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을유세계문학전집 8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서경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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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들처럼 비극적인 연인은 옛 전설이나 신화, 중세 로맨스에도 등장한다. (피라보스와 티스베, 트리스탄과 이졸데, 트로일로스와 크리세이드 등) 15∼16세기 유럽에서는 원수 집안에서 태어난 두 연인을 소재로 한 노벨라가 유행했다. 루이지 다 포르토의 1530년 작품, 『로메오와 줄리에타』의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은 셰익스피어 작품과 유사하다. 여기에 살을 붙이고, 번역되고 다시 변형된 아서 브룩의 『로메우스와 줄리엣의 비극적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장 중요한 출전으로 간주된다.


앞선 작품들을 자유롭게 참조하고 차용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필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학자들은 문체상 특징과 표현, 주제적 측면의 연관성을 들어 『한 여름 밤의 꿈』, 『리처드 2세』와 비슷한 시기인 1595년 혹은 그 전후 집필되었으리라 본다. 이 ‘불운한 별자리 얽힌 한 쌍 연인(a pair of star-cross'd lovers)’의 비극적 결말은 낭만적 사랑의 신화로 자리 잡았다. 유명세에도 불구, 『로미오와 줄리엣』이 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포함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극의 주인공들이 운명의 ‘행위자’가 아니라 ‘희생자’로 그려져 성격 비극의 공식에 못 미치기 때문이었다.


해설자가 등장하여 극의 내용을 소개하자마자 펼쳐지는 베로나 길거리의 싸움은 저속하기 그지없다. 몬터규와 캐풀렛 집안의 하인들과 주인들이 한데 섞여 칼을 휘두르는 이 엉망진창의 도시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름’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줄리엣  오, 로미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


이름에 뭐가 들어 있단 거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그 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똑같이 향기로울 거예요. (…)


로미오, 당신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당신의 어떤 부분과도 상관없는 당신 이름 대신

저를 송두리째 가져가세요. (2막 2장_55쪽)


‘이름’만큼이나 가식적인 것은 극 초반에 등장하는 사랑이다. 로미오가 빠져 있던 로절라인에 대한 감정은 실체 없는 사랑이다. 페트라르카가 쓴 연가에서 라우라를 갈망하며 사랑의 고통을 겪듯이, 로절라인을 갈망하는 로미오의 연가는 소네트로 표현된다. 사랑도 관습적이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 대화도 소네트로 이루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로절라인과 줄리엣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두 연인의 조력자이자, 로미오가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넋을 잃는다’고 꾸짖었던 로런스 신부와 로미오의 대화이다.


로미오  제가 지금 사랑하는 그녀는

정에는 정으로, 사랑에는 사랑으로 보답해 주는 여인이랍니다.

이전의 여인은 그렇지 않았어요.


로런스  아, 그 여인은 잘 알고 있었지.

자네의 사랑은 철자를 쓸 줄도 모르면서 외워서 읽는 식이었다는 것을. (2막 3장_68쪽)


열네 살이 채 되지 않은 줄리엣과, 그보다 서너 살 많을 로미오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열정적이다. 미성숙한 십대이기에 감정에 휩쓸린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감정 자체에 집중할 수 있고, 더욱 순수할 수 있구나 싶다. 사랑하며 성숙해지는 두 연인의 성장이 기껍고, 끝을 알면서도 응원하게 된다. 사랑에 설레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않는 진솔함으로 로미오에게 사랑이란 주고받는 것임을 알려주는 줄리엣. 그녀가 사랑을 위해 두 번의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를 볼 때, 그 숭고한 감정을 어떻게 십대의 치기로 치부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들이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4∼5일이다. 짧은 기간 동안 놀랍도록 타오르는 이 사랑에, 로런스 신부는 ‘격렬한 기쁨엔 격렬한 종말이 있게 마련’이라 예견한다. 처음부터 암시되는 이 죽음은 두 집안의 화해를 낳으며 사랑을 인정받는다. 베로나 영주는 두 집안 간 증오 때문에 두 연인이 죽었다고 결론내리며,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으로 완성되고 증명된, 순수한 사랑이기에, 그 신화가 더 공고해졌으리라.


『로미오와 줄리엣』이 씌어진 시기 영국 사회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관념을 변화시켰다. 때문에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을 긍정적으로, 그 사랑의 완성인 결혼을 찬미하는 낭만적 희극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캐풀렛의 가부장적 태도이다. 베로나의 기성세대의 반목이 그 자녀들에 초래하는 비극적 결과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동안 벌어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도 간 분쟁을 떠올리게 한다. 서른 살 셰익스피어는 이 또한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참고: 스탠리 웰스 공저, 『셰익스피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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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19: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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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2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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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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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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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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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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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3 0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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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3 0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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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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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14: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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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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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베니스의 상인』은 소설 형식으로 된 글이었고 그것이 셰익스피어와의 첫 만남이었다. 기억 속의 앤토니오는 선량하며 샤일록의 악독함은 그를 돋보이게 했다. 포오셔는 현명하고 멋졌다. 하지만 희곡을 읽으니 기억 속 이미지가 깨어진다. 앤토니오와 그 친구는 반유대주의자로, 기독교인이지만 그 교리에 따른 베품은 유대인을 비껴간다. 늙은 샤일록은 유대인이며 고리대금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조롱과 모욕을 받는데, 읽다 보면 그가 불쌍하고 복수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앤토니오가 친구 바싸니오를 위해 신체포기각서를 작성하여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고, 포오셔가 남장하여 판결을 내리고 하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니 생략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관계에 있어 샤일록이 진짜 악인이냐 하는 것이다. 사회구조상 고리대금업이 미치는 영향은 차치하고, 개인으로서 샤일록은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다. 또 법을 잘 지키는 시민이기도 한데 이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받는 페널티 때문이다. 방식이야 어찌됐든 샤일록은 경멸을 감추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나름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인다.

샤일록의 발언들은 한스럽기 그지없다. 고리대금업자나 상인이나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건 같은데, 샤일록과 앤토니오가 다를 바 무엇이 있냐는 것이다. 평소 샤일록을 보며 경멸을 감추지 않은 앤토니오의 만행을 보자. 사업을 방해하며 개라고 부르고, 침을 뱉고 발로 걷어차기 일쑤였다. 이제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돈을 빌려달란다. ‘평소라면 너에겐 돈을 빌리지 않았겠지만’ 이라며 목을 뻣뻣이 세우고서 말이다. 상선이 난파됐다는 소식에, 앤토니오 친구들은 샤일록에게 진정 살 1파운드를 취할 것이냐 묻는다.

이에 샤일록은 분통을 터뜨린다. 왜 못할 것이냐.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미움을 받고 상거래를 방해하고 민족을 싸잡아 경멸한다. 유대인도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밥 먹고 다치면 피가 나고 병에 걸리면 치료한다. 앤토니오도 동의한 차용증서를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며, 이제껏 당한 것을 갚는 것인데 왜 복수를 하면 안 되는가? 유대인이 기독교인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들이 가만있겠는가? 복수하지 않겠는가? 시종일관 그를 대하는 앤토니오 무리들의 태도와 재판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 그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재판정에서 대공도, 법학박사로 꾸민 포오셔도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강요한다.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덕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옳은 일이니 따라야 한다는 설교 앞에 샤일록의 울분은 무시당한다. 법대로 하자니 그 유명한 ‘피 한 방울 흘리지 말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냥 빚을 갚으랬더니, 이젠 시민의 목숨을 앗으려는 불순한 의도 때문에 재산도 몰수당한다. 대공은 ‘자비’를 베풀어 목숨은 살려준다고 한다. 샤일록은 그냥 다 취하라며 망연자실하고 이에 그라쉬아노는 재산이 없어 끈을 살 돈도 없으니 국비로 목 맬 끈을 하나 주자고 조롱한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발언인가.

앤토니오와 바싸니오, 포오셔의 관계도 생각해봄 직하다. 일단 바싸니오에 대한 앤토니오의 감정은 진한 우정을 넘어섰다. 누가 사치로 빚더미에 앉은 친구를 위해 사채를 써 돈을 마련해주겠는가. 그것도 바다 건너 상속녀한테 청혼하러 가는 뱃삯과 예물을 준비하기 위한 비용이다. 친구의 생명을 저당잡히고 바싸니오는 벨몬트에 도착해 시험을 치른다. 세 상자 중 옳은 상자를 골라 포오셔를 얻는다. 베니스로 친구를 구하러 가는 남편에게 포오샤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신실을 상징하는 반지를 준다. 바싸니오는 절대 빼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이 대목이 재밌다. 앤토니오는 빚을 갚지 못해 재판이 열린다며 ‘너를 한 번만 더 봤으면 좋겠어. 나를 사랑한다면 와 줘, 그렇지 않다면 안 와도 돼.’라는 편지를 보낸다. 너그러운 포오셔는 앤토니오의 빚을 두 배, 세 배로 갚고 구하라고 한다. 바싸니오는 아내의 돈을 들고 베니스로 가고, 우유부단한 남편을 믿지 못한 포오셔는 시녀 니리서를 데리고 그를 뒤따른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내 생명도 아내도 이 세상도 앤토니오 너에 비할 순 없지!’라는 바싸니오에게 일침을 가하는 포오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바싸니오의 성급함과 포오셔가 비교된다….

친구를 살려줘 감사의 인사를 하고싶다는 바싸니오에게 아내의 반지가 갖고 싶다는 (남장한) 포오셔. 바싸니오는 이는 소중한 반지라며 거절한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앤토니오는 자신의 목숨값과 공로가 포오셔의 명령에 비견하지 않냐며 반지를 줘 버리라 한다. 그랬더니 바싸니오는 또 반지를 얼른 갖다 준다. 이거 완전 질투 아닌가? 이후 삼자대면에서 포오셔는 그 반지를 앤토니오 손으로 남편에게 건네게끔 한다. 무서운 사람들…. 찌질하고 우유부단하고 씀씀이도 마음가짐도 헤픈 바싸니오가 왜 좋을까? 잘생겼나? 애는 착한 것 같더만….

내 생각에 앤토니오는 게이가 맞고, 바싸니오도 약간 그런 구석이 있다. 이 번역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서 읽은 기억에, 바싸니오가 남장한 포오셔에게 추근대는 느낌이란다. 그렇다면 비슷한 선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내노라하는 스펙의 남자들이 무서운 조건(옳은 상자를 고르지 못하면 살아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청혼하지 말 것)에 동의하고 얻으려는 아름답고 현명하다는, 돈까지 많은 포오셔. 그녀가 모두를 제치고 바싸니오를 선택한 것은(비록 그 과정은 정반대이지만) 자신이 남편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미덥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출간된 이후 반유대주의를 공고히 하고, 나치에게도 이용되었던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사상과 작품 이해에 있어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어찌 되었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말로는 인간적으로 안 됐다. 딸도 자신을 배신하고, 법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빈털터리가 된 늙은이는 개종까지 해야 한다. 남은 자산은 아비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기독교인과 사는 타지에 있는 딸에게 갈 것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주인공 앤토니오의 고결한 우정과 덕을 기리지만 샤일록의 거대한 존재감에 가린다. 샤일록이 극에서 고작 다섯 장면에만 출연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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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토니오 게이설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샤일록이 워낙 유명한 캐릭터라서 앤토니오를 진지하게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에이바 2016-09-05 21:46   좋아요 0 | URL
희곡으로 보니까 우정을 넘어선 그냥 사랑이더라고요. ㅋㅋㅋ
 
햄릿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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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원전은 덴마크 사학자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덴마크 역사책』 불역판인 벨포레의 『비극 이야기들』로 여겨진다. 1600∼1601년 집필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이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 중에 가장 유명하며, 가장 많이 회자되고 연구되는 작품이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극본을 읽어보지 않은 이도 들어봤을, 유명한 대사가 있지 않은가. 여기서 죽는 것은 햄릿인가 아니면 복수의 대상인 클로디어스인가. 문맥을 보아 햄릿의 자살에 좀 더 타당성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릿광대와의 대화에서 추정할 수 있는 햄릿 왕자의 나이는 서른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아버지, 햄릿 왕의 장례식에 왔더니 어머니 거트루드가 재혼을 한단다. 상대는 왕위를 이어받은 숙부 클로디어스다. 장례식 음식이 결혼식 음식으로 탈바꿈되는 상황, 용맹하고 존경받던 햄릿 왕을 애도하는 이는 왕자 뿐이다. 신하들은 숙부에 아첨하기 바쁘고, 클로디어스는 형의 사망이 슬프지도 않은지 연회가 계속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 어머니와 왕궁 사람들, 숙부를 싫어하던 이들이 자연스레 초상화를 사는 모습은 어이가 없다.


근친상간적인 이 결합 앞에 절망한 왕자는 자살을 생각한다. 신이 자살을 금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아들 속도 모르고 어머니는 대학에 돌아가지 말고 궁에 남으란다. 숙부는 왕위계승자는 너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참된 친구 호레이쇼만이 이 고통을 알아주는데, 밤에 선왕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다. 노르웨이를 무찔렀던 그 갑옷을 입고서. 왕자에게만 들리는 유령의 말인즉, 클로디어스가 형수 거트루드를 차지하기 위해 형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거트루드와의 간통은 남편이 죽기 전부터 이어져온 것이란다!


유령은 왕자에게 아비의 복수를 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 햄릿 왕자는 고통스럽다. 유령의 말이 사실인가? 그가 악령일 수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죽음에 어머니도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의 계략으로 덴마크 왕이 숨진 것이 사실이라면, ‘숙질 이상의 인척관계가 되었지만 부자지간은 될 수 없는’ 클로디어스를 언제,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 왕자는 클로디어스가 자신을 경계하지 않도록 미친 척 하며, 연극을 이용하여 클로디어스의 의중을 떠보기로 마음먹는다. 호레이쇼와 함께, 그는 유령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햄릿은 복수를 자꾸 미루고, 이 우유부단함은 레어티즈와 포틴브래스와 비교된다.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죽자 레어티즈는 프랑스에서 돌아와 복수를 다짐하는데, 부친 살해자를 교회에서도 죽일 수 있다는 각오를 보인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어쩌면 정당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노르웨이 왕의 복수를 위해 포틴브래스는 군사를 모은다. 포틴브래스의 이런 행동력은 이후 폴란드의 작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행군하는 모습으로, 행위의 ‘정당한’ 사유가 있음에도 복수를 미루던 햄릿을 깨우친다.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왕자는 사색하는 인물이며, 어머니의 부정과 클로디어스로 상징되는 덴마크의 부패로 인해 염세에 빠진다. 깊은 우울증을 앓는 그는 클로디어스의 악덕을 확인한 후, 복수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긴 독백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햄릿  (…) 내적 반성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이리하여 결심의 본색은

우울이라는 창백한 색으로 덮여서

지고의 중요한 거사들은

이로 인해 노선이 바뀌고,

실행의 이름조차 잃게 된다. (3막 1장, 101쪽)


햄릿 왕자의 신중함과 분별력은 분노에 찬 와중에도 착실히 기능하고 있고, 여기에 우울증이 더해지니 결정의 순간을 미루게 되는 것이다. 복수의 방식과 때 또한 문제가 된다. 클로디어스가 홀로 기도할 때, 햄릿은 그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죽은 방식으로 죄의 공과를 더하기 위해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겠단다. 그러나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광증에서 석연찮음을 느끼고, 그를 영국으로 보내 처리하게됨으로써 이 결정은 저지된다. 놀랍도록 적절한 ‘해적’의 개입으로 돌아온 햄릿은 이제 복수를 신의 섭리에 맡기려 한다.


우유부단함, 이 결점은 햄릿 자신을 포함하여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레어티즈, 로즌크랜츠, 길던스턴,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의 죽음을 불러온다. ‘고결한 심성’을 지닌 햄릿이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만, 본인 역시 살아남지 못하기에 이 극은 더욱 비통해진다. 이는 햄릿이 앞서 말했던 ‘타고난 성격적 결함- 그 작은 악덕이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도 큰 불명예를 입게 한다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왕자는 자결하려는 호레이쇼에게 그 ‘천복(天福)’을 미루고 세인들에게 이 비극을 알려줄 것을 부탁한다.


햄릿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것이 더 숭고한 정신인가.

변덕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허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많은 고난에 대항하여

물리치는 것일까. (3막 1장, 100쪽)


그는 변덕스러운 운명을 견디기로 했고, 복수를 미루었으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등장인물들의 계획들은 성공하지 못하며 결국 그들을 극에서 퇴장하게 한다.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그가 고매한 지성인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 효에서 비롯된 복수심, 숙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 죽는 것이 천복이며, 어차피 끝이 오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일찍 떠나는 것이 무에 아쉽겠는가 묻는 햄릿의 운명은 복잡한 그의 인물됨만큼이나 비극적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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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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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오브 로마〉 3부, 《포르투나의 선택》은 젊은 폼페이우스를 깨우는 등불로부터 시작된다. 촌놈, 사팔뜨기 도살자 스트라보의 아들인 젊은 폼페이우스는 다소 경박하지만 순수한 열망을 지닌 인물이다. 스스로를 위대한 마그누스라고 부르는 그는 전작에서 아버지를 가슴 깊이 존경하지만 부족한 지략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보여준 의리(안타깝게도 3부 1권에서 키케로는 이름으로만 등장한다)를 통해 다가올 활약을 예상할 수 있었다. ‘로마의 일인자’가 시작되는 기원전 110년 기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1세대로 한다면 3부는 2세대가 장년층을 이루며 3세대들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깊은 병을 얻어 예전 같지 않다.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신 포도주는 그를 주정뱅이로, 참지 못해 긁은 피부는 얼룩덜룩하며 자제하지 못해 찌운 살이 병마로 인해 내리면서 급격하게 늙어버렸다. 가지런한 치아는 물론이고 탐스럽던 머리칼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콜린 매컬로가 그린 장년의 술라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늙은이 그 자체다. 그럼에도 그가 지닌 특유의 야수성을 담은 눈빛은 여전하다. 집정관 카르보를 비롯하여 로마에 남은 이들은 그의 귀환을 두려워하며, 라티움의 삼니움 족을 비롯하여 여러 세력들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뭉친다. 젊은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의 피호민들, 퇴역군인들을 모아 술라 세력에 가담한다.

술라의 사위 마메르쿠스, 새끼 똥돼지 메텔루스 피우스, 루쿨루스 등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젊은 폼페이우스는 치기어림을 감추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술라의 흥미를 끈다. 술라와 함께 게르만족 행세를 했던 세르토리우스. 그는 마리우스를 배신한 술라를 용서하지 않았으나 그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무능한 지휘관을 등진다. 로마에서는 마리우스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을 동원하여 마리우스 2세를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아우렐리아는 그를 말리며 술라를 꿰뚫어보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모든 것은 술라에게 있어 하나의 연극이니, 네가 집정관이 된다면 하나의 징조가 되고 그로 인해 술라가 만들어낼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어리석은 마리우스 2세는 자신의 능력을 적시하지 못하고 로마에 남은 의원들은 물론 자신도 죽게 만든다. 이는 술라에 반대하는 세력의 몰락을 가져왔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고귀하게 태어났으나 고귀함을 유지할 그 무엇도 소유하지 못했던 그는 58년만에 로마의 주인이 되었다. 값싼 가발, 초라한 발걸음. 홀로 걷는 술라를 조롱했던 로마는 곧 그가 가진 권력, 로마의 독재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술라가 통치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름다웠던 도시, 숙녀 로마를 이 꼴로 만든 이들을 용서치 않겠다. 술라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젊은 폼페이우스는 말한다. ‘존엄’. 코르넬리우스 일족으로서, 파트리키로서 술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말이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예언을 저지하기 위해, 신관의 아펙스로 묶어버린 운명의 아이 카이사르. 수부라와 에스퀼리누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매혹적인 아이. 마리우스의 족쇄 부르군두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유피테르 대신관이지만 동시에 데쿠미우스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그 인물을 자유롭게 한 것은 놀랍게도 술라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어린 카이사르를 억압했기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그를 자유롭게 한 것이다. 이제 그는 쇠붙이를 몸에 대면 안 되는 제약에서 벗어나, 쇠붙이가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전장으로 향한다. 술라는 아이에게서 마리우스를 느끼노라 하지만, 자신의 야수성을 발견한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가 선택한 진정한 펠릭스는 누가 될 것인가. 다가올 로마의 마지막 황금기를 더욱 기대한다.

-잔혹한 세르빌리아(리비아 드루사의 딸), 루키우스 무틸루스의 아내 바스티아, 애정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달마티카, 술라를 제대로 판단하는 아우렐리아의 출연은 반갑고도 즐거운 장면들이었다.

-아우렐리아가 연기하는 연극은 무언가를 이룩하면 술라가 느끼고 하는 허전함을 채워주는데, 초반에 등장했던 메트로비오스가 상징하는 술라의 욕망, 그들이 벌였던 향락을 연상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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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8-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의 1권이군요~~~
제가.... 1권 2부를 읽을때만 해도 꽃같던 술라가 주정뱅이에... 급격히 늙어버렸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부지런한 에이바님 덕분에 저는 포르투나 1권의 내용을 읽고 갑니다.
더운 여름인데ㅠㅠ 건강 조심하시구요^^

에이바 2016-08-12 10:20   좋아요 0 | URL
저도 완전 충격이었어요 ㅠㅠ 살아있는 조각, 로마 최고 공인된 미남 술라가 아니었던가요... 역시 자외선은 노화의 적입니당 ㅋㅋㅋㅋ 단발머리님도 여름 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올 여름은 너무 하네요...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
션 매커보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작은사람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영국문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할라치면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400년 전의 사람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왜 셰익스피어인가? 이 물음에 션 매커보이는 이렇게 답한다.


셰익스피어는 영국문학, 나아가 영어권 문화의 중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영국의 문학과 사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의 희곡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해는 그의 희곡들과 그 속의 언어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며, 영어권 문화에 해당하는 전반적인 사상, 가치, 이야기 등을 아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물론 셰익스피어가 이런 사상과 이야기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탁월한 그릇이다. (17)


셰익스피어는 근대 세계의 권력 및 권위 구조가 형성되던 시기에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이 당시 사회의 가치를 담고 있음에도 여전히 현대적 관심사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은 ‘그 희곡이 동화와 전통적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을 채택하여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오래되고 매력적인 이야기의 효과를 심화하기 때문이다.(캐서린 벨시)’ 그 가치를 안다 해도 희곡 읽기는 쉽지 않다. 매커보이의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 1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배경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희곡의 각 장르(비극, 코미디, 사극, 로맨스)에 따라 비평을 소개하고 그 장르의 희곡을 읽는 방식을 알려준다.


작품 읽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오는 관객을 위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기에 현대인보다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더 발달되어 있었고, 길고 복잡한 문장도 별 무리 없이 파악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읽히는 글’은 다양한 기호와 상징을 포함하며 점점 간결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셰익스피어의 문장은 어렵게 느껴진다. 언어를 통한 특정한 효과를 위해 어려운 언어가 구사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보자.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에서 휘하 장군들을 향한 아가멤논의 연설에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어휘가 등장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의 어리석음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희곡은 운문으로 쓰였고 또 운문을 중시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산문(폭넓게 말해 시로 쓰지 않은 모든 문장)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산문은 운문보다 지위가 낮다. ‘상급자’인 진지한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운문으로 말하며, 여성과 노동자 계급은 주로 산문을 사용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작부분에서 하인들 사이의 모욕과 싸움은 산문으로 진행된다. 귀족이 등장하면서 2행씩 운문으로 진행된다. 산문이 이류언어라는 것은 아니다. 산문은 대중적인 감응과 관객들과의 접촉을 이끌어내는 극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대체로 무운시blank verse로 글을 썼다. 무운시란 각운 없이 5개의 강세 음절을 가진 시행으로 구성된 시를 가리킨다. 고전적 명칭은 약강오보격, 달리 말해 영시의 표준 시행이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리듬은 ‘디-담-디-담-디-담-디-담-디-담’으로 ‘담’에 강세가 들어간다. 이것을 기본으로 강세의 패턴을 변조함으로써 대사의 효과를 꾀하게 된다. 이런 패턴을 알고 있으면 아무래도 대사의 효과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외에도 문장과 시행을 적절히 상호작용 시키거나, 각운을 통해 장면의 끝이나 극 전체의 극을 알리기도 하고 분위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수사학이 문학적 글쓰기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수사적 효과는 형태와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형태의 수사법은 특정 패턴을 만들기 위해 단어를 배열하거나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효과를 꾀한다. 비유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효과를 만들어 내며, 은유와 직유, 아이러니, 과장 등의 친숙한 용어로 구분된다. 근대 초 관객들은 소수의 시각적 기호만 알고 있었다. 그들에 익숙한 기호란 주로 도덕적 묘사 등을 드러내는 엠블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도덕적, 정치적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엠블럼을 이용한 알레고리를 사용했다.


중세적 위계질서, 하느님이 질서의 정점에 있고 아래로 천사, 남자, 여자, 동물, 새, 물고기 등 위계가 정해져 있는 이런 사상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셰익스피어의 비유나 비교가 다소 황당할 수 있다. 과거의 사고방식은 런던의 상인계급의 출현과 사상의 변화라는 새로운 세계관과 뒤섞이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극에 등장하는 정치적 주장들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며, 이 이미지가 반복되는 패턴을 통해 드라마의 핵심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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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7-16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에이바 2016-07-16 08:3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겨울호랑이님. 이 책은 1부가 특히 좋더라고요.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6-07-1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 오지만 행복한 하루 되세요^^ 에이바님

에이바 2016-07-16 08:41   좋아요 1 | URL
네, 겨울호랑이님도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단발머리 2016-07-16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는 그렇게 머리에 안 들어오더니...
에이바님 페이퍼 읽으니 이해가 술술되네요~~~ ^^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2^^

에이바 2016-07-18 08:5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한 번 정리하고 읽으니 좀 낫더라고요... 나중에 젠더 편도 올려볼게요!!

루쉰P 2016-07-1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아 에이바님 영어를 잘 하시나봐요...ㅠ.ㅠ 전 영어 고자라...잉잉 왜이리 영어가 안 느는지 원.
영어 단어 외우는 게 너무 힘들어요...외우다 보면 왜 이걸 외어야 하나 그러고 무슨 암호 기호 같아요 ㅋㅋㅋ
부럽다..에이바님....

에이바 2016-07-18 08:52   좋아요 0 | URL
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가벼운 덕질을 위한 정도요? 역시 덕질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ㅠㅠ 파워오브러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