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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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을 읽고 문득 미학자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예전에 읽은 소설이 서울대 미학 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 미학과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다는 사실을 핑계로 삼고 싶지만 말이다. 유명한 논객 덕분에 미학자는 낯선 직업 군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지는 감이 잘 안 왔다고 할까? 그런데 그 뜻이 미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미학자는 미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니, 느낌적인 느낌과 비슷한 순환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대신해보고 싶어진다. 미학자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심미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학자라고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여러화가들의 자화상, 푸코의 담론분석과 푸코가 의지한 플라톤의 저작,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이렇게 나열하면 상당히 거창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유려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그의 말이다. ‘너는 너 자신에게 주의해야 하고, 너 자신을 잊지 말고, 너 자신을 돌봐야 한다어쩌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침착(沈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오롯이 하나뿐인 존재인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갖게 된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속의 그의 자화상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상허 이태준 선생의 빛 바랜 가족사진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이 있다. 마치 그 순간의 행복을 박제해놓은 듯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라보니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기록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꺼내놓지도 못하는 그런 사진이다. 심지어 얼마나 꼭꼭 숨겨놓고 싶었는지, 인생을 조금 더 서정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그 사진을 떠올릴 정도였다. 문광훈은 그 사진에 담긴 각각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한국의 모파상이라 불릴 정도로 단편소설을 잘 썼던 이태준은 월북을 한 후, 그 끝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막노동으로 생을 이어가던 그에게서, 자신의 수필에서 나이 들어가는 것을 농익은 능금으로 비유하며,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라며 쓰고 싶어했던 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각자 찾아낸 최선의 삶의 형태가 아닐까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 속의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제각각 이듯이 말이다. 행복이란 어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삶을 수용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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