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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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봉책-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그는 말수가 적었다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투명한 눈망울이나 의미 없는 고개짓, 그늘진 등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일이 어리석다고도 했다그래서 말이 많은 곳에서는 그를 찾기 어려웠다시끄러운 곳에는 사람이 많았고그들은 대개 없어진 무엇을 찾느라 분주했다없어진 것에 대한 관심이 끊길 때 비로소 그는 옷깃을 털며 오후를 걸었다.


-진실이 산책하는 법



 


진실이란 말수가 없어서 거짓말 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다구로프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나 세르게예브나의 사랑이 진실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들은 거짓말 할 가능성을 만들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272> 둘만의 만남둘만의 시간둘만이 기억하는 곳. <지금 기온이 3도인데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271> 라고 구로프가 말하는 것은 실은 ''을 빌려 딸에게 '나는 이곳에 있지만 실은 다른곳에 있단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다정하면서 명쾌하다길 걷는 사람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과그 구름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다르니까구로프와 안나가 비밀스럽게 만나는 곳에서도 사람들을 분명히 만나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구로프와 안나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것과 같다땅에 있는 우리는 이곳에 눈이 내리거나 내린다고 해도 하늘의 일은 짐작할 수 없는 것처럼지금 기온이 3도가 아니라 30도라고 해도 하늘 꼭대기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흔하고 뻔한 불륜에 진실의 장관설을 늘어놓는 것은우리가 지치는 일은 대게 진실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실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짐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말해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비로소 '진실'할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말을 할 가능성을 갖는다진실조차도. 그래서 위태로운 삶이다. 구로프가 자신의 비밀을 정당화 하면서 다른이들 역시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272

 

구로프는 안나와 바닷소리가 평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평온 자체'일 것으로 보이는 바다에 빠지지는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에. 구로프는 바닷소리에서 영원에 대한 '비밀'을 감지하지만, 바다와 거리를 좁히지는 않는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매미들이 울고 있었다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렇게 아래에서는 바닷소리가이곳에 아직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지금도 울리고 있고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262


안나와 헤어진 구로프는 돌아와 저녁을 먹어야 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해야했다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그곳에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이 모두 열중한다그리고는 구로프에게 장소와 시간에 어울리는 말을 끊임없이 요구한다이렇게. <조금 전 당신이 한 말이 옳았소그 철갑상어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어.> 머리 속에는 온통 안나와안나를 만났던 바닷가 생각 뿐이지만, 그는 중요하지도 않은 '당신'에게 비유 맞추는 말을 짜내고 있다유연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대화가 동시에 원하는 세계에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운다스스로에게 구로프는 환멸을 느낀다. 그때 들었던 바닷소리에 삶의 비밀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을 떠나온 자신이 지겨운 것이다.


평소에 하던 이 평범한 말이 어쩐지 갑자기 구로프를 짜증나게 했다이 말이 모욕적이고 불결하게 여겨졌다얼마나 야만적인 습관들이며 야만적인 사람들인가정말 의미 없는 매일 밤이고흥미도 가치도 없는 나날들이다미친 듯한 카드놀이,폭식폭음끝없이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쓸데없는 일과 시시한 대화로 좋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도 결국 남는 것은 꼬리도 날개도 잘린 삶실없는 농담뿐이다정신 병원이나 감옥에 갇힌 듯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266

 

구로프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나는 것은 '이곳'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자신에 대한 환멸을 거두고, 거추장스럽게 자신을 말해줬던 구로프를 떠나고 싶다. 그렇다면 삶의 '비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자신이 모르는 구로프를 찾아 떠나는 여행, 오랫동안 '안나'로 불행했던 안나 역시 주저하지만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벗어남은 불안정해 보인다. '공개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평온을 이야기 하는 바다를 듣는 것. 그리고 평온 자체인 것만 같은 바다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알려진 나를 두고 오는 것은 감수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용기있게 내던졌다고 하자. 이중의 삶 하나를 버린다고 해도, 나는 다시 '나'와, '좀더 나'인 것으로 분리해 나갈 것이다. 삶이 온통 진실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언제나 조금 더 안전한 곳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당하다. 안전한 곳으로 나를 피신하는 동안 다른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진실하다.


추측이 난무하지만 소설은 끝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페이지에는 없지만 저들은 우선 옷을 가볍게 하는 것 같다. 질주 하려는데 3피스 정장과 모자바닥에 끌리는 치마와 양산은 필요 없으니까.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와 어울리는 옷을 입고. 그곳에 도착하면 미봉책이나마, 진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깊게 입맞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거짓과, 그 거짓들의 틈에 끼여있는 진실로써 숨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적한 바닷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 개 이름을 물어보고싶다. 진실은 궁금하지 않다. '공개된 나'의 가벼움에 조소를 거두고 오늘은 이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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