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연비 북즐 시선 1
조영래 지음 / 투데이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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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어 시와 접목시킬 때, 하이브리드(융합)이다. 직관과 은유가 합쳐 근사한 비빔밥같이 섞여서 피상에서 구상으로 발전하는 발견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사진만으로는 부족하고 시만으로도 안되는 것을 섞고 뭉쳐 조각하듯 지어낸다. 사진과 시의 문장을 통해서 발현되는 놀라운 관점의 발상이, 사진 시집 곳곳에 녹아 상상의 물이 염색되어 베여들었다. 창작이란 노력만으로는 안된다고도 한다. 시인은 하늘이 내는 거라고도 한다. 이는 하늘이란 뜻이 천부적 재능의 또 다른 은유적인 표현일 터다. 이런 발상의 놀랍고도 흥미로운 재미가 사진 시집을 읽는 묘미를 더한다. 가끔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런 상상이 기립하며 조각할 수 있지? 혹은 어떻게 이런 사진 시선이 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시의 문장이 이렇게 기발한 단어로 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흥겨운 의문이 나올 때가 있다. 사진의 직관적 시선에서 감정은 덩어리로 뭉쳐진다. 절묘해질수록 시의 문장이 간결한 진액처럼 진한 발효와 응축된 은유로 나올 때, 나는 즐겁다. 살다 보면 현실에서 만나는 게 대부분 머리 아픈 것들이 많은데, 이 사진 시집은 흥미와 재미를 더한다는 의미에서 진정으로 사진과 시의 조합이 눅진하게 다가오는 즐거움이다. 저자의 이미지적인 상념의 내공이 다져진 탓이 매우 클 것이란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내압을 높이고 드디어 흘러넘쳐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압력 분출. 이게 이 사진 시집으로 탄생된 배경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진으로 보고서도 못 보는 것을 시로 인해 상상의 구체성을 보게 하는 게 짧고 그윽한 감탄으로 나온다.

 

그러나, 시는 내공만으로도 안된다. 시인을 흔히 농부에 빗대는 이유가 농사는 끈질김에서 나온다. 하루 이틀 한해 두해 이렇게 차곡차곡 지어야 한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는 것도 시를 짓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처럼 시인천하지대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물론 사진도 시처럼 지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도 모른다. 발현은 쌓임으로써 충족된다. 그래서 가을날에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듯 시집은 익어가서 문장이란 열매로 나온다.

 

오래전 사진이 없던 시절에서도 그림 속에 시를 지어 문장에 그림을 덧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도 얼마든지 화가의 텍스트를 그림에 넣고 낙관을 찍어 퍼블리싱을 했었다. 그런 점에서 사진에 시를 녹이는 작업은 새삼스럽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글이란 어디에 붙여도 문제는 없다. 그림의 내용을 압축하든 시의 은유를 그림에 첨부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자유의지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사진에 시 몇 줄의 힘은 사진의 힘과 합쳐져서 압축하며 압력을 높인다. 사진 시집을 받고 나서 읽은 후, 첫 느낌은 역시나 기대했던 이상의 사진과 시였다. 무언가 오랫동안 다져진다는 것은 사진과 시를 더 딴딴하게 다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몇 번에 걸쳐 급조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시간적으로 거친 과정 속에서 하나하나 사진 한 장과 몇 줄의 시가 꾹꾹 눌러야만 다져 낸 것이 자신의 사유와 호흡을 넣게 되면 시멘트처럼 굳고 단단하게 양생되었으며 단단하게 굳어 도자기를 굽듯한 시간의 인고를 거쳤으리라.

 

영화 "kingdom of haeven"의 마지막 부분의 협상 대화에서 나오는 문장을 떠올리고 인용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사진과 시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분명 시인은 "나싱(Nothing) 엔 에브리싱(Everything)"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낫씽, 즉 아무것도 아닌 거. 사진은 일상의 흔히 보는 그런 피사체일 텐데 시인의 섬세한 사유적 시의 디테일은 모든 것처럼 사진을 수식한다. 그래서 시가 에브리싱이 아닐까. 그래서 사진과 시는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지만 이 아무것에서 에브리싱 즉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진은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없었던 것을 있는 것처럼 찍을 수는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이미지이지 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철저한 현실에서 시적인 상상력은 그래서 없는 것이 나싱이고 시적인 상상력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거다. 이 시집 한 권에서 사진을 찍어 표현하는 방식과 시를 덧댄 방식의 결합에서 나는 낫씽과 에브리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낫씽과 에브리싱이 저마다 다 가지고 있다. 돈이 에브리싱일 수도 있고 사랑이 에브리싱일 수도 있다. 에브리싱의 이외는 다 나싱일 것이고,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관념 또는 사고방식에 의한, 살아가는 환경과 삶의 조건과 교육의 정도와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따라 나싱과 에브리싱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럼 무엇이 나싱인지, 어떤 것이 에브리싱인지 가려 볼 일이다. 왜냐면, 이는 나싱이 아무것도 아닌, 그러니까 무심코 흘러 버리는 전혀 주목도가 없는 것과 자신의 삶의 전부를 걸어 낸 좋아하는 주목도가 굉장히 높은 것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런 결정이 삶에 다시 들어와 장래의 삶의 질과 행복감의 여부를 결정하는 덩어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인의 사진과 시는, 나싱과 에브리싱이다.

 

​수록된 몇 편의 시와 사진을 감상하자.


 

사진은 창문을 통해 사선으로 들어와 쏟아지는 빛이었다. "흐트러진 나", 흐트러짐은 흡사 힘겨워서 흐트러지고 정돈되지 않는 나였기에, 배낭에 꾸깃꾸깃 주워 담고 멀리 떠나온 길이라고 표현한다. 본디 여행은 여정을 통하여 삶의 정돈이다. 멀리 떠나온 길은 여행 중임을 암시하고 그래서 여행을 통해서 흐트러짐을 추스르고 가지런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거라 짐작한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빛이 가득한 것은 빛의 직진성이 주는 가지런함일지도 모른다. 그래 사진은 직선의 빛이 아니었던가. 사진에서 빛 이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빛이 반사되고 산란되어 퍼지며 부딪혀서 내 시야에 빛이 들어와야 비로소 모든 게 된다. 피사체는 빛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길에서 어느 모델에서 맞이하는 창문이었다 치자. 낯선 곳에서의 방에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커튼을 열고 들어오는 빛은 눈을 때리는 듯 눈이 부신다. 사진에 빛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거라는 것을. 내가 시인 작가처럼 상상을 하게 되는 감정이다.

 


 

 

일몰 무렵의 해변(다대포가 아닐까 추측해본다.)에 빈 의자가 있는 사진에 걸린 시이다. 역으로 보면, 의자는 사람이 앉는 도구이지만, 반드시 사람만 앉아야 할 법칙은 없다. 해질 무렵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리운 사람의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는 비었다고 시인을 표현했다. 그러나 빈 의자에 사람은 떠나도 해질 무렵의 의자에 밀물 빛이 살포시 앉았다. 사람은 비었으나 대신에 빛이 잠시 앉은 의자. 그리고 어둠이 빛이 앉은 의자를 대신하여 자리를 물려준다. 의자는 또 누군가 앉을 것이다. 의자의 역할이 잠기지 않는 해변에도 있지만 빈자리가 아니었다. 빈자리가 아닌 의자는 그래서 빛과 어둠이 교차하여 앉는다. 물론 언젠가 그리운 사람이 다시 와 빈 의자를 앉을지도, 혹은 누군가 다시 앉거나. 언젠가 언젠가 그곳으로 다시 가보면 의자가 사라질 수도 있으나 빛과 어둠은 그 자리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결국 빈자리는 잠기지 않음을 해석을 한다.


 

사진 프레임 끄트머리에 보이는 오래된 지붕일 것이다. 거센 바람에 붙들고자 시멘트 블록을 얼기설기 매달았다. 사진은 분명 시멘트 블록인데 시인은 어느새 낡은 시멘트 블록을 산사의 풍경으로 탈바꿈하는 시선(視線)에서 시선(詩仙)으로 이어진다. 낡고 고단한 블록은 낭랑하게, 가볍게 땅그랑 땅그랑 바람 소리를 내는 듯하다. 사진의 은유가 이런 거다. 보는 것을 보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산사의 풍경으로 은유하는 메타포를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 이게 어쩌면 사진의 현실을 보이지 않는 산사의 풍경으로 치환시키는 관념적 전환을 보고 있다.

 


 

 

누가 바닷가에서 소주 나발을 불었을까. 그윽하게 취해서 소주 병 던져 혹시나 깨져 나간 파편이 흩어진 해변이었을 것이다. 날카로운 소주병 파편은 해변에서는 위험한 흉기가 된다. 혹시나 맨발로 걸었다가 깨진 소주 병에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러나, 파도는 이 위험을 날카로운 예단을 갈고 갈아 유순하게 닯았으리라. 모난 파편같은 울화통을 깍고 깍아서 오랜 시간동안 파도에 닯았을 것이다. 깨진 소주병은 결국 파도에 시간을 더하니 그 어떤 울분이 파도에 절삭되어 옥돌로 탈바꿈이었다. 깨져 날카로운 소주병 파편이 에메랄드로 변하는 환골탈퇴의 환생으로 보았던 거다. 시간을 바라보고 심리적 변화에서 물리적인 변화까지 내다 본다. 살다보면 뽀죡하고 예리했던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 어디 한두번이었을까. 그러나 파도의 시간은 예리한 날카로움을 환생시켜 다시 보석으로 태어나게 하는 힘, 이게  시인의 상상력이다.

 

매너리즘에 빠져 늘 하던 대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무심하고 무덤덤으로 지나고 만다. 흥미로운 일도 별로 없고, 축축 늘어진 채 즐거울 일도, 하다못해 하루에 얼마나 흐뭇한 느낌으로 짧은 시간이라도 많지가 않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 만나는 과정이라고는 늘 피곤과 바쁨의 연속이다. 자신 혼자만이 즐겨 하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그나마 휴일이랍시고 방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나면 오락의 대상 이외엔 별로 해본 것도 없다. 시간의 공허함에 빈 것처럼 시간은 속절없다. 그렇다고 일상을 전혀 물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일상은 원래가 너무 재미없는 무덤덤한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일상의 삶이 환생하듯 세상의 변화에 관조하며, 말초적 쾌락이 아니라 지긋한 관조로 보는 사진과 이에 걸친 시는 일상의 자기만의 탈출이다. 오로지 벌어먹고사는 인생은 때론 구차하다. 그러나, 가끔은 시인의 사진과 시로 만나 일상의 구차함에서 탈출하여 시선의 관조와 시의 문장으로 관념적 탈출은 어떨까?. 시집 한 권이 흡사 사골 국물 머시듯이 꿀꺽 꿀꺽 넘어간다. 시집 한 권의 심리적 포만감. 그리고 일상에선 만날 수 없는 것들의 관조적 시선과 사유의 문장들. 멋진 영화 한편의 아름다운 내레이션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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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9-0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모음집인가 했는데 글이 참 좋아 검색해보니 시집으로 나온 책이네요.
전자현미경실 연구원이라는 이력도 이채로운 분이고요.
소주병이 옥돌이 되기까지의 시간과 인내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yureka01 2019-09-02 15:05   좋아요 2 | URL
사진을 넣은 시집이었어요....
사진과 시의 조합이 근사했습니다...^^..

Nussbaum 2019-09-02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서 뭔가 대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더 깊어진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더 관심있게, 혹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yureka님의 간결하면서도 좋은 글이 사진과 잘 어울리네요.

yureka01 2019-09-02 22:57   좋아요 2 | URL
사진을 담는 피사체는 어떤 의미로 정한 이유의 선택이거든요..
무덕대고 선택하지는 않는 의도이거든요..
당연하게 더 자세히..살펴~~서 보는 것...사진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그런 카메라의 랜즈가 없더라도 가능한 선택임에도,
사람은 눈으로 보는 시선과 카메라 랜즈를 통해서 보는 시선은 차이가 나죠..
더 관심있고 더 자세히 보게 되는 원리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9-04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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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9-04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영래 샘은 디카시를 600수 이상 쓰신 분이에요.
순간포착, 순간언술, 순간소통의 디카시는 경남 고성에서 발원한 문예운동이랍니다.
하이브리드 라는 표현보다 퓨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도 싶구요.
조영래 시인은 디카시 초창기에 입문해서 십년 이상 디카시를 쓰신 분이니 대단하지요
사진시와 디카시의 경계가 다소 애매해서 헷갈리는 분들도 많지만 저도 사실 디카시에 매력을 느끼고 있답니다.
문제는 정체성인데요..... 세월이 가면 정립이 되겠죠 ^^*

yureka01 2019-09-04 20:52   좋아요 1 | URL
사진에 600편의 시를 쓰신 분이라니..놀랍네요..
시집속의 사진과 시 한편한편 모두 의미가 강하더라구요..
네 퓨전..이것도 어울리는 표현입니다.공감됩니다....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디카라는 말은 별로 와닿지가 않아서요.
디지털 카메라...
이걸 줄여서 디카인데 사진과 시이지 디(지털)카(메라)시는 왠지...좀 느낌이 살지 않는 거 같아서....

디지털 카메라라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인데말이죠..
뭐 어쨋거나 저쨋거나 전 사진시라고 부르고 싶어요...

2019-09-07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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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1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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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6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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