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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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

 

화이트데이를 맞아 고백 하나

 

 

좋아하는 기업이 있다

 

당신은 좋아하는 기업이 있는가기업이 만들어낸 상품을 좋아하기는 쉬워도 기업 자체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회사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르고 사탕이라도 받아보려는 심사일까오해는 금물이다.

나는 기업이라든가 경영그런 것은 잘 모르지만 어떤 가치가 훌륭한 것인지는 더듬거려 볼 수는 있다그럴리 없겠지만거대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 내느라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기업들이 지금 소개하는 기업의 홈페이지를 하루에 세 번씩 방문하면 넌 행복해지고 넌 건강해지고 넌 웃을 수 있고심지어 시험도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하여간 망설이지 말고 right now, 들어가 보기를일단 그곳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이런 소개가 뜬다답답하겠지만 어떤 기업인지 놀래 주기 위해 기업의 이름과 주력 상품을 블라인드 처리한다.

 

●●소개

○○기업 ●●는 노사관계소유구조경영방식에 있어서 민주적이고자 합니다만든 ○○의 내용과 기업의 운영 방식이 따로 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생산자와 구매자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의 상업적 수익을 늘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의 관점이 아닙니다●●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좋은 조합이 ●●의 ○○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우리가 중요시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겨우 <소개>를 읽고 감동해서는 곤란하다그 옆에 있는 <살림살이>라는 메뉴를 보자이곳에는 기업 내부에서만그것도 볼 수 있는 사람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입 지출]이 상세하게 공개되어 있다숫자로 어지러운 보고서 밑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도 잊지 않는다다달이 올라오기 때문에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지난달의 현황이다.

 

판매는 지난달에 비해 줄었지만 외주제작으로 인해 수입은 2천만여 원가량 가량 늘었습니다하지만 밀린 4대 보험과 인쇄비 미지급분을 처리하느라 지난 달보다 지출 비용이 2배 가까이 올랐네요.

(중략) 그리고 출시된 지 5개월이 지난 ○○가 출시 때보다 더 높은 판매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어디서 반응이 촉발된 건지 알기 힘든 상황이 영업자로서 좀 답답하긴 하지만다이어트와 성형 등의 문제의식이 좀 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렇다면 문제이곳은 어떤 기업일까?

바로 바로 바로도서출판 후마니타스이다블라인드처리한 ○○는 출판혹은 도서를 넣어서 읽으면 된다●●는 물론 후마니타스이다후마니타스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면 오늘부터 알면 된다노파심으로 말해두지만 나는 후마니타스와 아무 관련이 없다이런 책은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지 궁금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봤을 뿐그 후로 가끔 들러 읽었던 소개를 읽고 이번 달은 적자가 아닌가살펴보기도 한다.

 

후마니타스의 소개에서 어떤 부분에 가장 놀라웠느냐면은바로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아닙니다.' 라는 부분에서였다사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곳이 대부분의 기업 아닌가그들은대체누구를위해서 그런 희생을 발생시키는 것일까설마 소비자를 위해서맙소사책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는 훌륭한 제품에 가려진 희생을 추적한다소비자는 달콤하거나(네슬레콜라편리하거나(구글마이크로소프트애플그리고 우리의 건강을 챙겨준다는 것이나(노바티스 등이상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게 내 주변에 머무는다양한 분야의 세계 50개 기업의 윤리보고서를 작성한다.

 

2. 윤리보고서의 기준

리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제목에 맞춰 집중하기로 한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들어가기 전에 세계 50대 기업에 삼성전자가 들어있다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실을 알린다리뷰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삼성전자는 서운해 하지 말길.

일단 등급평가를 어떤 기준으로 이뤄질까저자는 지속 가능성의 주제중요한 윤리적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세 평가기관의 자료를 이용했다뮌헨의 외콤 리서치취리히의 지속가능성 평가기관 SAM, 암스테르담 서스테널리틱스가 바로 그것이다이들의 기준을 간단하게 알아보면외콤리서치(와콤이 아니다)-사회문화자연에 대한 친화성을 기준으로 평가사업 부문에 따라 가중치가 다름. SAM-경제환경사회적 요소가 일정한 역할지속 가능한 경제적 능력도 포함서스테널리틱스-환경사회적 요소기업 경영의 세 분야를 평가한다고 한다.

 

알파벳 평가와 함께 신호등 평가를 첨부해서 등급을 메기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평가기관들도 대부분 공개된 자료에 의존해 평가할 수밖에 없어 객관성의 한계를 지닌다공개된 자료는 대부분 자사가 낸 보고서이기 때문에그리고 또 하나 특별한 문제가 있는데바로 기관들의 등급 평가-업종 최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기업은 비록 해당 분야가 전체적으로 큰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어도 좋은 점수를 받는다. 59' 이것의 문제는 예상 가능하다.

 

가령 원칙적으로 성능이 굉장히 우수한 자동차가 대부분 불필요한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사실은 가려지고그와 함께 제약 회사가 많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사실도 가려지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책에서는 <업종 최고>기준에 따라 평가를 내리기보다 전 분야의 윤리 문제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한테 정말 어떤 제품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고자 한다. 60

 

참고로 50대 기업중 페이스북은 빠져있는데이 이유를 저자는 쿨하게 고백한다. '평가를 포기했다'.


페이스북에 대해서는 자체 평가를 포기했다이 기업이의도적으로 판단을 보류해 놓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별점 다섯 개를 받은 기업은 한 곳밖에 없다. 60

 

평가포기이것은 우리가 공평무사하게 윤리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 새롭게 생기고 있는 부딪혀야 할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3.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본격적으로 애플에 대한 평가에 들어가자애플은 평점 별 세 개를 받았다아주 좋은 숫자는 아니나 그렇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애플이 처한 윤리적 문제는 우선 하청업체에 대한 것이다.

2012년 5월 애플의 발표에 따르면 하청 업체 직원의 95퍼센트가 한 주에 60시간을 일한 것으로 드러났다그러니까 국제적 최저 기준만 간신히 지키는 수준이었다. 204

 

애플의 발표를 따랐을 뿐인데, 직원 대부분이 한 주에 60시간을 일한 것이다저자는 그래도 국제적 최저 기준을 간신히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이런 내부 문제를 보고하는 것을 고무적(!)이라고 평가한다불필요한 의심일까? 60시간은 줄이고 다듬어진 60시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런 내부 문제의 보고 중 중개인들이 개입하는 <비자발적 노동>에 대한 보고를 예로 든다.

 

<비자발적 노동>에 대한 보고가 한 예다비자발적 노동이란 중개인들이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수수료를 갈취함으로써 사실상 중개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억지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따라서 애플은 만일 중개업자들이 청구하는 비용이 해당 노동자의 한 달치 세후 월급을 조과하면 그 초과된 돈은 모두 하청 업체가 지불하도록 했다이것은 중개업소를 거쳐 중국 내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베트남 출신의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다. 204

 

다시 정리하자비자발적 노동말 그대로 자발적이지 않은 노동이다이주노동자들이 받는 처우다내 손에 쥐어있는 스마트한 아이폰은 그런 노동 위에 지어져 있다이 책은 기업의 윤리 상태를 체크하게 하면서나의 소비 또한 돌아보게 한다최저의 돈으로 최상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소비의 윤리 아니던가싸고 질 좋은 물건을 구입한 현명한 자신을 토닥이지만 그러한 값이 나오게 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가격 뒤에 숨어있는 노동의 댓가윤리적 소비란 이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애플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2010폭스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폭스콘 노동자 연쇄 자살사건폭스콘은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생산하는 주요 공장이다공장에서는 작업중 동료들 간의 대화 금지화장실도 5분 내로 다녀와야 하고식당에서 밥을 남겨도 별점을 매긴다세 번 적발 시 해고라고 한다기사에 따르면 '열한 번째 투신자가 발생하자 기숙사 옥상에 3미터 높이의 철망과 아래쪽에 추락 방지를 위한 이른바 사랑의 그물을 설치하고 심리 상담사를 배치하는 것 외에 근본적 해결책은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이 내용은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사랑의 그물이라니노동자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 그물을 설치한다니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심지어 노동자들이 고액의 배상금을 노리고 투신한다며노동자들에게 앞으로 자살이나 자해에 대해서는 회사가 배상하지 않는다는 협의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가 엄청난 반발로 바로 폐기해야만 했다'는 내용이다이후폭스콘과 애플에 대한 비난과 규명을 요구하는 각계의 목소리가 높다이 중영국 가디언의 주말판 <옵저버>의 사설을 소개한 프레시안 기사를 눈여겨볼 만하다. '애플 아이폰을 중심으로 논쟁이 커지고 있지만근본적으로는 세계화가 불러온 노동자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것.

 

기업의 윤리 프로필은 하나의 기업 두 장 반-세장의 분량을 차지한다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이 일부를 독자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윤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애플과 폭스콘자살 사건 모두 오늘 알게 된 일이다책으로 말미암아화려하고 달콤하고 편리함에 가려진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보이는 것에 가려지는 눈을 뜨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소비를 바꾸는 것은 생활을물건으로 연계된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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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기린과숲 e시선
김언 / 기린과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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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시간 모르게-김언,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기린과숲.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세계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세계내가 아무리 들어가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죽어있기 때문이다. 189쪽의 24번째 줄은 천 년후에 펼쳐도 189쪽 24번째 줄이다책은 형태를 갖추면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움직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아무리 읽어도 변하지 않는다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음흉한 미소경주를 하기로 했는데달리지 않는다영원히.



 

전자책을 처음 읽는다행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경악금치 못했다움직이는 글자로 어지러웠다글자 크기에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글자의 수가 다르다원형을 알 수 없다책이 사진이라면이것은 영상이다행갈이가 달라지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를 읽을 수 있다전자책의 특성 때문이었을까한 행이 한 연이다.


솔직한 감정이 그랬다무엇이든 처음 보면 놀라기 마련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책의 처음도 그랬겠지 싶다오감으로 읽히던 이야기를 오직 시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잉크로 엮어야 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처음에 저런걸 누가 보냐고 했겠지전자책의 처음도 그랬다면시작이 나쁘지는 않다나는 책을 쥔 적도 없이 불러내서 보고 다시 꺼트린다메신저로 이뤄지는 하루의 조용한 대화가 그렇듯이창을 키면 나타나고 끄면 사라진다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그것은 이제 일상이니까.

 

그렇다면 시집으로써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는 어땠을까아버지와어떤 세계그리고 그 안에서 분투하는 나로 정리하면 너무 성글려나우선자화상에서 나타난 그림은 제목을 배신하고 '아빠'이때 아빠는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데, '아빠가 된 나'와 '화자의 아빠'가 그것이다이 시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자화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는데, 자화상은 내가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나를 그린다는 핑계로 자신을 학대하는 그림이라는 생각.

 '첫 줄을 읽어보면 알지 이 얼굴이 얼마나 못생긴 그림인지//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개도 못 알아보는강렬한 조소낯선 것은 문장을 그림이 아니라 문장으로 그렸을 뿐이다이후 계속되는 '아빠가 된 나대한 관찰을 살펴보자. '이 표정을 네 살배기 우리 딸애는 단번에 알아 차렸지 이건 아빠//이건 못생긴 이건 집에는 없는 물건이라는 걸신랄하다집에 없는 물건이 아빠의 큰 특징이라는 걸그러나 이것은 '나의 특징'이 아니다아빠가 된 나네 살배기 딸애의 존재로 하여금 '되어 버린아빠가 짓는 표정이다.

'이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너도 알고 나도 아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신기하게도 다시 튀어나와서 짖는다 옆집의 개처럼//대문 밖에만 나서면여기옆집의 개처럼 짖는 물건대문 밖에만 나서면 큰 소리를 내는 물건그러나 그것은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슬그머니 떨어지는 한 장의 아빠화자의 아버지가 보이는 대목이다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던 아빠의 속성을그 지저분한 속을 다 들어내지 않고도 두 집 안의 역사풍경냄새를 훑는다불안정한 고요가 흐른다모두 '자화상'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있을까. '아빠가 된 나'를 내가 이해하면서 '자신의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시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이것을 읽는 이에게서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친다


자화상으로 슬몃 보였던 화자의 아버지는탄생의 비밀에서 구체화된다그러나 주머니를 쓰고 있어 형체는 보이지 않고 무게와 질감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새벽에 깨어서 들었던 이웃집의 부부싸움 소리를 들려'준다아마도 태내에서 들었을 소리를 꺼내 주었다는 것 같다그리고 후에는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옆집의 부부를 향해서//어서 주무세요벽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협박'하는데불구하고 '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얇아진 것이다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투명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지막에는 급기야 '여자는 젖을 물리며 내가 태어날 날짜를 곰곰이 따져'본 것으로 끝난다젖을 물리며 태어날 날짜를 따져보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 눈밭에 눈이 쌓여 있었', '그걸 본 아버지가 한여름 날의 늦은 오후로 옮겨놓았다육개월빈 공백그래서 탄생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런것은 비밀로 남겨둔다는 듯 나간다이해가 부족한가그러나 어떤 것은 다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라는 물음표만 가져도 좋지 않을까희한하게 교차한 시간의 모습을 감지 할 수 있다면, 혹은 '눈밭에는 눈이 내리'는 당연한 현상같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면.


다음에 도착한 곳은, '어떤 세계'그곳은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시의 첫 구절,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과 포즈를 취한다김언은 짧게 쓴 시만 모았다며 바람도기대도 없는 시집이라고 했으나독자의 기대는 다르다. 여기 가장 단순한 언어로 세계의 포즈를 잡아채는 모습을 부려 놓았으니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고층보다 더 높은//고층에서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를//위로하고 어떻게 변명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왜 궁금하지 않을까. '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우리는 드디어 엇갈렸다아주 멀리서.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바랐다는 것처럼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가까워지려는 것이 아니라완전히 엇갈리기 위한 준비였다엇갈림은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가? 그러나 엇갈림은 아주 멀리서 일어난다.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저 이상한 세계를 대하는 김언의 태도는 엇갈리는 포즈를 그려내는 것 뿐일까시집 말미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시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우리들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 또한 완강히 거부하니까//뿌리도 없고 하늘도 없는 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희망찬 전복물론 이것의 전제는 실현 '불가능'하다. '거북이처럼 명랑한 동물을 만들어낸다면//사람 대신 물건이나 팔까 싶어요이 시처럼//행동하지 않는 역사를 언젠가는 증명해낼 겁니다.//아무리 귀에 가까이 갖다 대어도 빗나가는 총알을. 「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총성을저 시끄러운 폭음을 잠재울 방법은 '모든 구멍은 결국 악기가 되는 법을 거부'하는 것 이라고 예언한다모든 구멍혹시 당신의 입까지 말하는 것일까봐 두렵다그렇다면 그곳은 시 마저 숨통을 끊은 곳일 테니까.

 

소시집은 이토록 위험한 경고위험한 상상위험한 협박으로 시를 닫는다그렇다면 다음은더 무시무시한 경고일까. 지금까지백 년 동안의 근황이었으니이제 그의 '근황'을 채근해 볼 차례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지만실은 아주 가까이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사라지는 시간 모르게 말이다. 한순간, 우리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포즈를 취했던 것을 상상해 본다. 멀어지는 것으로 사라지고, 엇갈림 밖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는 것을 기억해본다. 그것은 '눈밭에 눈이 날리는' 것처럼 당연한 풍경이었을텐데, 왜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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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이었군요. 전 소설집인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행간이 변하는 전자책이라...
후훗, 저도 몇 번 읽어보려고 시도를 했는데 죽어도 전 못 읽겠더라고요.
사실 제 독서 버릇은 종이 질을 느끼는 행위에 가까웠어요. 손끝으로 종이 결을 만지고 밑줄을
긋고,,,, 그런 손 감촉들이 좋아서 책을 읽은 것 같기도 해요....

봄밤 2014-03-14 17:25   좋아요 0 | URL
곰발님과 제 이야기를 종합하면, 책을 읽는 것은 '안심'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여기 있다는 느낌. 전 사실 책에 밑줄을 긋거나 접는 것을 불과 일년 전에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 전에는 그 상태 그대로 두었어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요. 이제는 활발하게(?) 밑줄과 접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집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불과 12점 밖에 안되는 시가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전자책을 읽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다른 것은 몰라도 시가 전자책으로 독자와 소통을 잘 할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읽기에 도전 할 생각입니다+_+!
 
연필 깎기의 정석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프로파간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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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을 보고 진짜 기절초풍했어요! 그런데 질문 있는데요,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열대 과일은 뭐예요?

-나일라(Nailah, 초등학교 3학년생)


나일라가 내 감상을 아주 잘 말해주었다. 연필 깎기의 정석은 이런 책이다. '그런데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열대 과일은 뭐예요?' 묻고 싶어지는 것. 나일라는 귀엽게도 이렇게 말한다. 연필 깎기 잘 봤구요! 이제 아저씨가 좋아하는 걸 알고 싶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연필 깎는 이야기만 나오므로 당연히 열대 과일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것이지. 혼이 담긴 연필 깎기를 보면서 아, 이 장인은 대체 뭘 먹으려나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하게도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아주 적절한 질문이다. 그냥 과일도 아니고 '열대 과일'로 한정해서 물어본 것은 당해낼 수가 없다. 나일라는 장인이 즐겨먹는 과일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없다면 자신이 구하기 쉬운 것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왜 <연필 깎기의 정석>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고 나일라의 '고객 증언'에 대한 이야기만 쓰고 있느냐고?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다 읽고 나면 더이상 '연필 깎기의 정석'이 궁금하지 않고(다 알게 된것 같으니까), '연필 깎기의 정석'에 대해서 말하는 이가 궁금해진다. 이 설명이 그래도 너무 하는 것 같다면, 기대를 저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말해둔다.


책 중간쯤 가면 '폭포에서 연필 깎기'가 나오고 마지막 장에 이르면 대망의 '마음으로 연필 깎는 법'이 나오는데 모든 과정을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사진이 과정을 따라서 친절하게 곁들어져있다. 사진은 흑백인데 어찌나 생생한지 장인의 혼이라든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도저히 '나는 못하겠어'라고 잡아 뺄 수가 없다. (시도해 볼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한번도 못 본 데이비드 리스가 좋아하는 열대 과일이 무엇인지 계속 궁금해 지는 것이다. 오렌지? 바나나? 이쯤되면 집념을 이해할 거라 믿는다. 가련한...그러나 나일라는 알테지


굴러다니는 연필 한타를 모아놓고 노려본다. 엄지손가락에 가해질 수도 있는 무리를 예방하기 위해 몸푸는 동작은 필수다. 무엇보다 연필을 깎으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연필의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모른척 해야 한다는 것이다연필 끝에 매달린 지우개 말이다! 연필의 비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는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에 대해선 '미스터리'라는 네 글자로 일축하고 책의 어디에서도 더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에 연필 깎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우리 모두 모른척 해야 할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모름지기 장인이 가져야 할 태도일 것이다. 장인은 비밀의 끝까지 달려나가 캐내고 마는 이가 아니라, 비밀을 소중하게 잊어버려 마침내 지켜내는 이니까 말이다.




꾸밈없는 담흑빛의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가

숙명의 포물선을 그리며

폭풍우 속에서 균형을 잡네.


엘리너 와일리(Elinor Wylie), 「나의 영혼에 부치는 시」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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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제목부터 흥미진진합니다. 저도 가끔 연필을 깎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해 칼질을 합니다. 제 목표는 항상 칼로 연필을 깎되 연필깎기 기계에서 뽑아내는 것과 똑같이 둥글게 깎을 것이었거든요...

봄밤 2014-03-13 16:33   좋아요 0 | URL
그런 깎기를 추구하신다면 이 책을 보셔야 합니다. 도움이 될지도...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출판사 프로파간다는 이런 희한한, 통념을 보기좋게 빗나가는 책을 내더군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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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책-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그는 말수가 적었다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투명한 눈망울이나 의미 없는 고개짓, 그늘진 등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일이 어리석다고도 했다그래서 말이 많은 곳에서는 그를 찾기 어려웠다시끄러운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그들은 대개 없어진 무엇을 찾느라 분주했다없어진 것에 대한 관심이 끊길 때 비로소 그는 옷깃을 털며 오후를 걸었다.


-진실이 산책하는 법



 


진실이란 말수가 없어서 거짓말 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다구로프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사랑이 진실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들은 거짓말 할 가능성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272> 둘만의 만남둘만의 시간둘만이 기억하는 곳. <지금 기온이 3도인데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271> 라고 구로프가 말하는 것은 실은 ''을 빌려 딸에게 '나는 이곳에 있지만 실은 다른곳에 있단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다정하면서 명쾌하다길 걷는 사람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과그 구름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다르니까구로프와 안나가 비밀스럽게 만나는 곳에서도 사람들을 분명히 만나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구로프와 안나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과 같다땅에 있는 우리는 이곳에 눈이 내리거나 내린다고 해도 하늘의 일은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지금 기온이 3도가 아니라 30도라고 해도 하늘 꼭대기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흔하고 뻔한 불륜에 진실의 장관설을 늘어놓는 것은우리가 지치는 일은 대게 진실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실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짐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말해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비로소 '진실'할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말을 할 가능성을 갖는다진실조차도. 그래서 위태로운 삶이다. 구로프가 자신의 비밀을 정당화 하면서 다른이들 역시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272

 

구로프는 안나와 바닷소리가 평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평온 자체'일 것으로 보이는 바다에 빠지지는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에. 구로프는 바닷소리에서 영원에 대한 '비밀'을 감지하지만, 바다와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매미들이 울고 있었다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렇게 아래에서는 바닷소리가이곳에 아직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지금도 울리고 있고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262


안나와 헤어진 구로프는 돌아와 저녁을 먹어야 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해야했다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그곳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이 모두 열중한다그리고는 구로프에게 장소와 시간에 어울리는 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이렇게. <조금 전 당신이 한 말이 옳았소그 철갑상어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어.> 머리 속에는 온통 안나와안나를 만났던 바닷가 생각 뿐이지만, 그는 중요하지도 않은 '당신'에게 비유 맞추는 말을 짜내고 있다유연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대화가 동시에 원하는 세계에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운다스스로에게 구로프는 환멸을 느낀다. 그때 들었던 바닷소리에 삶의 비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온 자신이 지겨운 것이다.


평소에 하던 이 평범한 말이 어쩐지 갑자기 구로프를 짜증나게 했다이 말이 모욕적이고 불결하게 여겨졌다얼마나 야만적인 습관들이며 야만적인 사람들인가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미친 듯한 카드놀이,폭식폭음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도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실없는 농담뿐이다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266

 

구로프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나는 것은 '이곳'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자신에 대한 환멸을 거두고, 거추장스럽게 자신을 말해줬던 구로프를 떠나고 싶다. 그렇다면 삶의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자신이 모르는 구로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오랫동안 '안나'로 불행했던 안나 역시 주저하지만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벗어남은 불안정해 보인다. '공개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평온을 이야기 하는 바다를 듣는 것. 그리고 평온 자체인 것만 같은 바다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알려진 나를 두고 오는 것은 감수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용기있게 내던졌다고 하자. 이중의 삶 하나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다시 '나'와, '좀더 나'인 것으로 분리해 나갈 것이다. 삶이 온통 진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언제나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하다. 안전한 곳으로 나를 피신하는 동안 다른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진실하다.


추측이 난무하지만 소설은 끝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페이지에는 없지만 저들은 우선 옷을 가볍게 하는 것 같다. 질주 하려는데 3피스 정장과 모자바닥에 끌리는 치마와 양산은 필요 없으니까.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와 어울리는 옷을 입고. 그곳에 도착하면 미봉책이나마, 진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깊게 입맞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거짓과, 그 거짓들의 틈에 끼여있는 진실로써 숨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적한 바닷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 개 이름을 물어보고싶다. 진실은 궁금하지 않다. '공개된 나'의 가벼움에 조소를 거두고 오늘은 이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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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허락과 무관하게-침묵의 거리에서




1제곱은 선이고 2제곱은 사각형, 3제곱은 입방체를 의미한다. 
이보다 더 큰 지수를 도형으로 시각화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자연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지수에 관하여 남긴 말*



그러나 허락되었건 금지되었건 간에, 4 제곱(제곱의 제곱)과 6 제곱(세제곱의 제곱)은 존재가 인정되었다카르다노 역시 5차, 7차 등의 거듭제곱을 다루면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고차원 거듭제곱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기하학적인 해설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과 사각형, 입방체로 대응되는 3제곱 이상의 것은 머리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 고차원 거듭제곱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알리는 수학의 목소리다.  

책 『침묵의 거리에서』의 '어떤 죽음'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말한다. 학교와 집, 친구와 가족이 세계의 전부처럼 보여 죽음의 인과 또한 그처럼 간단해 보이는 중학생의 죽음이라도 말이다. 중고등 학생의 사고 뉴스를 보면서 시기를 지나온 어른들은 그들의 죽음을 쉽게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왔기 때문에 이 짐작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쉽사리 이해할 수도, 이유에 닿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작가의 말에 쓰고 있듯 이것은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 왕따'가 소재다.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이보다 다면적이고 치밀하게 추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은 아이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역'을 통찰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한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 평범한 서술이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리한다.

농협 시설도 일류 기업 못지않았다. 옛날부터 지연이며 혈연이 강세인 지역이고 사찰이 큰 영향력을 가진 까닭에, 전통 있는 단가는 마을 유지로써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곤 했다. 농협과 절, 그리고 보수 정치.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지방의 풍경이다. 공무원 채용도 공정하게 이루어진 전례가 없었다. 선거법 위반도 늘 있는 일이었다. 1/27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은 월급 생활자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역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겨, 전체주의적인 풍조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가을 축제 보조금은 벌써 5년 연속 최저액을 경신했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서 중학생들이 담배를 피워 대도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이 변화 또한 전형적인 지방 풍경이었다. 1/28

작은 지방에서 일어난 중학생 죽음을 수사하는데 지역이 어떠한지 원거리에서 바라본다. 중학교가 작아서 4반 밖에 없고 근방 2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그대로 진학하는 것,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과 이것을 수사하러 온 형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점 등은 마을이 얼마나 집약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알린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아이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 된다는 흰트를 얻는다. 게다가 죽은 아이의 부모가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포목상을 운영한다는 설정까지. 피해자 부모는 아이의 죽음 이후 학교를 압박한다.  

밑그림을 그린 후, 사방에서 아이의 죽음을 설명하고자 서로 다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죽음을 조사하고, 밝히고, 정리하려는 이는 모두 다른 '위치'에서 온다. 모두들 '정의'롭고 싶다. 정의가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죽음이 일어난 곳엔 그 연유를 밝히는 것이 단 하나의 정의여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 나오는 이들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른 바람을 갖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 정의'를 내걸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죽음(사건)도 본질에 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 담임 선생님은 아이의 죽음이 '사고'이기를 바란다. 죽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아이들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면적이다. 조금더 들어가 보면 이 사고가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때 그 무게가 감당 되지 않는 것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2. 가해자-로서 조사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사건과 자신의 아이를 분리한다. '상해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거기까지'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가 내몰았을지 모르는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경찰을 '위험'으로 규정한다. 그곳에서 '보호'하려고 한다. 파렴치한가? 그렇다면 이들의 정의가 틀렸다고 할것인가? 명확한 증명이 있을때까지 이들에게 정의는 이것 하나뿐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구출해내는데 촉각을 내세운다. 이 촉각이 두드러질수록 애도가 옅어진다. 자신의 아이의 친구가 죽었는데도, 슬픔은 마음에 미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죽은 아이는 물론, 자신의 아이가 가해자로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회사일이 먼저인 남편이 그려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가족이 더이상 끈끈하며 하나의 목적과 사랑을 갖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으로서의 삶이 먼저다. 

[남편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 갔다. 시게유키는 이번 일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니구라 가족에 대한 대만 해도 그랬다. 아버지라면 아이가 돌아오자마자 그 집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겐타와 함께 고개
를 숙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어째서 가족을 지키려 하지 않는 거지. 1/355

3. 그런가 하면 경찰들은 그날 지붕 위에 나 있던 발자국, 그 아이들에게만 집중한다. 죽은 아이가 가졌을 관계의 가지수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을 구속 수사하는 것은, 이들로 한정하기 때문에 이미 실패라는 조짐이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지붕에 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이들에게 괴롭힘 받은 상해흔이 몸에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추락사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이렇게 명확한 죽음이라니 말이다. 정황이 뚜렷한 죽음 앞에서 경찰에게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에게 중학생은 우선 거짓말을 쉽게 해서 수사를 어렵게 하는 대상이다. 이들이 혹여라도 느낄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영웅심리'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4. 이것을 취재하는 기자는 사건을 쓰지만 '쓴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감추지 않는다. 난처하게도 자신이 취재한 것이 1면에 실린다는 흥분도 있다. 자신의 기사가 무엇을 더 환기할 수 있을지,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기사화가 된다. 그러나 사건의 '알림'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는 '죽음의 정의'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보는 정의'가 깃들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선의 '정의'에 혼동하기 쉽다. 나의 가치 역시,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책의 전반적인 목표라면, 책의 백미白眉 학생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한 세계를 자세하게 써내려 가는점이다. 가해자-피해자가 쌍방의 관계에서만 불리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피해자(죽은 아이)는 가해자로 불리는 아이에게서는 피해자로 불렸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을 내버려둔 가해자로, 또한 피해자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보다 더 어리고 허약한 아이를 괴롭힌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또래 세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쉽게 저버리면서 어른을 끌고 들어온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에게서 따돌려졌던 '캠프에서 일'은 그것을 고자질한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은 아이들만의 세계를 모르는척 눈감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했다. 자신이 정말 슬프다며 훈계하는 장면은 막막하다. 슬프도록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정말 슬프다. 왜 아무도 규칙을 어기는 걸 말리지 않았지? 왜 아무도 선생님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 아무도 안 할 게 당연하잖아. 도모미는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면 선생들은 자기가 중학생일 때 어른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거야? 만일 그렇다면 정말 왕재수 아냐. 중학교 다닐 때 일은 벌써 잊어버린 거냐고. 2/168]
선생은 슬픈 훈계로 아이들만의 세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아이를 일방적으로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밖에 죽은 아이가 외동이었으며, 부자인 까닭에 또래보다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고 그것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거나 권력으로 이용(되었던)했던 장면이 세세히 적힌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그저 '불쌍한 아이'로 단정짓는 것을 피한다.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죽음의 연유를 밝히는 것만큼이나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일본에 리갈하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법정드라마를 표방하며 사회의 폐부를 유쾌하게 비트는데, 스페셜로 다뤘던 테마가 중학생 이지메 사건이었다. 겉으로는 유쾌한 드라마여야 하기 때문에 아이는 건물에서 떨어져 다친 것으로 설정된다. 아이가 다쳤다는 점을 빼면 놀라울정도로 책의 시선과 비슷하다. 책에서처럼 왕따문제를 깊게 다루지 못했지만 거의 같은 부분을 노려보았다. 이곳에서는 우선 교사가 이지메를 알았느냐에 최대 중점을 둔다. 그렇다면 가해자로 지목되는 아이들보다 학교에 책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중학생 이지메 사건을 말하면서 학교의 은폐, 내부고발, 가해자로 지목된 불량해 보이고(덩치 큰) 아이는 과연 리더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괴롭히는 아이의 리더를 찾는 것은 매우 부질없는 짓이다. 중학생 아이들은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60)

다친 아이의 배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배금주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후, 놀라운 말을 듣는다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맞고, 왕따였던 것도 맞았으나, 건물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다쳤던 아이 자신이 직접했다는 . 괴롭혔던 아이들의 성화를 진실이라고 밝혀내 수사가 끝났으나, -다친 아이는 전학을 가고, 배상 받은 돈으로 가난한 집을 이사한다- 그럼에도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진실이었다. 5제곱근과 7제곱근이 자연의 허락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진실이 있는 장소는 그려지지(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도 이와 비슷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 책을 덮고 취할 수 있는 포즈는 '허탈'이 아니다. 밝혀지고 '있다는' 모든 사건에 거대한 상상 불러오는 것. 상상력을 (이미)허락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허락과는 무관하게, 형체로 현 수 없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가 있다. 우리에겐 그것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언제나 조금 더 필요하다.   



*, **배리 마주르, 『허수(시인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수학적 상상의 세계)』, 승산, 2008.

***연기파 국민배우 사카이 마사토 주연. 일본 후지TV 

: 1/12 = 1권 1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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