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역사 - 피아노가 사랑한 음악, 피아노를 사랑한 음악가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임선근 옮김 / 포노(PHONO)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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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뤼셀에서 꼭 들려봐야 할 곳은 악기 박물관이다. 아르누보 양식의 이 건물 계단을 올라 입장료를 지불하고, 짐을 맡기고 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관람객은 헤드폰을 하나씩 받는데 원하는 악기 앞에 서면 연주가 흘러나온다.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하프시코드(쳄발로)를 봤다. 클라비코드와 장식용 기린 피아노도 보았다. 눈이 많이 나린 날이었고, 그날따라 무거웠던 마음을 날려버린 건 하프시코드의 선율이었다. 악기에 그려진 화려한 장식과 음악에 취한 나머지, 건반악기 층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 현악기, 타악기 전시관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아주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부터 피아노는 가구가 되었다. 이사철이 되어야 존재감이 드러나는, 악기가 아닌 가구 말이다. 생각날 때쯤 뚱땅거리는, 조율하지 않아 ‘도’는 만날 소리가 나지 않는 그런 가구. 몇 년 만에 악보를 꺼냈더니 연습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소음들이다. 듣는 귀는 천상계에 있건만, 들리는 소리는 지구 내핵... 조용히 악기를 덮고 책을 폈다. 제목은 『피아노의 역사』이지만 원제를 보면 『피아노의 자연사』 혹은 『피아노 박물지』로 번역할 수 있다. 다 읽고 나니 ‘피아노 박물지’라는 제목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들을 찾아 듣고 생긴 관심으로 클래식 관련 서적을 독파하는 중이다.


책소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은 ‘재즈’에 대한 지분이 상당하다. 저자가 미국인이기도 하지만 음악사에서 이 장르가 끼친 영향이 지대하고, 위대한 연주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첫 번째 피아니스트가 오스카 피터슨이라는 사실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어째서 피터슨인가. 1장의 제목 〈전통의 집대성〉에 어울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피터슨은 정통 클래식 음악을 배웠고, 그 토대 위에 재즈를 받아들여 판테온에 올랐다. 그가 사사한 드 마키는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 스테판 토만을 사사했다. 따지고 보면 피터슨은 리스트의 계보에 있는 셈이다.


(...) 선생님은 또한 피아노 ‘스타일’의 참된 의미는 나만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가르쳐주셨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음전stop', 즉 음질을 변화시키는 기계적 장치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재즈 오르간 연주자들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들이 선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오르간을 대중화한 거장 지미 스미스와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동일한 음전들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정한 자기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은 듣는 이가 연주자를 똑바로 식별해낼 수 있는 소리를 빚어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러므로 오스카 피터슨은 제자들이 자기 연주 방식을, 아니 그 누구의 방식도 따라하게 놔두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빌 에번스와 같은 유형의 코드 보이싱[화음을 이루는 음들을 안배해 연주하는 방식]을 사용하자 선생님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그건 네 것이 아니잖아!” 피아노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터치, 타임, 톤, 테크닉, 테이스트가 그 요소들인데 모두 ‘T’자로 시작하는 단어들이므로 그는 이를 ‘5T'라고 불렀다. 당연히 그는 그 모두를 갖췄다.


-나의 스승 오스카 피터슨, 마이크 롱고, 1장 (24)


책의 전반부에서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발달사를 다룬다.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음악사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가. 롤랑 마뉘엘이 얘기한 '피아노는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현한 악기'라는 설명이 어울린다. 이어지는 내용은 피아노계 최초의 슈퍼스타인 모차르트,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음악가들의 연주 여행이다. 저자는 조금은 망설이면서도 음악가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4원소에 대응하는 '흥분가, 연금술사, 리듬주의자, 선율주의자'인데 조금은 위험한 분류일 수 있다는 우려를 보인다.


'불'에 해당하는 흥분가들에는 베토벤, 로큰롤의 제리 리 루이스, 재즈의 세실 테일러가 있다. '물'에 해당하는 선율주의자들에는 슈베르트, 바흐, 조지 셰어링. '공기'인 연금술사에는 빌 에번스, 드뷔시, 셀로니어스 멍크. '흙(땅)'에는 패츠 도미노, 아르투로 오파릴, 프로코피예프와 같은 리듬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분류에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선율이 심장에 호소한다면 리듬은 심장을 제외한 신체 근육조직 전부에 불을 지른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이 네 요소는 서로 맞물려 있다.'


건반 악기인 피아노를 연주함에 있어 선율을 중시할 것이냐, 타악성을 중시할 것이냐에 따라 작곡가의 스타일이 바뀐다. 다음은 각 장에서 유심히 봤던 음악가이다. '흥분가들'의 베토벤과 리스트,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제리 리 루이스, 얼 하인즈. '연금술사'는 드뷔시에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고 메시앙, 쇤베르크, 스크랴빈을 다룬다. 드뷔시가 초기 재즈 피아노에 끼친 영향도 다루고 재즈의 제왕 듀크 엘링턴도 등장한다.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에 대한 설명도 있다. 글을 쓰다가 깨달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다음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출처 및 크게보기, 만든 이의 설명)


'리듬주의자들'은 전체 장이 재즈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그, 릴, 더블, 탭댄스, 래그타임 이러한 춤꾼들로부터 시작된 음악에서 재즈에 스윙, 살사에 스파이스, 미니멀리즘에 트랜스까지의 계보가 소개된다. 거슈윈이 등장하고, 아트 테이텀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이 장을 읽으면서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흑백 친선 야구시합」이 떠올랐다. 조금 뜬금없지만 그 대목을 소개해본다.


그곳에는 유색인종들만 있었다. 밝은 색조의 붉고 푸른 새틴 드레스를 입고 그물 스타킹을 신고 보드라운 장갑을 끼고 와인색 모자를 쓴 여자들, 번들거리는 턱시도를 입은 남자들. 음악이 쿵쿵거리며 밖으로, 위로, 아래로, 댄스장 위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롱 존슨과 캐버너와 지프 밀러와 피트 브라운, 모두가 케이크워크* 박자에 맞추어 광낸 신발을 신고 크게 웃으며 위아래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를 절뚝이는 빅 포와 그의 애인, 캐서린도. 다른 모든 잔디 깎는 사람과 나룻배꾼과 수위와 가정부가, 다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케이크워크: 미국 남부의 흑인 놀이에서 발달하여 나온 춤. 또는 그런 2박자의 춤곡.

-『레이 브래드버리』(현대문학) , (131)


'선율주의자'에서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멘델스존, 쇼팽이 등장한다. 쇼팽은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다. "신사 여러분, 모자를 벗으시길. 천재의 등장입니다." 피아노 연주 방식을 영원히 바꾼 천재, 오붓한 환경에서 건반 위에서 속삭이는 연주를 하고 에라르보다 플레옐 피아노를 선호했으며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박자 감각... 또 에리크 사티, 모리스 라벨이 언급된다. 11장은 미국을 비롯한 각 나라별 음악의 색깔들, 12장은 러시아 학파에 대한 설명이다. 앙드레 지드가 『쇼팽 노트』에서 언급한 안톤 루빈시테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호로비츠, 라흐마니노프, 리흐테르, 아슈케나지, 프로코피예프 등 익숙한 이름들이다. 12장에서 등장하는 한스 폰 뵐로는 프란츠 리스트의 사위인데 아내가 친구 바그너와 사랑에 빠져 이혼한 연주자이다. 그의 미국 연주회들이 인기가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14장 〈세계로 통하는 길〉은 루빈스타인, 호프만, 코르토 등 폴란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출신 연주자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주요 경연대회(콩쿠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1980년 쇼팽 콩쿠르의 포고렐리치 관련,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쇄신 등 논란거리도 짚고 있다. 15장 〈첨단의 연주자들〉에서는 글렌 굴드를 소개하며, 마지막 장에서는 극동 아시아에 피어오르는 클래식 시장 열기를 소개한다. 야마하가 뵈젠도르퍼를 인수했다는 걸 알았다. 〈첨부 노트〉에는 못 다한 이야기들을 실었는데, 책장을 덮고 나서 드는 생각은 왠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반도 못했을 것 같다는 것이다. 1장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즐겁게 읽었다. 이 또한 공부할 거리를 많이 남기는 책으로, 분량은 시대와 대륙, 연주자별로 고르게 배분되어 있으며 피아노에 대한 저자의 관심과 애정이 느껴진다. 머레이 페라이어(머리 퍼라이아)의 글로 마무리할까 한다.


(...) 이상적으로는 머리로 듣는 소리를 곧바로 손끝으로 옮겨내야 한다. 그러나 소리를 내려면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단지 빠르게 연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의 저음 또는 한 토막의 대위 선율을 빚어내기 위해서이다. 나는 하나의 악구를 연주하려면 예를 들어 호른이나 오보에 소리를 듣고 피아노로 그와 같은 효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인 다음, 그 소리를 피아노로 재창조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소리의 뉘앙스를 더 풍부하게 귀에 담아둘수록, 피아니스트가 이해하고 빚어내야 할 음의 빛깔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더 잘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조급증이 날 수도 있다.


피아노 연주는 정말이지 환상의 예술이다. 색깔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색깔에 대한 환상이라는 편이 낫겠다. 악기가 훌륭할수록 더 많은 가능성이 주어진다.


-피아노 소리 만들기, 머리 퍼라이아, 6장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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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2-16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분량이 꽤 있어서 매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면 읽을까 말까 고민합니다. 사진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이라면 읽어볼 만한데. ㅎㅎㅎ

에이바 2015-12-16 18:2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빌려봤었는데 결국 샀어요. 읽을수록 마음에 드는... ㅋㅋㅋ 재즈 좋아하시면 더 즐겁게 읽으실 것 같아요. 사진도 적잖이 실려 있고요.

cyrus 2015-12-16 18:22   좋아요 0 | URL
클래식 음악보다 재즈 음악의 비중이 더 많은가 보군요. 에이바님이 알려주신 정보, 참고하겠습니다. ^^

에이바 2015-12-16 18:26   좋아요 0 | URL
클래식과 재즈 둘 다 적절한 것 같아요. 저는 클래식 위주를 원해서 그렇게 느낀 것 같기도 한데 재즈가 현대음악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결국 제가 재즈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ㅎㅎ

비로그인 2015-12-16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야겠네요 불끈!
근데 4원소 어쩐지 끄덕끄덕하게 되네요~재밌어요!
에이바님덕분에 또 바로 오스카 피터슨 주간이 돌아왔습니다~^^

에이바 2015-12-16 20:48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처음 들었던 피터슨이 아마 캐롤이었던 것 같아요 ㅎㅎ

AgalmA 2015-12-1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레이 페라이어 인용하신 글에서 ˝이상적으로는 머리로 듣는 소리를 곧바로 손끝으로 옮겨야야 한다˝는 부분은 이성복 시인이 머리가 아니라 언어-감각이 먼저 나가게 해야 한다 말하던 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원리는 참 비슷한데 그 실행이 참 난관~_~;

에이바 2015-12-16 20:51   좋아요 1 | URL
오 역시 예술은 통하는군요... 어떻게 보면 꾸준한 연습에 의한 체득 체화 이런데서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도 같아요 실행은... ^^;;

물고기자리 2015-12-1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뭔가에 꽂히면 공부하듯 집중하는 성향이라ㅋ 에이바님의 독서 스타일이 정말 호감입니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분야가 있다는 것만큼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건 없는 것 같아요ㅎ

에이바 2015-12-17 17:22   좋아요 1 | URL
요즘 약간 시들해졌는데 물고기자리님 댓글보고 힘내야겠습니다 ㅎㅎ 그쵸 덕후 만세! 입니다 ㅎㅎ

서니데이 2015-12-1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부터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 잘 치지 못해도 고가의 악기인데, 피아노를 들여놓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들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서 가구처럼 한 구석에 남는 것도 같습니다. 오래된 피아노와 건반의 소리도 바이올린이 그렇듯 특별한 느낌이 있을지, 에이바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 상상해보았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에이바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밤 되세요.^^


에이바 2015-12-17 20:40   좋아요 1 | URL
그래서 오래된 업라이트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상태와 연주자는 엉망이지만요. ㅎㅎ 서니데이님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요..

단발머리 2015-12-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조율도 안 된 피아노로 쇼팽 왈츠를 한 페이지 치고는, 아.... 몰랑 하고 있었더랬죠.
저는 피아노를 사랑하지만, 연습은 안 한다는...

아는 이름이 별로 없어요.
공부할 게 많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ㅎㅎㅎ

로마 섭렵하시고 이제 클래식으로 가셨나봐요.
너무 멋져요, 에이바님. 진짜 교양인 인증, 알라디너 에이바님^^

에이바 2015-12-18 12:06   좋아요 0 | URL
몇 년 만에 치는지 손꼽아보기도 부끄럽더라고요. ㅎㅎ 일독만 했는데 다른 책들을 보면 겹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재독할 때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클래식은 재밌는데 넘 어렵네요 ㅠㅠ 감사합니다 단발머리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