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더 느리게 - 하버드대 행복학 명강의 느리게 더 느리게 시리즈 1
장샤오헝 지음, 최인애 옮김 / 다연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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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탈 벤-샤하르(Tal Ben-shahar)의 <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해피어(Happier)>를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은 아닌지, 또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행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는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삶의 목적은 ‘신을 영화롭게 하고, 신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조금은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해피어> 맨 앞에 인용된 헤르만 헤세의 글이 강렬하게 다가왔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렇다. 조금 더 솔직히 생각해보니,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상치(相馳)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도 상반(相反)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 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타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 살 때 행복은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샤하르의 행복 6계명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1) 인간적인 감정을 허락하라. 2)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가 만나는 곳에 있다. 3) 행복은 사회적 직위나 통장잔고가 아닌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라. 4) 단순하게 살라. 5)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자. 6)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감사를 표현하라. 샤하르의 행복학 강의 <해피어>를 바탕으로 한 장샤오헝의 <하버드대 행복학 명강의, 느리게 더 느리게>는 6계명을 15강의로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 놓은 책이다. 장샤오헝은 첫 번째 강의에서 자신의 행복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말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의미있는 목표를 세우라고 도전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충고한다(p 21). 전적으로 동감한다. 돈이나 타인의 시선에 근거해 일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자신과 타인의 잘못과 부족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p. 40) 가지라고 충고한다.

 

항상 분주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 심지어 불필요하기까지 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한 것은 아닌지?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적어질수록 신에게 더욱 가까워진다.”(p. 138). 정신과 의사가 스트레스가 심한 환자에게 처방한 세 가지 약 봉투 이야기가 재미있다. 첫 번째 봉투에는 ‘모든 통신 기기의 전원을 끄고 조용히 귀 기울여 보시오.’ 두 번째 봉투에는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보시오.’ 세 번째 봉투에는 ‘무엇 때문에 늘 바빴는지,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pp. 134~135)라고 쓰여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식의 처방을 내리는 의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말 의미 있는 처방이다. 내 주변을 돌아본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많은데, 바쁘게 사느라 관심조차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소중한 감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나의 삶의 방향을 생각해 본다. 지나치게 물질의 부요와 외적 성공을 추구하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가! 내 주변에는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친구들이 많은가!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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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서광>을 읽다
고병권 지음, 노순택 사진 / 천년의상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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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거침없는 언어로 기존의 가치들을 가차 없이 뒤집어엎은 철학자,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철학의 광부’라고 부른다. 니체의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서광>일 것이다. 그리고 니체 전도사인 철학자 고병권은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진 <서광>을 해체해 읽어내고 그것을 다시 구성해 <언더그라운드 니체>라는 책을 펴냈다.

 

고병권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이라는 책 제목을 서두로 꺼낸다. ‘니체의 철학’이라고 하면 ‘소유’ 내지 ‘소속’의 냄새가 풍기는데, ‘니체와 철학’이라고 하면 서로 소속되지 않아도 된다. ‘니체의 철학’을 말하려면 ‘니체’와 ‘철학’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니체에게 철학은 가치 일반에 대한 비판적 활동이다. 고병권은 <서광>의 서문을 소개하면서, “우리 자신을 되찾기 위해 내면의 수직 갱도를 파고 들어가는 일은 불가피하지만 매우 위험한 일”(p. 23)임을 강조한다. 그렇다. 니체에게 있어서 철학은 도덕이나 종교라는 이름 아래 경외되고 숭배되는 모든 것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니체는 그 고통이 제공하는 명석함으로 이 책, <서광>을 썼다.

 

니체의 사상을 잘 붙잡은 고병권은 그가 ‘Morgenröthe’를 <아침놀>이 아니라 <서광(曙光)>이라고 고집하는 이유를 밝혔다. <서광>이라는 표현에는 철학하는 시간을 ‘황혼녘’에 둔 헤겔과 대비되는 니체 자신의 철학하는 시간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즉, 니체가 생각한 철학은 “일에 뒤처진 사유가 아니라 일에 앞서는 사유, 일을 마무리하는 사유가 아니라 일을 시작하는 사유”(p. 32)인 것이다. 고병권은 이 <서광>의 아포리즘들을 니체가 말한 ‘지하의 인간’ 개념으로 사유하고자 했다. 그래서 책 제목도 <언더그라운드 니체>인 것이다. 니체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려 했다. 이성적 판단을 포함한 모든 판단의 배후에 있는 선판단까지, 즉 근거의 근거까지 비판을 밀어붙인 니체는 심층이 아니라 심연(深淵)에까지 이르렀다. 니체는 인간적인 덕성, 즉 도덕의 동물적 기원을 밝힌다. 기독교의 유래를 로마 사회에서 힘없는 사람들의 감정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루터와 바울은 이런 기독교를 극복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자신들이 싸우고자 했던 것을 닮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의 최대 위험, 바로 ‘괴물을 닮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p. 78).

 

이 책, <언더그라운드 니체>는 <서광>의 독자이며 동시에 해설자로서 고병권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이 사회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어쩌면 가장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모든 것의 근거까지 비판하는 철학을 통해 참된 자유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도전한다. “고대나 중세적 인간들이 점성술만으로도 미래를 확신하고 대담한 모험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반면, 훨씬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한 근대인들은, 그만큼 커진 불안과 회의 때문에 대담하게 행동할 수가 없다”(p. 132, <서광>, 155절). 나는 자유인으로 위태로운 모험 가운데 인생을 살 것인가, 성공한 노예로 그저 안락한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책의 부제가 마음에 오랜 울림을 준다. “천천히, 그러나 대담한 날갯짓으로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하여”(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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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 피나코테크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11
실비아 보르게시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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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데 피나코테크’, 낯선 미술관 이름이다. 마로니에북스의 세계 미술관 기행 시리즈에 소개된 미술관들 중 가장 낯설다. 그러나 책 표지 그림은 너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모피를 입은 자화상>이다. 처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예수의 초상화인 줄 알았다. 이 책은, 이 그림이 독일 최초의 정면초상화이며 뒤러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 분명히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해 놓았다(p. 55). 설명을 읽고 다시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67×49cm의 그렇게 크지 않은 작품인데, 분명한 자의식이 반영된 아름다운 서체의 글귀와 서명이 눈에 띈다. 알브레히트의 A와 뒤러의 D를 결합한 이니셜 서명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른편 상단의 문장은 뭐라고 쓴 것일까? 첫 줄은 화가의 이름인데, 그 아래 무엇이라 쓰여 있는지 알기 어렵다. 얼른 인터넷을 뒤진다.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불변의 색채로 나 자신을 그렸다.”라는 라틴어 글귀란다. 다시 그림을 본다. 좌우 대칭의 완벽함과 비례분할, 분명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예수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예수와 자신을 동일하는 화가로서의 위엄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실물로 이 작품을 본다면 어떨까?

 

미술사에서 ‘스탕달 신드롬’이란 용어가 있다. 스탕달이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교회에서 14세기 화가 조토의 <성 프란체스코의 장례>라는 프레스코화 작품을 보고는 충격을 받고 쓰러질 것 같았다고 고백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도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고는 같은 증세를 보였단다. 나는 뒤러의 <모피를 입은 자화상>을 보고 또 보았다.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른다. 내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에 가면 뒤러의 이 작품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 증세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은 내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피에타>, 라파엘로의 <카니자니 성가족>와 <천막의 성모>, 티치아노의 <앉아 있는 카를 5세의 초상>, 렘브란트의 <젊은 날의 자화상>과 <십자가에서 내림>, 프랑수아 부셰의 <엎드린 소녀>, 등. 그런가 하면 낯선 화가의 작품들도 많다.

 

이 책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의 역사를 개관해 놓았다. 대공 루드비히 1세의 주문으로 건축되기 시작한 이 미술관은 10년 뒤, 1836년에 완공되었다. 어떻게 알트도르퍼의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과 뒤러의 작품들, 독일이나 플랑드르 거장의 작품들이 어떻게 이 미술관에 소장되었는지 설명해 놓아서,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맨 뒤에는 미술관 사진과 주소, 개관시간과 휴관일, 교통편, 심지어 가이드 투어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고 미술관 1, 2층 단면도에 각 전시실에 어떤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는지 알려준다. 이 책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요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수록해 놓은 것이다. 차라리 각 전시실 별로 작품을 설명해 놓았다면, 독자가 이 미술관에 직접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내 마음은 이미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의 각 전시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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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
이현세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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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하면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가 생각납니다. 그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이현세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를 읽으며.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인생에 관한 그의 치열한 생각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그림을 잘 그렸지만, 색약이기에 화가가 될 수 없었던 이현세는 흑백의 세계인 만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살다보면 한쪽 문이 닫힐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은 열린다”(p. 26)고 말합니다. 그 암담하던 5공화국 시절에 만화가로 산다는 것의 치욕, <천국의 신화>의 음란물 시비로 6년간의 지난한 법정 싸움, 그에게는 막막한 사막을 걷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간 그 뚝심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는 가장 큰 사막이 가장 큰 여행자를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천재가 아니라도, 어떤 일을 미치도록 좋아는 하지만 그 일에 재능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을 믿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을 사는 법에 관한 그의 글에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진정한 리더를 만드는 것은 1등이 아니라 은은한 인간의 향기가 묻어나는 ‘인기’”(p. 125)라고 말합니다. 이현세에 따르면, 인생을 승자와 패자로 나눠놓고 승자의 삶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는 <삼국지>에서 그 예를 듭니다. 결국 최후 승자는 사마의고 제갈공명은 패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누가 더 위대한 삶을 살았느냐고 반문합니다. 나답게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겠죠. 저자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캐릭터에 관해 흥미로운 고백을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극대화된 캐리터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까치, 오혜성입니다. 그리고 출세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지독히 세속적인 모습으로 마동탁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두 캐릭터가 자기 안에 다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순수한 열정의 존재가 오혜성에게, 세속적인 모습은 마동탁에게 투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한 녀석들을 구원해 주는 존재가 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삼국지>의 조자룡과 사마의에게도 각각 부여했습니다.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되면, 인생에 관해서도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독서였습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자신만의 인생길을, 자신을 믿고 꿋꿋하게 그리고 즐겁게 열정적으로 걸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을 멋지게 사는 법이라고 이현세는 말합니다. 이현세는 참 멋지게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내며,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반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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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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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거친다고 하더니 여전히 사방 뿌옇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잠이 쏟아집니다. 간신히 오전의 일을 마치고 사무실 의자에서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졸립군요. 김용택 시인의 <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를 읽었습니다. 심심해서 세상이 자세히 보였고, 자세히 보니까 생각이 일어나, 그것을 글로 옮겼더니 시가 되었답니다. 그는 심심해서 시를 썼답니다. 그는 “시는 외로움과 시절의 배고픔과 사랑의 그리움 속에서 간절하게 솟아나는 맑은 생수”(p. 75)라고 말합니다. 나는 여전히 졸리고 피곤합니다. 시인은 오후 다섯 시 이슬비 오는 운동장 가 미루나무 잎이 흔들릴 때 정호승의 시를 읽으며 님이 왔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오후 여섯 시 시인의 글을 읽으며 찾아 온 ‘졸음’ 님을 반깁니다. 날씨가 많이 포근해지고, 해도 상당히 길어져 오후 여섯 시도 환하군요. 그 환한 오후 여섯 시 나는 미세먼지와 독감 기운으로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님을 끌어안습니다.

 

시인의 글을 언제나 정감이 넘치고 따뜻했습니다. 그의 시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좋습니다. 그는 괭이질과 호미질을 배울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 ‘늘 힘을 빼야 한다’는 말씀을 명심한 듯합니다. “나는 감나무를 좋아한다”(p. 120)로 시작하는 ‘감나무’를 읽고 있노라면 시인의 고향 감나무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아니 나는 어느새 여러 감나무가 있는 시골에 서 있습니다. 시인의 글은 언제나 고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청춘의 시절에 해 저무는 봄날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해질녘의 푸른 어둠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바위와 바위 사이를 긴장시켰다”(p. 174)과 회상합니다. 시간이 지나 모든 것들이 어둠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시인은 긴 숨을 내시며 안심합니다. 그리고 툇마루에 나와 앉아 강물에 죽고 사는 달빛을 바라봅니다. 달빛이 그의 몸을 덮어 주고, 지친 발등을 환하게 밝혀줄 때, 시가 그에게로 왔습니다.

 

나는 이런 시인 김용택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교훈적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글들도 눈에 띄는군요. 아내도 이 책을 읽고는 이전의 김용택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드는 글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과 일상을 순수하게 시로 글로 표현하던 시인이었는데, 점차 ‘꼰대’가 되어가는 것인가요? 하긴 그도 젊은 시인의 글들을 대하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옳은 말만 하는 꼰대들은 지루하다. 뻔한 시들이 판을 친다. 하나 마나 한 글들이 판을 친다. … 새로운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나는 근대를 넘어선 현대의 짙은 음영을 본다. … 저기 저 강굽이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흐르는 물 위로 늘어져 물을 보며 새 눈을 틔운다. 나의 한계다”(pp. 112~114). 나는 여전히 시인 김용택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너무 크고 위대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고 차분히 지적하며, 일상의 ‘하찮은 가치들’을 찾아 노래하는 그 시인을, 그의 글들을 좋아합니다. 나른한 봄 날 오후 김용택의 글은 시가 되어 나에게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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