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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4년 11월
평점 :
최고의 스타 도슨트란 수식어가 붙는 정우철님의 책이다. 화가의 생애나 그 그림을 그리던 시기의 삶을 알게 되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느낌이다. 워낙 유명한 화가들 11명에 대한 글이라서,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은 이는 뭐야 할 수도 있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다르기 마련, 조금 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필체가 있다. 작가님의 조곤조곤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화가의 삶과 작품에 좀 더 애정을 갖게 한다. 고갱의 문제적 삶까지 아, 어찌보면 고갱도 참 힘들었구나 하며 너그럽게 품어주게 된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작가는 모이셰 샤갈,
“삶이 언제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비테포스크 고향을 그리워하며, 벨라와 충만한 사랑 속에서, 전쟁의 정점에서도 사랑을 그린 화가이다. 물론 그의 그림엔 두려움도 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 옆엔 언제나 사랑과 그림움이 함께 한다. 샤갈의 그림에선, 두려움에 맞선 사랑과 그리움의 색채가 승리하는 느낌이다. 프랑스 삼색기 색깔의 하늘과 에펠탑, 그리고 비테포스크의 암소들과 벨라의 사랑이 샤갈의 그림에 담겨 있다.
앙리 마티스,
“물감 상자를 받는 순간 이것이 내 삶임을 알았다.”
색을 가두지 않는 화가, 색의 혁명가란 수식어 속의 마티스, 그렇지만 내게 마티스는 마비가 오는 손으로도 컷 아웃기법을 통해 아이처럼 순수하게 잘라 만든 색종이 작품들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로사리오 성당의 그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 마티스의 작품들이 순수함과 경건함을 더 해줄 로사리오 성당에 죽기 전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다.
그리고 아메테오 모딜리아니
“행복은 우울한 얼굴의 천사다”
그의 연인 잔 에뷔테른. 처음 잔을 그릴 땐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리겠다면서. 그래서 그 후 모딜리아니가 잔의 눈동자를 그린 초상화를 완성했을 때, 잔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에 이것은 유럽식 화룡점정인가 따위의 생각이 났다. 아주 잠시.
프리다 칼로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에 수박 그림이 있다.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마지막에 그린 그림, 수박들 그리고 비바라비다.
그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비바라비다를 외친 그녀, 고통 자체가 현실이었던 그녀의 삶이 기록된 그림앞에서 조금은 숙연해 지는 이유가 아닐까.
로트레크
“인간은 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삶을 호기심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보아주고 존중해 준 화가다. 자신을 괴물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괴물은 그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그림들이 보여주고 있다.
케테 콜비츠
반전하면 떠오르는 판화, 바로 케테 콜비츠의 작품들이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보호하려 팔로 감싸는 모습, 굶주린 아이들, 절규하는 부모. 그것은 콜비츠 또한 자식과 손자를 전쟁에서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부터 노동자와 약자의 편이었던 그녀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다.
폴 고갱
고흐 이야기때문일까 언제나 악역담당 폴 고갱. 그렇지만 그도 어찌보면 사연 많은 사나이다.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도 잃었다. 하고자 하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처가에선 아내와 같은 방도 못 쓰게 했다. 타히티에서 만나 결혼 한 여인 안나를 불량배에게서 구하다 다리를 다쳤고, 안나는 모든 세간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 야심에 차서 발표한 작품은 쇠라의 놀라운 점묘법앞에서 주목 한 번 못받았고, 결국 죽기 위해 마지막 작품을 그린 후 마신 독약은 과다복용으로 결국 토하고 말았다. 하지만 전화위복? 마지막 작품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가 대박이 나지만, 신비로운 화가로 남아야 한다는 화상의 말에 결국 고향엔 가지 못하고, 타히티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런 그의 삶은 <달과 6펜스>로 그리고 엘튼 존의 노래로도 남아있다.
베르나르 뷔페
프랑스가 질투한 화가. 앙상하고 말라 있으며 비어 있고 건조한 정물들과 사람들은 전쟁후 본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모두 지쳐 버린 그리고 공허한 사람들, 상실과 아픔에 말라버린 사람들과 쓸쓸함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엄청난 인기를 몰고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작가의 삶과 작품에 얽힌 이야기들은 재미있다.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지만,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같다. 그러면서 작가의 삶에 안타까워하고 그의 작품들에 녹아 있는 애환과 슬픔, 그리고 남아 있는 귀퉁이의 희망을 본다.
작가들의 눈은 따뜻하다. 에곤 실레의 어지러운 핏줄같은 데생에서도 뷔페의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서도 고갱의 원색의 더 빨갛고 더 파란 그림들 속에서도 콜비츠의 지치고 슬픈 눈의 어머니에게도 진실된 위안이 담겨 있다. 그림 앞에서만은 위선도 거짓도 그릴 수 없는게 진정한 화가가 아닐까. 그렇기에 이리도 오래 사랑받는게 아닐까.
(아래 그림은 로트레크의 <침대>와 뷔페의 광대그림이다. 피곤한 하루를 마친 두 명의 매춘부들이 더할 나위없이 평온하게 잠을 청하는 그 순간, 그리고 고단한 삶에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애환이 담긴 광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