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허락과 무관하게-침묵의 거리에서




1제곱은 선이고 2제곱은 사각형, 3제곱은 입방체를 의미한다. 
이보다 더 큰 지수를 도형으로 시각화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자연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지수에 관하여 남긴 말*



그러나 허락되었건 금지되었건 간에, 4 제곱(제곱의 제곱)과 6 제곱(세제곱의 제곱)은 존재가 인정되었다카르다노 역시 5차, 7차 등의 거듭제곱을 다루면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고차원 거듭제곱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기하학적인 해설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과 사각형, 입방체로 대응되는 3제곱 이상의 것은 머리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 고차원 거듭제곱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알리는 수학의 목소리다.  

책 『침묵의 거리에서』의 '어떤 죽음'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말한다. 학교와 집, 친구와 가족이 세계의 전부처럼 보여 죽음의 인과 또한 그처럼 간단해 보이는 중학생의 죽음이라도 말이다. 중고등 학생의 사고 뉴스를 보면서 시기를 지나온 어른들은 그들의 죽음을 쉽게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왔기 때문에 이 짐작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쉽사리 이해할 수도, 이유에 닿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작가의 말에 쓰고 있듯 이것은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 왕따'가 소재다.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를 이보다 다면적이고 치밀하게 추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은 아이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지역'을 통찰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한 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 평범한 서술이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리한다.

농협 시설도 일류 기업 못지않았다. 옛날부터 지연이며 혈연이 강세인 지역이고 사찰이 큰 영향력을 가진 까닭에, 전통 있는 단가는 마을 유지로써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곤 했다. 농협과 절, 그리고 보수 정치.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지방의 풍경이다. 공무원 채용도 공정하게 이루어진 전례가 없었다. 선거법 위반도 늘 있는 일이었다. 1/27
대부분 자영업에 종사하던 시민들은 월급 생활자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역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겨, 전체주의적인 풍조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가을 축제 보조금은 벌써 5년 연속 최저액을 경신했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서 중학생들이 담배를 피워 대도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이 변화 또한 전형적인 지방 풍경이었다. 1/28

작은 지방에서 일어난 중학생 죽음을 수사하는데 지역이 어떠한지 원거리에서 바라본다. 중학교가 작아서 4반 밖에 없고 근방 2개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그대로 진학하는 것, 아이들의 담임 선생님과 이것을 수사하러 온 형사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점 등은 마을이 얼마나 집약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알린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부모에게서 아이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아이와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 된다는 흰트를 얻는다. 게다가 죽은 아이의 부모가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포목상을 운영한다는 설정까지. 피해자 부모는 아이의 죽음 이후 학교를 압박한다.  

밑그림을 그린 후, 사방에서 아이의 죽음을 설명하고자 서로 다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죽음을 조사하고, 밝히고, 정리하려는 이는 모두 다른 '위치'에서 온다. 모두들 '정의'롭고 싶다. 정의가 유일무이한 것이라면 죽음이 일어난 곳엔 그 연유를 밝히는 것이 단 하나의 정의여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 나오는 이들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른 바람을 갖고 있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다른 정의'를 내걸고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죽음(사건)도 본질에 닿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 담임 선생님은 아이의 죽음이 '사고'이기를 바란다. 죽은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아이들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우선하는 것이다. 는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표면적이다. 조금더 들어가 보면 이 사고가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때 그 무게가 감당 되지 않는 것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2. 가해자-로서 조사를 받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사건과 자신의 아이를 분리한다. '상해했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거기까지'다. 이들은 자신의 아이가 내몰았을지 모르는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경찰을 '위험'으로 규정한다. 그곳에서 '보호'하려고 한다. 파렴치한가? 그렇다면 이들의 정의가 틀렸다고 할것인가? 명확한 증명이 있을때까지 이들에게 정의는 이것 하나뿐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구출해내는데 촉각을 내세운다. 이 촉각이 두드러질수록 애도가 옅어진다. 자신의 아이의 친구가 죽었는데도, 슬픔은 마음에 미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죽은 아이는 물론, 자신의 아이가 가해자로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회사일이 먼저인 남편이 그려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가족이 더이상 끈끈하며 하나의 목적과 사랑을 갖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으로서의 삶이 먼저다. 

[남편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 갔다. 시게유키는 이번 일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니구라 가족에 대한 대만 해도 그랬다. 아버지라면 아이가 돌아오자마자 그 집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겐타와 함께 고개
를 숙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어째서 가족을 지키려 하지 않는 거지. 1/355

3. 그런가 하면 경찰들은 그날 지붕 위에 나 있던 발자국, 그 아이들에게만 집중한다. 죽은 아이가 가졌을 관계의 가지수를 생각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을 구속 수사하는 것은, 이들로 한정하기 때문에 이미 실패라는 조짐이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지붕에 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이들에게 괴롭힘 받은 상해흔이 몸에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추락사했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이렇게 명확한 죽음이라니 말이다. 정황이 뚜렷한 죽음 앞에서 경찰에게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에게 중학생은 우선 거짓말을 쉽게 해서 수사를 어렵게 하는 대상이다. 이들이 혹여라도 느낄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영웅심리'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4. 이것을 취재하는 기자는 사건을 쓰지만 '쓴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감추지 않는다. 난처하게도 자신이 취재한 것이 1면에 실린다는 흥분도 있다. 자신의 기사가 무엇을 더 환기할 수 있을지,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기사화가 된다. 그러나 사건의 '알림'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는 '죽음의 정의'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보는 정의'가 깃들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선의 '정의'에 혼동하기 쉽다. 나의 가치 역시,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책의 전반적인 목표라면, 책의 백미白眉 학생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미묘한 세계를 자세하게 써내려 가는점이다. 가해자-피해자가 쌍방의 관계에서만 불리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피해자(죽은 아이)는 가해자로 불리는 아이에게서는 피해자로 불렸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을 내버려둔 가해자로, 또한 피해자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보다 더 어리고 허약한 아이를 괴롭힌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또래 세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쉽게 저버리면서 어른을 끌고 들어온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에게서 따돌려졌던 '캠프에서 일'은 그것을 고자질한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은 아이들만의 세계를 모르는척 눈감고 넘어갈 줄도 알아야 했다. 자신이 정말 슬프다며 훈계하는 장면은 막막하다. 슬프도록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정말 슬프다. 왜 아무도 규칙을 어기는 걸 말리지 않았지? 왜 아무도 선생님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 아무도 안 할 게 당연하잖아. 도모미는 마음속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면 선생들은 자기가 중학생일 때 어른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거야? 만일 그렇다면 정말 왕재수 아냐. 중학교 다닐 때 일은 벌써 잊어버린 거냐고. 2/168]
선생은 슬픈 훈계로 아이들만의 세계를 쉽게 무너뜨리고, 아이를 일방적으로 비밀을 발설한 배신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밖에 죽은 아이가 외동이었으며, 부자인 까닭에 또래보다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고 그것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거나 권력으로 이용(되었던)했던 장면이 세세히 적힌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그저 '불쌍한 아이'로 단정짓는 것을 피한다.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죽음의 연유를 밝히는 것만큼이나 그 아이가 살아있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일본에 리갈하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법정드라마를 표방하며 사회의 폐부를 유쾌하게 비트는데, 스페셜로 다뤘던 테마가 중학생 이지메 사건이었다. 겉으로는 유쾌한 드라마여야 하기 때문에 아이는 건물에서 떨어져 다친 것으로 설정된다. 아이가 다쳤다는 점을 빼면 놀라울정도로 책의 시선과 비슷하다. 책에서처럼 왕따문제를 깊게 다루지 못했지만 거의 같은 부분을 노려보았다. 이곳에서는 우선 교사가 이지메를 알았느냐에 최대 중점을 둔다. 그렇다면 가해자로 지목되는 아이들보다 학교에 책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중학생 이지메 사건을 말하면서 학교의 은폐, 내부고발, 가해자로 지목된 불량해 보이고(덩치 큰) 아이는 과연 리더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괴롭히는 아이의 리더를 찾는 것은 매우 부질없는 짓이다. 중학생 아이들은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60)

다친 아이의 배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배금주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난 후, 놀라운 말을 듣는다괴롭힘을 당했던 것도 맞고, 왕따였던 것도 맞았으나, 건물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다쳤던 아이 자신이 직접했다는 . 괴롭혔던 아이들의 성화를 진실이라고 밝혀내 수사가 끝났으나, -다친 아이는 전학을 가고, 배상 받은 돈으로 가난한 집을 이사한다- 그럼에도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진실이었다. 5제곱근과 7제곱근이 자연의 허락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진실이 있는 장소는 그려지지(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도 이와 비슷 대답을 돌려주었다. 이 책을 덮고 취할 수 있는 포즈는 '허탈'이 아니다. 밝혀지고 '있다는' 모든 사건에 거대한 상상 불러오는 것. 상상력을 (이미)허락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허락과는 무관하게, 형체로 현 수 없는 '사람'과 '사회'의 문제가 있다. 우리에겐 그것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언제나 조금 더 필요하다.   



*, **배리 마주르, 『허수(시인의 마음으로 들여다본 수학적 상상의 세계)』, 승산, 2008.

***연기파 국민배우 사카이 마사토 주연. 일본 후지TV 

: 1/12 = 1권 1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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