을 갚아준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돈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을 가꾸는데도 쓰였고 고타와 시간을 보낼 호텔의 스위트룸과 고타의 외국 여행 경비, 급전이 필요한 친구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가족에게도 돌아갔다. 처음엔 갚을 생각이었지만 씀씀이가 커지자 횡령액수가 늘어났고 나중엔 돌려 막는데 급급해진다.


태국으로 도피한 리카는 강가에 서서 생각한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만약’들은 말 그대로 시행되지 않은 가능성들이기에 부질없다.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자, 들키면 도망쳐서 또 새로운 삶을 살면 돼, 이러한 도덕과 현실의식의 부재는 아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쇼핑, 아니 충동적인 소비가 주는 자극에 중독되었다. 상황의 비윤리성은 차치하고, 무형의 돈을 유형의 상품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의미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손쉬운 대출제도로 인해 더 악화된다.


한편, 리카의 동창 유코는 고통스러울 만큼 절약하는 모습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딸 지카게는 도둑질을 하게 되고, 아이를 야단치는데 남편이 얘기한다. 이제는 조금 써도 되지 않을까, 너무 절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키는 대출을 받아 딸이 갖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사주는데,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코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절약했지만, 아이의 태도에서 자신이 잘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격한 절약과 무절제한 소비 둘 다 좋은 답이 아니었다.


리카를 사회로 내보내고, 그녀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 하던 마사후미는 출장에서 돌아와 말한다. 이제는 아이를 가져 보는 게 어때, 그리고 가끔 사치하며 해외여행도 가고 그렇게 살아 보자. 진작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계획이 있었다면 왜 말하지 않았던 걸까. 고가의 선물, 생활비 등 모든 것을 고타에게 주었지만 정작 그녀가 원했던 관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사후미는 리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해주었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 리카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책임을 질 것인가, 자유로워질 것인가.


리카의 횡령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이상한 정의감’은 이 행위에 묘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애인과 제대로 사랑하던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할 비용을 마련해 두던지…. 평범했던 이가 어마어마한 횡령사건을 벌인 것 자체가 비일상적이지만,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드러낸다. 눈 닿는 곳 모두가 돈이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그런 욕망이 허상으로 둔갑하는 순간, 현실은 깨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를 현실에 붙들어둘까. 여러모로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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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0-0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결말이 좀 별로인가봐요? 저는 에이바님의 리뷰를 읽고보니 이 책이 너무 읽고싶어지는 데 말이죠!! 읽고 싶은데 에이바님의 별 셋 리뷰라니..음... 그래도 읽어보기 위해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에이바 2016-10-05 11:57   좋아요 0 | URL
결말은 괜찮아요. 요즘 저는 예전이라면 별 넷을 주었을 책들에 별 셋을 주고 있어요. 별 다섯을 아끼려고요ㅎㅎ 90년대 일본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괜찮은 소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