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그림들 -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조상인 지음 / 눌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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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쳐진 광목천으로 동그랗게 달님이 비친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곳, 낮 동안 해당화를 기다리던 소녀들도 달빛에 마음이 설렌다. 달빛이 비치는 한쪽 벽면, 누군가 덧붙여 발라놓은 화선지들 사이로 손가락으로 찢어 놓은 듯, 여러 갈래 길들이 만들어져 있다. 달빛들이 그 길로 그 길로 뻗어 나가, 누런 바람 거센 바닷가 초가집의 어느 촌로에게 와 닿아 숨길을 만들어 준다.
환기블루라 명칭 된 색으로 빚어진 도자기 속엔 코발트 불루의 통영바다가 찰랑인다.
(책 속에 소개된 작품들이 가득한 방, 로또 열 번 일등해도 모자라겠지? 슬프다,)
 

 

햇살이 비치는 담벼락, 아직 개화하지 못한 대추나무 가지가 죽죽 그림자들을 만들어 내는, 아직은 봄의 시작. 그 초입에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태평스레 누워 잠든 백구 한 마리.
나른하고 따듯해 보이는 담벼락 그림,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다. 오지호작가의 <남향집> 원래 처음 제목은 <사양>, 빨간 옷의 소녀는 작가의 둘째 딸이며, 누워 잠든 백구는 작가가 애지중지 하던 풍산개다.
 

일제 강점기엔 예술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왜곡과 친일의 현장에서 기어이 살아남아, 또 다시 분단의 조국 앞에 이념으로 끌려가면서도 작가들은 작품과 예술앞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고군분투와 예술에 대한 헌신은 결국 살아남아 멋진 작품들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시대를 앞서간 나혜석의 쓸쓸한 그림들, 문자추상으로 새로운 화풍과 아름다운 청자빛 푸름을 보여준 남관.
마치 프랑스 혁명의 들라크루아 그림처럼, 환희와 기쁨 그리고 두려움도 교차되는 이쾌대의 <해방고지>, 서양화풍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려낸, 그러나 월북작가란 딱지로 우리에게 꽤나 긴 세월 잊힌 화가.
과감히 프랑스로 가 <오작교> 등 동양적 사고를 접목시켜 성공한 이성자화가.
구상과 추상의 조화를 주장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김흥수 화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인상주의 화풍을, 우리 것 화 시킨 오지호 화가.
 

일본은 우리그림에 향토색을 강조했다. 붉은 산과 황토, 나무라곤 찾기 어려운 불모지 같은 조선의 모습을 통해 미개함을 강조하려 했다. 고갱의 타히티처럼 조선의 원시성과 미개함을 강조해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 한 것, 그런 향토색에 생명과 태양 같은 강인함을 불어넣어 일본의 허를 찌른 이인성화가.
누런바람과 초가집과 바다를 통해 순수한 제주도를 그려낸 변시지 화가.
동양화적 기법의 점묘그림을 그린 이대원 화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시대를 사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변관식화가.
깨진 유리를 복원해 작품을 만든 곽인식화가
 

근현대작가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이유로 폄하되고 고초를 겪으며, 의도적으로 잊힌 화가들도 많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자유를 그리며, 피난의 고달픔과 이별 속에서도 그 아픔까지 승화하며, 정치적 도구가 되길 거부하고 붓을 든다. 그들이 그리는 것은, 자유뿐만이 아니다. 이응노의 군상에서 수많은 풀잎같은 민중들의 자유로움을 위해, 이쾌대 그림 속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을 위해 혹은 늦은 밤, 지친 이들을 위로하며, 혹은 저 높은 산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말해 주고자 붓을 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위로받는다. 그렇게 용기를 얻고 또 힘을 낸다.
( 아래 그림은 순서대로 이성자, 오지호, 이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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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09 18: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림에 관한 책은 미니님~♡ 저도 찜했어요! 일제강점기에 핍박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예술에 대한 열정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요.🥲

mini74 2021-04-09 18:26   좋아요 4 | URL
그리는 것이 삶 자체인 분들 같아요 *^^*제가 세끼 꼭 챙겨먹음에 대한 열정? ㅎㅎ 죽음도 두렵지 않고. 모든 걸 버리는 것도 가능한 열정이 무엇일지 저도 느껴보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

나탈리 2021-04-09 20: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요즘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 문학과 미술이 만났을때라는 전시를 하는데, 뭔가 이 책과 한국 근현대미술과 연관되는 괜찮은 전시여서 살짝 추천드리고 가요 ㅎㅎㅎ🥰🥰

mini74 2021-04-09 21:50   좋아요 4 | URL
우와 감사합니다~~

scott 2021-04-09 20: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한국 근현대 미술 색감 구도 인물 표정이 이리도 푸근하게 느껴지다니,,,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를 자주 열면 좋겠어요.

환기 블루 ~통영 코발트 블루!!
미니님 표현력 짱!!(૭ ᐕ)૭

붕붕툐툐 2021-04-09 2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그림 담당 미니님! 올려주신 그림들 다 너무 좋아요~ 책 제목이 살아남은 그림 들이라니 넘 있어보이고, 실제로도 의런 의미를 담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