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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진 예술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지음, 주은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원제목이 "20세기 사진"으로 된 책인데 번역 제목으로 "20세기 사진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이란 단어가 하나 더 들어 있다. 그래. 예술이라? 예술. 예술은 무슨 얼어 죽을 예술이란 말인가?
사진을 찍으면서 능력과 재능이 결부된 예술적인 사진 시선의 논리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예술이 처음부터 예술이 아니라 차후에 예술화(化)가 되어 예술로 정작 되는 인식으로 전이한다면 그게 예술화가 될 것이다. 부인하기 어렵게도, 나는 예술로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예술로 밥도 먹고 예술적으로 똥도 싸고 예술로 돈 벌어가며 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꼴랑 사진을 찍는 취미에서 예술화될 거란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출발할까? 삶이 부대낄 때 기대기도 하고 의지하며 내 삶을 유지하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올까?라고 생각해 보면 사진 재미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었다. 왜냐? 예술은 자뻑의 미학이니까. 예술은 사람에 따라 무의미하게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상당히 유의미하게 전 생애를 건 필수적인 요소처럼 나눌 수 있다. 누군 예술을 똥보다 못한 쓸모없는 것으로 아예 고려 대상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을 수도, 누구는 자신의 생애를 건 역작을 만들겠다고 작품으로 노리기도 한다. 과연 이 차이점은 대체 무엇일까 따져 묻게 된다. 사진도 이와 비슷하다. 사진이 왜 예술화된 것인지 혹은 그저 이미지로 취급하며 별반 무반응의 예술이든지에 따른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무엇으로 사는가와 예술적인 걸로 사는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는 것과 예술. 묘하게도 같으면서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예술적입니까?"라고 물을 때, 이 예술은 근사한 그 무엇으로 포장해 준다. 예술이 아니다 하더라도 예술적이 되면 근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사는 게 개같이 양아치 짓으로 노는 불량배도 "당신의 불량 끼는 예술적입니다"라고 아부스러운 판단해준다면 어깨에 힘이 약간 들어가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 내는 게 예술의 착각성이다. 앙야치에게 예술이란 어깨에 잔뜩 넣은 뽕 같은 것이고 볼품없는 엉덩이에 엉뽕같은 것일 수도 있다. 뭐 양아치는 양아치일 뿐이지 뽕을 넣는다고 예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예술화가 되는 착각으로 양아치 짓도 예술적으로 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예술인 것이 아닐까 한다. 예술은 뭔가 가치롭게 있어 보이게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이란 것도 이 삶의 뽕 같은 역할이 예술화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솔까 일상의 삶이라는 게 무슨 대단한 역작의 작품처럼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약간의 대동소이한 변화들과 추세의 변형들일 뿐이다. 어제 먹은 밥은 오늘과 내용은 다르더라도 행위는 먹는다는 것과 같은 것처럼 무엇을 먹은 차이와 먹는 것의 동일성에서 내용의 변화로 축적되어 사는 것일 테니까 삶의 일상은 그런 거다. 여기에서 예술이란 뽕. 혹은 존재에서 살아가는 조미료 내지 촉매 같은 것이 예술화로 진행이라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 한다고 자기 착각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거.
일상의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은 드물고 적다. 매우 행복한 일 또한 상당히 희박하다. 산소량 21%에서 우리의 삶은 20%만 되어도 금방 답답하다는 걸 느낀다. 산소부족처럼 늘 겪는 일과도 같은 것들이다. 사는 일이 늘 산소부족을 겪듯이 답답과 짜증의 스트레스가 오만상 발생하는 욕망의 결핍으로 넘쳐난다. 이런 와중에서도 간혹 어떤 탁월한 감동이나 혹은 감정 이입이 획기적으로 일어날 때 "이야! 완전히 예술이네."라고 감탄사를 발사하는 것도 있다. 예술이 뭔지 확실하게 정의 내리지는 못해도 예술적인 어떤 응어리나 덩어리를 만나게 되면 나오게 된다. 그래 예술. "이런, 똥 같네" 보다 "예술이네"라고 탄식하지 않고 탄감을 할 때 우린 모종의 작은 행복감도 느낀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 행복은 아마도 다른 차원에서 노는 따로 국밥이 아니라 그냥 국과 밥이 섞인 것이 아닐까 한다.
예술은 모방에서 변화로 이어진 창조이다. 그래서 예술은 창조 창작 창의로 수렴되는 이유도 된다. 뭔가 다른 것. 그리고 이 다름에서 아름다움의 감성이 생길 때가 바로 예술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일상에서 마냥 비슷비슷한 삶에서 뭔가 새롭게 상상하고 이 상상력이 새로운 창작으로 연결되어 아름다움의 새로운 차원이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이 다른 차원의 미학이 생길 때에 비로소 충만되고 만족되는 행복한 요소를 이르는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창작과 창조와 창의성은 어렵다. 예술이 어려운 이유이다. 쉬우면 쉬울수록 만족감은 작다. 어려울수록 성취감의 만족이란 행복은 비례로 커진다. 인간의 욕망이 행복으로 치닫는 운명은 우리의 삶을 자꾸 어렵지만 이루어내는 예술화를 요구한다. 어쩌면 예술이란 인간의 욕망에 걸쳐진 궁극적 목표이자 원대한 이상적인 목적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사진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때는 카메라가 없었다. 사진은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이다. 사진도 회화의 아류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20세기는 사진이 예술화된 인간의 발명품이다. 철저히 창조된 카메라에서 사진은 출발했고 예술로 승화된 케이스이다. 자연 발생스러운 그림이나 음악과는 역사가 상당히 짧다. 그래서 15세기의 사진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에서 사진이 예술이란 상상력의 목표를 세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예술화시킨 것이 바로 사진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역사로써 그치지 않고 역사의 시간성을 사진으로 표현하고 이를 예술이 된 것. 이게 시간의 예술화이다. 시간의 욕망은 도저히 쟁취할 수 없는 영원한 이상의 표상처럼 인간의 유한성에 바늘을 찌르고 아프게 한다. 시간의 절대성 앞에서 그 누구도 욕망을 품고자 해도 절망을 하게 만드는 일회성의 흐름에 대해 인간의 욕망을 과거라는 기억의 소재로 만들어낸 사진이었던 거다. 지나버린 시간에 대해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사진은 선연하게 되새김질을 하며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무모함으로 욕망을 예술화된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이유를 불문하고 다 사라진다. 이 부존재에 대한 마지막 일성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평생토록 산사에서 해탈을 하고자 도를 찾는 스님의 마지막 열반 송이 있듯이 우리도 우리 생의 마지막 열반송 같은 노래 한자락이 예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이게 예술이라면 좋겠다는 뜻이다. 늙어 가며 죽어 사라지는 이 불꽃같은 삶에 무슨 미련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도 없는 허무한 삶이다. 그러나 사라지기 전에라도 자신의 생에 한판의 근사한 예술이랍시고 읊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죽을 때까지 똥이나 사다 가는 게 재미있지는 않다. 비참하고 자존감조차 없는 무지한 이 더러운 인생을 환한 자신만의 예술화는 그래서 필요하다. 창작이 어려울지언정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집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따지고 보면 사는 게 별거 없다. 지나고 나면 다 허무한 부존재의 영점 이하인 인생에 이 현재의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게 미학을 빼면 뭐가 남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 중에서도 가장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이라는 게 제일 큰 장점 중 하나다. 삶을 쉽게 예술화시키는 지름길이 카메라라는 훌륭한 창조적 도구라는 점이다. 인간은 도구의 삶이다. 그러니 이 예술이 도구로 예술적 표현으로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하다못해 바이올린이라도 제대로 켜서 예술화시키려면 웬만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사진은 다만 카메라와 셔터 누르는 약간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 그 사진적인 예술화된 시선을 발현시키는 공부만 한다면 된다. 18세기에는 없었던 사진을 우리 21세기에는 접할 수 있는 시대적 행운이 가끔은 고마울 때가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잘 찍은 사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어떤 모티브와 계기로 무슨 시선으로 자신의 삶에 걸친 시간을 스스로 해석하려 하는 사진이 개인의 소사이자 이게 모여서 크게는 역사가 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찍고 싶은가? 답은 예술화이다. 무엇을 찍든 조금은 예술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얼마든지 예술이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예술이 되는 것이 없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시간을 기록해나가는 동기를 가진 자라면 충분히 예술적 사진을 만들어 내는 역량을 다 가진 거다.
가끔 그런 소리를 듣는다. "예술이 밥 먹여 주냐?"라며 예술에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이젠 틀린 말이 된 시대에 산다. 일례로 유튜브 영상을 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게 전부다 크리에이티브들이다. 유튜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찍고 무편집으로 올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의도된 것들 시청률과 광고와 편집을 의식하는 소위 머리를 굴린다. 맞다. 예술이 밥은 먹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돈을 벌게도 주기도 한다. 멋지게 예술적일 때만 가능하다. 아 이게 무슨 소리냐? 좋은 영상은 그저 나오는 게 아니다. 좀 더 재미스러운 행복과 웃김과 미소가 나오는 영상이 조회 수 대박을 터트린다. 물론 예술이 가미되면 영상의 차원이 한층 업그레이드가 된다. 맞다. 이제 예술의 욕망을 알아보는 시대가 된 거다. 다만 제대로 일 때만 가능한 예술의 밥이다. 나는 예술이 밥 먹여주냐라고 저주스러운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간다. 양아치가 목에 굵은 금목걸이를 걸고 " 형님 예술적이십니다"라는 시선도 있고 뒤샹의 화장실 변기를 예술적 새로움으로 보는 시선도 분명 갈리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가 추구하는 욕망의 덩어리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예술은 인간의 욕망에서 가장 큰 궁극이니까. 그래 어차피 한세상 지질해도 예술적으로 지질해서 찌질도 좀 근사하면 무슨 탈이 나는 것도 아니다. 요즘 카메라 한 대씩 손에 다 들고 있다. 핸드폰이 카메라 렌즈가 들어가서 찍어대는 폰 사진일지언정, 근사한 예술적인 고민을 해보면서 사진을 찍는다면, 혹시 아는가? 예술가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기만족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한 세상 내내 쪼들리게 살지라도 내가 찍는 오늘의 핸드폰 사진이 근사한 예술화될 수 있는 작가적인 고민도 해보고 사는 삶. 나중에 고민하며 찍었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훗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막 찍어도 좋다. 이 막가파적인 사진에 고민 1G라도 하면서 앵글과 프레임으로 시간을 담는 것. 바로 사진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