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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평점 :
5-7-5의 절제된 언어로 이루어진 하이쿠의 세계! 그 작은 시구(詩句)에 세상과 삶을 담아낸다는 것, 참 매력적이다. 류시화 시인이 오랜 시간 열정을 바쳐 번역하고 해설해 더욱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그는 하이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이쿠는 반쯤 열린 문이다. 활짝 열린 문보다 반쯤 열린 문으로 볼 때 더 선명하고 강렬하다. 하이쿠는 생략의 시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여백과 침묵으로 마음을 전한다. … ”(p. 5). 나체의 여인보다 옷으로 감쌌지만 몸매가 다 드러나는 여인의 모습이 더 고혹적이듯, 하이쿠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첫 번째 소개된 바쇼의 하이쿠, “두 사람의 생 / 그 사이에 피어난 / 벚꽃이어라”(p. 10)는 붉은 꽃을 가득 피운 벚나무와 까마귀 두 마리 그림으로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류시화 시인의 해설이 있어 더 감동적이다. 떠올려본다. 미적 감각까지 공유했던 나의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이. 우정과 사랑, 추억, 삶과 자연 … 우리네 삶에서 한 순간의 찬란함이 사라져도 꽃들은 만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꽃도 또 사라지겠지. 자연스럽게 부손의 하이쿠 하나를 가슴에 담아본다. “지고 난 후에 / 눈앞에 떠오르는 / 모란꽃”(p. 400). 텅 빈 여백에 강렬한 한 줄기 빛을 담은 그림처럼 인상적이다. 사라진 뒤에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모란꽃처럼 사랑하는 친구나 애인의 부재는 오히려 그들을 더 절실하게 만들곤 한다.
극도로 절제된 산토카의 하이쿠는 처절하리만치 탐미적이어서, 고독과 허무함을 사무치게 드러낸다. “머물 곳이 없다 순식간에 저물었다”(p. 546), “기침이 멎지 않는다 등 두드려 줄 손이 없다”(p. 547). 산토카는 시인 호사이의 ‘기침을 해도 혼자’에 대한 화답으로 이 하이쿠를 썼단다. 그리고 호사이가 죽자 그의 죽음을 부러워했다. 산토카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자살 미수에 그친 것을 증거로 내세워 자신에게 삶의 집착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장장 759페이지에 달하는, 부담스럽게 두꺼운 책이다. 하지만 섬광처럼 빛나고, 때론 얼음처럼 차갑고, 때론 선혈처럼 강렬한 한 두 줄의 시(詩)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말이지 어디를 펼쳐보아도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시들이 가득하다. 쓸쓸하고 삶이 허망하게 느껴질 때, 분주하고 바쁜 일상의 삶 속에서 잠시 마음의 평안을 원할 때,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슬플 때,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하이쿠 한 줄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이 책, 사무실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한적한 오후에 하나씩 들추어 본다. 시(詩)가 있어 행복하다. 하이쿠의 세계를 알게 되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