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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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성장한 사람입니다. 대학교 때, 교양과목에서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현상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신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을 접하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공부하고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철학자 볼테르는 유신론을 크게 공격하며 기독교와 성경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 단언했지만,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1, 2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이성(理性)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기술 문명사회,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시대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자연과 우주를 이해할 수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오늘날 종교를 비판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초지일관 종교를 비판합니다. 과거 어리석은 인간이 두려움에서 신과 종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은 이제 인류에 전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제1장, 좋게 말해서’에서 그는 종교에 반대하는 주장 중에 결코 물리칠 수 없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종교가 인간과 우주의 기원을 완전히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것, 이 첫 번째 잘못 때문에 최대한의 노예근성과 최대한의 유아독존을 결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종교가 위험스러운 성적 억압의 결과이자 원인이라는 것,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p. 16). 이것은 저자가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이해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그의 표현대로라면 “‘변성기도 겪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생각보다도 못한 자라는 조롱이 담겨있는 셈이죠. 저자는 종교에 대해 반감을 넘어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 간의 싸움, 심지어 같은 종교 안의 분파들이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종교는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종교는 문명뿐 아니라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다“고 후렴구처럼 반복합니다. 물론 히친스는 자신도 종교인 중에서도 죽음의 종교에 맞서는 사제, 주교, 랍비, 이맘을 알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라 인류애 때문“이라고 말합니다(p. 49). 히친스는 종교인들의 좋은 점들을 발견하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종교인들의 나쁜 점을 발견하면 그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분명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주장입니다. 종교인들은 반대로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나쁜 점을 발견하면 그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며, 종교인들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인들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수없이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현상으로 모든 종교를 불필요하고 심지어 악하다고 보는 것은 치졸한 주장입니다. 그것은 무신론 과학자들의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모습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은 인간의 이성 자체가 악하고 그 이성으로 과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가 종교의 해악을 이야기하고 싶어 제시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런 식의 주장임을 저는 이 책 전체를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서 종교인들의 엄청난 죄악과 잘못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과 도그마티즘에 대해 반성해야 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악행들이 종교 때문입니까? 종교를 가지지 않은 자들에 의한 악행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책이 마지막 “결론: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다”에서,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잣대로 여기는 계몽주의자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도 인간의 이성을 신(절대적인 것)으로 믿은 계몽주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비난서’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히친스의 주장이 별로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차라리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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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 2012-02-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으셨나요?
읽으셨다면 두 저자가 같은 부류, 또는 도킨스 쪽이 더 신랄하다는 평가가 당연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추천하지 않으시려면 '만들어진 신'에게 역시 마찬가지여야지요.
이 서평은 오히려 '만들어진 신'쪽에 쓰시는 게 더 적절해 보이네요.

life7joy 2012-02-09 09: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의 말은 도킨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서 토론 가능한 비판을 하는데, 히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적으로 종교를 비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종교에 대해서는 심한 거부감과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십보백보이지만요. 그래서 종교 비판에 관한 책을 읽으려면 차라리 히친스보다는 도킨스의 책이 조금은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국내 최초 완역본) - 로렌스 형제의 시대를 뛰어넘는 불후의 명작
로렌스 형제 지음, 임종원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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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기독교 영성의 고전입니다. 브니엘 출판사에서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저는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었습니다.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이 책이 번역되었는데, 주로 '편지‘ ’ 대화‘ ’ 조언(잠언)‘ 정도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브니엘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로렌스 형제를 기리는 추모의 글과 로렌스 형제의 신앙과 삶에 관한 내용도 함께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 “국내 최초 완역본”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이 책은 로렌스 형제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노아이유의 보포르 대수도원장이 로렌스 형제가 쓴 편지를 수집하거나 로렌스 형제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혹은 로렌스 형제의 유품에서 발견한 것들을 출판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브니엘 출판사에서 출판된 완역본은 로렌스 형제의 삶과 그가 추구했던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보포르 대수도원장은 로렌스 형제가 고매한 도덕성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다고 회상합니다. “겉으로는 소탈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누구든 그 이면에서 빛나는 비범한 지혜, 가난한 시골뜨기 평수사를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자유, 그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심오한 깊이를 발견하였습니다.”(pp. 182~183). 보포르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보여준 또 다른 특성은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대담함을 보이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비범한 견고함이 있었습니다.”(p. 196). 수도원에서 하찮은 일들처럼 보이는 부엌의 허드렛일을 하고 낡은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는 평범한 수도사가 어떻게 이런 영적 비범함과 고결한 인격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그가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만을 원하고 연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자주 즉각적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로렌스 형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종교적 규범이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이며 일상의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는 삶 속에서 하나님과 실제적인 연합을 경험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야 말로 신앙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 조언에서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에 대해 말한 것을 마음에 새겨 봅니다(pp. 86~89).

   첫째, 영성 생활에서 가장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훈련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순결하고 단순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정진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혼란스러운 영혼의 상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성급함과 충동적인 태도 없이 차분하게 모든 행동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넷째, 어떤 경건한 행위나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동안이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자주 잠깐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서서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다섯째, 이 모든 예배 행위는 다음과 같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신다는 믿음,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부 지각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여섯째,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미덕은 무엇인지, 익히기에 가장 어려운 미덕은 무엇인지, 가장 흔히 빠져드는 죄악들은 어떤 것인지, 가장 자주 넘어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저는 너무 복잡하게 살았고 하나님 외에 너무 생각하는 것이 많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 형제처럼 단순하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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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살다 - 성공과 행복으로 삶의 모드를 바꾸라
정병선 지음 / 대장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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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신앙인으로서 행복에 대해 말하는 목사님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교회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싸구려 복음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인데도 말입니다. 신자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여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 문장은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참 행복을 경험하며 삽니다. 저는 기독교 희락주의자 존 파이퍼 목사님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고, 행복 추구가 기복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병선 목사님의 <행복을 살다>는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기독교 행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매우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정변선 목사님도 제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신성한 의무다”(p. 55). 그리고는 ‘행복에 대한 일곱 가지 오해’를 지적합니다.

   첫째, 행복은 가진 자들의 자기만족이라는 오해

   둘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는 오해

   셋째, 행복은 고통과 근심,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오해

   넷째, 행복의 모양과 색깔은 다르지만 행복은 다 같은 것이라는 오해

   다섯째,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오해

   여섯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즉 위엣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엣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오해

   일곱째, 행복을 삶의 목표로 추구해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오해.

 

   이 책은 올바른 기독교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한 삶의 길을 찾아가는 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목회 중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다시 제 2의 목회를 하면서 치열한 삶의 현실 속에서 신앙적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책읽기를 좋아해 수많은 책을 읽고 산책하며 깊은 사색을 하는 목사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4장, 하늘을 통해 땅을 보라’가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이곳에 기독교 행복의 본질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 행복은 그저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은총 … 행복이라는 보물을 볼 수 있는 눈만 뜨면 된다. … 하늘을 통해 땅을 보는 것이 신앙이다 … 행복은 마치 음악과 같다. 음악이 악보에 있지만 악보를 읽고 연주하는 순간에만 음악이 존재하듯이 행복도 그렇다. 생활의 악보를 읽고, 그 악보대로 살아내는 순간에만 행복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생활의 악보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pp. 73~86).

   제 3 부에서 저자는 돈과 행복, 성공과 행복, 신앙과 행복, 문명과 행복의 관계를 매우 균형잡히게 설명하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효용체감 곡선’을 소개하면서 돈에 대한 양극단의 생각을 지적합니다. 옳습니다. 저는 저자의 행복론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성찰하며, 근본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물으며 본질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히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것에서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성공’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행복의 본질을 찾아가는 행복한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 ‘기독교 행복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자에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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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욕망,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11
스테파노 추피 지음, 김희정 옮김 / 예경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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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 이것은 인생의 가장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미술에서 사랑의 주제가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은 예술이 곧 삶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에 나타난 에로스적 사랑의 다양한 상징과 비유들을 공부하다보면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겠다 싶어, 이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자 스테파노 추피에 대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예경에서 나온 스테파노 추피의 <천년의 그림 여행>을 사서 읽었는데, 수많은 그림 도판이 선명하고 해설이 매우 잘되어 있어서 만족스러운 그림공부가 되었거든요.

 

   저자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라는 방대한 주제를 제스처와 상징, 장소, 애정과 열정, 에로스, 세기의 남녀 등으로 분류해서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처음 접하는 그림들도 많았고, 익숙한 그림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산만해 보였습니다. 차라리 작가와 시대별로 사랑의 주제와 관련된 그림들을 정리하고 소개했으면,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사에서 언제나 최고의 주제인 사랑과 욕망을 그린 그림들은 사회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 그리고 화가의 기법에 따라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나타나니까요! 예를 들어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하는 <다나에> 이야기를 그린 작가들을 시대별로 정리하고 설명했으면 각 시대의 미술 표현 양식과 사상을 많이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언뜻 생각해도 <다나에>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티치아노, 젠틸레스키, 렘브란트, 클림트, 등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책에는 코레조의 작품(p. 104)과 티치아노의 작품(p. 213)을 다른 주제(각각 ‘침대’와 ‘음란한 이미지’) 아래 소개하고, ‘제우스와 다나에’라는 항목(pp. 323~324)에서 티에플로와 렘브란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작품을 함께 묶여 각 작품의 특성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사랑과 관련된 주제들은 너무나 방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만족할만한 분류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수많은 주제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을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몇 몇 작품들이 특히 인상에 남습니다.

   이 책에서 줄리오 로마노의 <두 연인>(pp. 102~103)이라는 작품을 처음 대했습니다. 저자는 ‘침대’라는 분류 아래 이 작품을 실었는데, ‘매음굴이나 창녀’ 혹은 ‘음란한 이미지’에 실었어도 좋았을 듯합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예술적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그래피와 차이는 무엇일까 그 경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자는 “성적 욕망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위한 포르노그래피와 치밀하고 지적인 연출을 통해 완성되는 에로틱한 예술은 구별되어야” 한다(p. 212)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명확히 구별될 수 있을까요?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p. 212)이나 모딜리아니의 <붉은 누드>(p. 216)는 매우 도발적이지만 결코 포르노그래피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는 분명 음란한 포르노그래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느꼈지만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pp. 160~161)는 역시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그림은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였던 알마 말러와 화가 자신의 짧고 불안한 사랑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샤갈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풍의 몽환적인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인이란 주제 아래 소개한 렘브란트의 <문설주의 헨드리케>와 마르크 사걀의 <장미빛 연인들>도 새로웠습니다(pp. 176~175). 서양 미술계에서 볼 때 엑조티시즘(exoticism, 이국풍)인 작품들도 언제나 깊은 인상을 줍니다. 

 

   제본판이 조금 더 크고, 작품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자세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책, 저의 미술서적 책꽂이에 꽂아 놓고 자주 손길이 갈 것 같습니다. 유쾌하고 행복하게 감상했습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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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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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상처를 말하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왜 진정한 예술은 상처 속에서 자라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열 명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함으로써, 예술의 진정한 기능과 의미에 관해 말합니다. 예술이 하나의 비즈니스로 전락한 이 시대에서 예술은 세속적인 성공과 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듯합니다. 성공한 예술가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끈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성공한 예술가들 중에는 시대의 요구에 편승한 속물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끈 예술가들의 작품들에도 예술의 진정한 기능을 잘 구현한 것들도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진정한 예술은 고통과 상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저자는 열 명의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자신의 어조로 찬찬히 들추어냅니다. 카미유 클로델, 빈센트 반 고흐, 케테 콜비츠, 프리다 칼로, 권진규, 백남준, 이성자,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장미셀 바스키아. 이들은 모두 시대의 약자로, 수많은 고통과 상처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원한 이방인들이었고, 스스로 혼돈 속에서 예술을 붙잡았던 자들입니다. 저는 카미유 클로델과 권진규의 삶과 작품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 조각가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적으로 철저히 약자인 상황에서 모두에게 버림받고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했던 카미유였지만, 그녀의 삶과 작품은 예술정신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그녀의 작품, <성숙>을 보고 있노라면, 철저히 소외된 자의 갈망을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습니다.

   권진규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 여인과 가정을 이루었지만, 굳이 조국 땅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하며 끝내 아내와 이혼해야 했습니다. 그는 예술보다 조국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추상주의가 시대적 주류로 인식되던 시기에 구상주의와 사실주의를 고집했기에 그의 실패는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지나치게 민족적 정서에 부응하고, 불필요하리만치 심오하고 성찰적이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그의 두 테라코타 작품, <지원의 얼굴>과 <자소상>은 상향성과 정면성을 유지하며 구도적 초연함을 보입니다. 결국 그는 50대 초반에 마지막 유서에서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이라 쓰고, 자살로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작가 심상용은 예술에 대해 이런 도전을 던집니다. “타인과 자신이 욕망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그리고 허무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삶의 중요한 실체인 고통과 슬픔을 깊이 안을 수 있는 가능성, 그럼으로써 실존의 깊은 뿌리에 다가설 수 있는 여지 그리고 예술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전인격의 길이 되도록 하는 것이 다시금 절박한 논의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p. 171).

 

   이런 식으로 저자는 열 명의 예술가를 통해 성공한 예술, 힘의 예술에 대해 반성합니다. 심상용은 창조성은 안정이나 성공과 공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예술 작품들은 혼돈과 위험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도전한 결과입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무기를 들지 않을 힘’에 위해 기도한 것을 거론합니다(p. 8). 그러다보니, 저자가 이 책에서 인용한 수많은 글들은 미술과 관계없는 기독교 작가의 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토마스 머튼, 오스 기니스, 브라이언 왈쉬, 폴 투르니에, 자끄 엘룰, 게리 토마스, 필립 얀시, 데이빗 씨맨즈, 모건 스콧 펙, 리차드 포스터, 포사이스 등. 아마도 저자는 예술의 정신으로 ‘약함이 강함’이라는 사도바울의 역설적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예술가의 힘의 부재, 무능력, 상처가 곧 예술의 힘의 근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은총의 근거”(p. 323)입니다.

   자신의 시대에 화려하게 성공하고 인정받은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자신의 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훨씬 더 선명하게 예술의 정신과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술 작품이 고통당한 예술가들의 영혼을 치유했듯, 이런 작품들은 지금도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저는 저자의 논지에 동의합니다. 이 책은 예술의 정신과 의미를 넘어 삶의 의미와 은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에 많은 울림이 있었던 독서였습니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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