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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상처 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불리는 작곡가 윤이상, 그의 세계적 명성에 비해 그의 조국인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낯선 편이 아닌가 합니다. 나름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으며 살았다고 생각했던 저에게도 그러했거든요. 도리어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후유증에 고통받았던 시인 천상병을 제가 워낙 좋아해서, 찾아본 적이 있거든요. 그렇게 기억 속에서 흩어져 있던 그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바로 ‘알쓸신잡’이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예악(Reak,禮樂)이
너무나 놀라웠거든요. 분명 서양의 악기로 연주하고 있는데, 그
소리는 한국의 전통 악기 소리처럼 들렸으니까요. 그 동안 양악과 국악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인 거 같네요.
<상처받은 용龍>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출간된 책인데요. 음악가
윤이상과 소설가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입니다. 처음에는 ‘동서양
음악의 경계를 융합한 윤이상의 음악적 시원始元’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아차 싶었답니다. ‘시원始元’, 한자 그대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 멈칫 할 정도로
저에게는 낯선 단어여서, 그의 음악만큼 조금은 난해한 책일 수 있겠다는 선입견이 생겨버렸죠. 처음에는 책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던 ‘삶의 한가운데’로 신선한 감동을 주었던 루이제 린저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윤이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더군요. 특히나, 음악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있던 그가 항일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 그러했어요. 음악가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말, 그렇게 재능과 열정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정말 잠깐만 현실에서 눈을 감으면 자신의 꿈에
다가설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 찰나의 외면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너무나 담백하더군요. 그리고 나름 열심히
찾아봤던 동백림사건에 대한 루이제 린저의 르포르타주 역시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재조명되어야 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윤이상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음악제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고국을 찾지 못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참 좋았어요. 사실 저에게 윤이상의
음악은 낯선 충격으로 인식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설명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도움이 되더군요. 앞으로 음악을 감상할 때마다 참고하기 위해, 그
부분들만 따로 정리해놨을 정도입니다. ‘소등 신호 아래서’라는
첼로 협주곡 중간의 모놀로그 장면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네요.
“깊은 정적이 시작됩니다. 나는
혼자 감방 안에 있습니다. 나는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살아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안에 쓰고 싶은 음악이 아주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죽음에 반항하지만 결국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던 밤에 나는 절에서 울리는 목어 소리를 들었습니다. 근처 절에서 스님들이 심야에 회향하며 독경을 하는 소리였습니다. 당신은
그 목어가 어떤 울림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것을 불국사에서 들으셨을 테니까요. 마치 무거운 물방울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반향판 위로 떨어지듯, 둔탁하면서도
음악적으로 울린다고 했습니다. 한밤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가 울립니다.
나는 이 울림을 듣고 승려들은 죄수가 죽을 때마다 절의 목어를 울리는 모양이라고 상상했습니다. 또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강박관념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반항과 굴복, 고통과 편안함이
이 작품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