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한 했던 경험으로 눈에 관한 트라우마의 이야기가 많다. 강원도의 눈 이야기는 과장을 좀 섞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런 눈이었다. 물론 괜찮은 눈도 아니고, 더더구나 "참" 괜찮지도 않다. 지겹고도 지겹게 내렸고 눈을 보고 있으면 우울증에 빠져도 전혀 문제라고 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하염없어서 괜찮지 않은 눈이었으니까 말이다.

 

눈이란 어느 장소에 따라 어느 위치와 분위기에 따라 눈을 대하는 태도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어느 리조트의 스키장의 눈이라면 반가웠을 것이고 게다가 시간 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내리는 눈이라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타이틀로 분위기를 살리는 현상이 일어나곤 하지만 복무한 부대에서의 눈은, 방한모를 땀으로 푹 젖어들도록 만드는 노동의 눈이기도 했다. 특히 춥고 배고픈 시절이라면 눈은 단절과 원망을 투사시키는 기후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위급한 상황에 따라 이동이 목적이라면 미끄러운 눈으로 왕래가 끊긴 도로라면 역시나 원망의 눈이 되어 버린다. 배고픈 시절의 눈도, 군 복무 중에 땀띠 나도록 치웠던 눈도 봤지만 역시나 눈은 강원도에서 만난 하염없는 눈이었다. 가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첫눈이 내리는 날 어느 장소에서 우리 만나 자라는 이루지 못할 약속은 철 지난 레퍼토리 같아도 여전히 첫눈의 추억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괜찮은 눈일지도 모르는 일인 것처럼, 눈이 내리는 날에 벌어진 일상의 애환이나 슬픔이나 혹은 기쁨이나 즐거움 등은 눈으로써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물론 나야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당장 카메라를 들쳐 매고 뛰어나가고 싶게 만드는 것 역시 눈이라는 기상 현상의 흔하지 않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이벤트처럼 확신한다.

 

눈이 내릴 때면 사그락 거리며 고요하게 눈은 주로 밤에도 하염없었다. 보통 아침이 되면 겨울 햇살에 산이 온통 눈이 푹 덮인 반사광은 눈을 못뜰 지경으로 시야를 잃게 만들었다. 눈부심의 휘광, 역광, 그리고 반사광까지 온 천지를 하얗고 환하게 바꿔 버렸다. 그리고 빛은 노란빛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밝은 빛은 시력을 점점 잃게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 선 글라스가 지급되지 않는 건 왜? 병사들의 시력쯤이야 뭐 대수냐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는 눈은 가려움이다. 눈이 왜 가렵냐?라고 반문하겠지만, 맞다. 눈은 피부의 가려움과는 전혀 관련도 없다만은 공간의 조건과 환경이 눈과 추위와 만나면 가려움이 될 수 있다는 특별하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한 이중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에 오지였고 백암산이 보이고 분단 휴전선 내에 있는 가드 포스트, 즉 GP였는데, 산 등선을 따라 있으니 산 정산에 위치한다. 산 꼭대기의 집이라니 가장 큰 문제는 식수이다. 계곡에서 물 펌프장에서 정상까지 펌핑하는데 겨울철에는 강원도 산의 추위는 땅속까지 얼게 만들고 수도 베관도 얼어 버리니 단수되기 일쑤였다. 눈이 내려 보급로가 끊기고 식수도 나오지 않고, 식수조차 부족해지면 먹을 물이야 눈을 녹여서라도 마련하지만 씻지를 못한다. 일주일 정도 머리를 씻지 못하고 감지 못하면 냄새는 물론이고 가려움이 밀려든다. 빨리 씻어라는 신호인 건 다 알아도 물이 없으니 씻을 수가 없다. 아 가려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가려움이란 고통은 어느새 눈에 투사시킨다. 눈을 보면 가렵다. 눈을 보면 가려움의 원인이 되는 일종의 분비물을 연상한다. 땀이다. 눈내리는 날에 왠 땀인가라고 할 것이다. 제설작업이 오로지 삽이나 눈 가래, 싸리비로 치우는 인력이라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그야말로 제설작업이라는 노동을 확정 짓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즘은 경운기 한대만 있어도 눈이야 치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휘리릭 도로가로 뿌려 버리면 되지만 군대에서는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가능한 제설작업이니까 말이다. 한 겨울 삭풍이 차라리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질 때의 땀은 씻지 못해서 잔여 분비물은 곧 가려움으로 치환된다. 땀을 진탕 흘리고서도 씻을 수 없는 그 찝찝함은 모두 눈 때문이었고 추위 때문이었다. 때로 고즈넉하게 내리는 눈을 보고 더이상 치우지 않아도 되는, 의무감이 사라진 눈은 그저 소음을 제거한 평화의 고요나 다름없다. 환경이란 어떤 조건에 따라 눈도 대하는 방식은 이렇게 차이를 보인다.

 

어쩌면 눈은 일단정지, 혹은 일단 쉼표를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길거리에 눈이 내리면 모든게 느리거나 멈추어야 한다. 눈이 내려 미끄러워지며 마찰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으로 느리거나 멈추게 한다는 역설이 눈에 담겨 있는 셈이고, 마찰력이 낮아지니 속도가 빨라지는 게 아니라 느려지거나 멈추게 하는 모순적 상황이라는 점이다. 브레이크가 먹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멈추게 한다. 눈 내릴 때만큼은 느리거나 잠시 멈추고 강원도에서 만났던 그 하염없던 눈이 그리울 지경이다. 매일 바쁜 일상에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인생에서 한번쯤 멈춤이나 일단 쉼표를 찍는 여유는 왜 가지질 못할까. 가을날이 와도 단풍 구경을 억지로 가는 연례행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구에서 시간을 억지로 내서가 아니라 여유롭게 가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눈이 그리워지는 쉼표나 떠 올리는 걸 보면, 오늘도 쌓여 있는 눈이 아니라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보니 내 눈깔이 빠져 버릴 것만 같다.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라고 자문해봐도, 자식아 아직 멀었어.라고 하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착각에서 벗어날 때가 올까.

 

오늘 일기 예보를 보니 벌써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강원도 눈이 참 괜찮게 내리나 보다. 그나저나 책 이야기 대신에 눈 이야기나 하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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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an 2019-11-29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원도 원통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1월군번이라 신교대때부터 눈치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눈쌓인 향로봉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죠.....

yureka01 2019-11-29 09:12   좋아요 2 | URL
저는 인제 원통 옆 동네 화천이었죠..햐..겨울의 강원도 눈은...땀구멍이 열리는 계절 ^^..

빵굽는건축가 2019-11-29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은 가려움이다. ^^ 읽고보니 공감이 가요

yureka01 2019-11-29 14:49   좋아요 1 | URL
이젠 강원도의 눈이 추억이 되었네요..^^..

강옥 2019-11-29 14: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낭만의 대상으로 여겼던 눈이 현실적으로는 온갖 애환의 산물이었군요
눈을 보면 가렵다는 말은 완전 파격인데요 ㅎㅎ
요즘도 군대에서 그 고생을 할까요? 설마! 큰일나겠죠 -
겨우내 눈 한번 오지 않는 남부지방에 살다 보니 눈이 그립기조차 한데
유레카님은 눈이 징그럽기도 하겠습니다 ㅎㅎ
인간은 경험으로 학습하잖아요~~~

yureka01 2019-11-29 15:05   좋아요 1 | URL
남부지방은 제설작업 장비가 변변찮거든요..
어쩌다 눈 한번 내리면 도시는 올 스톱되어 버리거든요.
차라리 그때 쉬어가는 여유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니까요..
네 저도 눈이라면 징한 경험.~~~~

2019-12-04 0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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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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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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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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