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이세진 / 청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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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이 책은 일기형식이다. 프랑스의 시골에 사는 할머니 잔이 아흔살을 맞아 쓰기 시작한 시작을 위한 일기가 아니라, 마무리를 위한 일기.

우울과 쓸쓸함보다는 노년의 삶에 대한 잔잔함이 담겨 있다.

정원의 꽃과 채소들, 그리고 이웃들, 친구들.

남편도 먼저 가 버렸다. 친구들과 이웃들도 하나 둘 요양원으로 혹은 있다면 더 좋을 하늘이라는 곳으로 간다.

하느님을 만나면 좋겠지만, 못 만나더라도 그것으로도 좋다. 길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으니.



잔은 우리네 할머니와도 닮았다. 전쟁을 겪었고, 새로운 것엔 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귀찮고 힘들지만 손자들과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쟁인다.

미래보단 과거가 더 많이 섞여 있는 삶 속에서, 깨어 있음보단 잠듦이 더 편한 삶 속에서도 숲 길을 걷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남들에게 기대기보단 타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 남고 싶어한다.



소소한 청소며 화단 가꾸기, 가까운 병원에 가거나 조금 먼 곳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몇 번을 와 본 길을 운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다 결국은 시골의 작은 집에 고립되어 살아 갈 것이 두렵지만, 그래도 아침에 부는 바람과 햇살이, 따스한 차 한 잔과 흙냄새가 싫지 않다.

평탄하게 살아왔음에 감사하며,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잔 할머니의 노년모습은, 당연히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할머니가 소원하는 것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가 싸우지 않기를,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길 그 욕심 하나.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들에 화가 난다. 각종 생활용품에 붙어 있는 손톱만한 스티커와 깨알 같은 글씨들은 결국 돋보기나 휴대폰의 확대기능을 통해서 보게 된다. 매번 사용법대로 왜 사용하지 않냐고 엄마를 답답해 했는데, 어쩌면 눈이 빠질 듯 사용법을 보고 있노라면 에라이, 대강 사용하자며 입에서 욕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것이 정신건강엔 또 더 나을 수도.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것, 받아들이며 남은 삶들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이다.

온갖 것들이 가득 찬 내 주변을 보며 문득, 가져갈 수 있는 건 추억뿐인걸, 그 순간 순간 느꼈던 행복의 기억도 결국은 모두 흘려버리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



이집트에선 죽은 사람의 심장과 마아트의 깃털 하나를 저울에 재 본다고 한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암마트란 이름의 괴물이 죽은 자의 심장을 먹어버리고, 결국 죽은 자는 그저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평형을 이루면 부활을 하게 된다. ) 내가 재 보고 싶은 것은 심장도 깃털도 아닌, 추억의 무게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아쉬운 일들보다, 그래도 즐거웠고 사랑했던 기억이 더 많기를.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힘든 노년의 어느 햇살 좋은 날,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길 바란다.



( 체리파이를 만들려다가 체리토마토파이를 만들어서 망치게 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

어쩌면 떠나간 사람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그 사람이있는 것 같은데 아주 멀지만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도 차례가 오면 그 사람에게로 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운 만큼 사별은 덜 슬픈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진즉에 그 길에 들어섰고 그 사람은 단지 조금 앞서갔을 뿐이기에..

마지막으로, 오솔길이나 숲으로 산책 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자갈 깔린 마당에서 잡초를 뽑아야지, 테라스 포석(鏞石)사이로 돋아난 이끼를 긁어내야지, 여름에는 저녁마다 의자에앉은 채로 물이 새는 초록색 호스로 화단에 물도 줘야 한다.
사실 내가 유일하게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나 혼자 있을때가 아니라 지루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평소에는 정신없이 흐르는 시간이 그럴 때만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겨울은 혹독하다. 걸음의 속도도 늦춰야 하고, 오래 걷지도못한다. 톱니바퀴는 뻑뻑해지고 관절은 시큰거린다. 서리와 강풍 때문에 숨이 금방 찬다. 그런 것과 싸워야만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 겨울을 잘 버티고 다시 움이 트는 계절을 보려면 기운이 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길기는 또 얼마나 긴지. 그래도 날이 짧으니까 시간은 더 빨리 가는 셈일지도……삶은 느려진다. 생활이 버거워지기 시작하고 머릿속에는 우울한 생각이 늘어난다. 공기를 쐬어줘야 잊을 수 있다. 조금씩, 놓.
을 것을 놓아버린다.
겨울을 끝까지 버텨내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권태롭더라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해야만한다.

아직 볼 것도 있고 할 일도 있지만나 이제 떠나니 보내주세요.
나의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거든요.
눈물로 나를 붙잡지 말고우리가 함께한 세월을 기뻐해주세요.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대들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과연 짐작이나 할까요.
그대들이 보여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길로 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
그대들이 꼭 울어야겠거든, 잠시만 울어주세요.
그러고 나서는 슬픔 대신 기쁨을 품어주세요.
우리는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이니까요. (……)나는 멀리 있지 않을 거예요. 생은 계속되니까요..
내가 필요하거든 불러주세요. 내가 올게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나는 그대 곁에 있을 거예요.

마음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정답고도 분명한 이 사랑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가 그대도 여기 올 때가 되거든나, 환한 미소로 마중 나가
"우리 집에 잘 왔어요."라고 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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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01 17: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흔살 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했다니!
소소한 청소 화단 가꾸기, 가까운 병원에 가거나 조금 먼 곳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몇 번을 와 본 길을 운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나이 ㅜ.ㅜ
아프지 않고 하루 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마지막 인생의 끝자락 슬픔보다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체리 파이와 치레 토마토 파이는 맛과 향의 차이가 엄청 클텐데
레시피가 궁금합니다 ^ㅅ^

mini74 2021-06-01 18:13   좋아요 5 | URL
나이가 들면 익숙한 요리들도 낯설고 두렵지만 자꾸 실수를 하지만 뭐 어때? 젊을때도 실수했는데라며 지금의 노년을 수긍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자세한 레시피가 안 나와서 ㅠㅠ

새파랑 2021-06-01 17: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쓸쓸함 보다는 잔잔함 느껴지네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추억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거 같아요. 그래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게 중요할거 같아요 ^^

mini74 2021-06-01 18:15   좋아요 5 | URL
북플에서 좋은 분들 글쓴 거 읽고 서로 으샤으샤하는 것 책 사는 것엔 서로 언제나 진심인 것. 이 모든 것들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요 ㅎㅎ

미미 2021-06-01 18: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아까 체리 먹었는데, 이 표지가 더 먹음직 스럽네용ㅋㅋㅋㅋ
잔 할머니 이야기보다 미니님 결말이 어쩐지 제게는 더 좋네요~♡
나이듦이란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이게 되는 건가 싶어요. 다시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어요!(๑•̀o•́๑)و

mini74 2021-06-01 18:17   좋아요 5 | URL
미미님 유명인사되면 일기장 경매들어갈지 모릅니다 조심해서 쓰셔야 합니다 ㅎㅎㅎ

미미 2021-06-01 18:21   좋아요 5 | URL
앗ㅋㅋㅋㅋ미니님 사람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심 저라고 생각하심 됩니다ㅋㅋㅋ

붕붕툐툐 2021-06-01 20:14   좋아요 4 | URL
체리의 계절이 다가왔네용! 저도 올해 🍒 많이 먹으려구용!!ㅎㅎ

미미 2021-06-01 20:26   좋아요 2 | URL
네♡ㅋㅋㅋ요즘 막 나오고 있는데 탱글탱글 달달합니다~🍒

붕붕툐툐 2021-06-01 2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좋아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였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제가 늙어가다보니 저절로 되는 거 같아요~ 그만큼 늙으면서 좀 더 넉넉해지고 현명해지는게 아닌가 싶어요~ 함께 책읽으며 멋지게 늙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