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퍼펑크 - 어산지, 감시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다
줄리언 어산지 외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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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로 여기서!

머릿속에.

 

 

최종 사용자들의 최종 장치에서, 그러니까 양쪽 귀 사이에 있는 바로 이곳에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정보를 걸러 내며, 정부가 그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보기 싫은 게 있으면, 보지 않으면 됩니다. 182



  

세계 어느 곳이나 정부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소관인지, 개개인이 '무엇'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일일이 귀에 헤드폰을 씌우고 가장 좋은 앵글을 보여주며 '이것을 보고 들으라' 일러주는 모습은 언제 봐도 당황스럽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가갸거겨' 따위의 내용이기에 무엇을 이해할 필요조차 없는 말들이지만, '왜 그러느냐'라는 반응에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국가의 안정과 국민의 평화를 위해서.' 알고 있는 이는 알겠지만, '국가''국민'모두 가주어다. 안정과 평화보다 더 실체가 없는 게 바로 이들이다. ''가 포함되는 것 같기도 한데, 라는 생각은 모두 착각이다. '안정''평화'를 위해 '국가''국민'을 버리는 것이 '그들'의 생태다. 개개인의 활개를 어떻게 막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광활한 인터넷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눈에 가까운 인터넷 창마다 배너마다 권력이 원하는 내용의 제목, 기사, 동영상, 오락거리 등등이 넘쳐난다. 눈 뜨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동안 눈감고 믿을 수 있는 일들이 즐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용자로부터 의도되어진 '댓글'의 개수로 여론을 조작한다? 민주주의라는 가면은 어디까지 투명해질 셈인가? 그 안에 있는 전체주의의 낯빛을 아직 보지 못했는가? 우리가 궁극의 자유를 위한 가장 발달된 도구라고 믿었던 인터넷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인터넷은 내가 내딛는 거리와 발자국을 차곡차곡 모아놓는다. 많이 움직일수록 많이 남는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사는지, 왜 가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것은 도무지 망각이라는 게 없다. 나는 나의 '자유'로 인해 '감시'당한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구글말이다. 이들은 개인의 정보를 개인 스스로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련의 기록을 숨기고 지우는 일도 가능하다. 아무도 '관리'를 맡기지 않았는데 정부를 대신해 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 그런가하면 공원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더러 거기 와서 옷을 벗고 놀라고* 하는 곳에서 정말로 대다수가 정답게 자신의 정보를 폭로하며 놀고 있다. (페이스북) 이것은 기업과 정부의 통제, 혹은 협력하는 인터넷의 전형이다. 개개인의 자유를 막대하게 침해하거나 거리낌 없이 유도해내는 대표적인 활동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대해, 양날의 칼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칼을 반으로 접어 날을 밖으로 세우면, 안은 안전하고 단단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설계다. 암호로 얽힌 장벽,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키워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때문에 인터넷에 올라오는 '좋은 자료''나쁜 자료'를 나누는 '검열'에 대한 의견도 명쾌하다. 인터넷을 통해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문제점을 삭제하거나 가리기 위한 방법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왜 인터넷을 통해 나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이다. (: 각종 음란물) 어떤 명분으로도 검열은 사양한다. 왜냐하면, 검열은 '스스로'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 일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책은 가상의 공간마저 저들의 손으로 넘어가려는 사태를 지켜보는 이들이 썼다. 사이퍼펑크: 대규모의 감시와 검열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강력한 암호 기술을 대대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창하는 활동가. 우리는 '사이퍼펑크'라는 이름을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을 불러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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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numsa님의 " [서평단 모집] 신간『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단 모집합니다. (총 10명) "

철마다, 유행마다 새로 쏟아지는 물건들. 낭비가 '미덕'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합니다. 무엇이든 '더'원하죠. 필요한 '만큼'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만큼'이 실종된 사회에서 나조차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 모르게 무엇이 '낭비'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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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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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은 척추동물의 기관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척추동물인 사람의 눈을 가리켜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다른 척추동물을 살펴보자. 개,,,고양이 등등 다르지 않다. '눈알'이라고 하지 않는다. '고양이 눈', 이라고 하지 '고양이 눈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때로 식탁에 올라오는 생선요리를 보고 '조기 눈알'이나 '동태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이것은 생선을 자주 만나지만 우리의 삶이 생선과 가까운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생선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또는 아주 작은 것을 이르는 말로 '모기 눈알'이라고 '눈알'을 쓰는 것 같다.(엄밀히 말해 모기의 눈은 '눈알'이라고 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생선처럼 역시 모기와도 멀다몸으로는 아주 가깝지만마음으로부터는 아주 멀다사람이 별 가책 없이 마주치기만 하면 잡아 죽이는 몇 안되는 생물아닌가여기까지 보면눈을 이르는 말인 '눈알'은 친밀한 대상이 아니고 잘 모르는 대상을 '함부로'부를 수 있는 말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눈알이라는 기관이 있지만 '눈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눈알을 눈알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도 아닌데 말하는 순간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천지사방이 '눈알'인데눈알은 부재한다


'눈알'이 '눈알'로서 자유롭게 불리는 곳은 있을까아마도 학습용교구용으로 나오는 플라스틱 재료의 이름표에서 일 것이다원래 척추동물의 기관을 이르는 눈알이라는 말은 무생물그러니까 살아있지 않은 것눈이 있어야 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상태일 때 자유롭게 쓰이는 것이다이때 '눈알'은 전체의 부분을 일컫는 말로서 충실하다, '눈알'은 4mm부터 40mm까지 다양하게 수북히 준비되어 있다눈알을 흔들면 검은자가 흔들린다창고에 쌓여 있는 '눈알'들이제 무엇으로 만들지 고민하는 이의 손길로 '눈알'은 ''이 될 것이다외계인이라고 우기고 얼굴에 눈 열개를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일단 눈이 된 후에 다시 '눈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눈알'이었던 것이 형체를 갖추고 나면그 대상은 나를 ''으로써 바라보기 때문이다.


<눈알 사냥꾼>을 이렇게 이해해 보았다. '눈알'이 내게 주었던 위협적인 느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하나의 개체는 눈알을 갖지 않는다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건너서 ''이 되었기 때문이다누가 무엇으로도 '눈알'로 해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에서조차 되지 않는다.


공은 튀어 오른 만큼 낮은 곳에 닿는다. <눈알 사냥꾼>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저편에 대한 확신이었다. 눈을 '눈알'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사냥하는 사람의 반대편에는 '눈알'을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아귀 같은 '세월'에 '눈알' 생각을 하며 리뷰를 쓰고 있다. 참혹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자리에 대한 '무책임'이전에 인간에 대한 공감과 예의가 이렇게 '없는사람사람들이 이 짧은 세월 속에 밝혀지고 있다분노와 눈물의 시간 가져다 준 것이 있다면 거짓들 사이에서 죽어버린 진실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드는 이유는 책 아닌 다른 무엇을 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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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CAR MINI 마이 카, 미니 - 나를 보여 주는 워너비카의 모든 것
최진석 지음 / 이지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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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캘리포니아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는 자동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별개 문제로 자동차가 있다고 하는 것이 거리 구성의 전제가 돼버렸습니다이것이 일리치가 말하는 '근원적 독점'이라는 개념의 의미입니다.

자동차 사회는 "자동차를 사면 어떻겠냐?"라고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없으면 가난뱅이다그대는 매우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사람을 위협하고 강제하고 있습니다. *

 


 

이 책은 '미니'에 대한 애정으로 쓰졌습니다머리말에 그 단순한 열정이 잘 나와 있지요저자는 '미니'에 대한 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 검색에 '미니'라고 입력했습니다그러자 <겨울 왕국 미니 스티커북>, <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등을 만나게 됩니다미니에 대한 책이 없다니그러나 미니에 대한 책이 없어서 책을 쓰다니저는 이 두가지 모두에게 충격을 받습니다이것은 아무래도 BMW의 탓이라는 생각입니다미니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음에도 미니 스페셜 에디션을 한정된 수량으로 준비하면서, 미니가 지나온 길을 정리해 책자로 배포하는 배포는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BMW에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미니 변천사'라는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자는 미니가 단순히 '탈 것'이 아니라 '문화'라고 이야기 합니다자동차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요. 미니는 천편일률적인 자동차와는 확실히 달라보입니다. 외관도 그렇고 내부도 그렇고, 작은 것을 뽐내는 듯 하면서 내실있어 보입니다.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스타일리시해 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삶 또한 미니가 그런것처럼 귀엽고, 다부지며, 개성 없이 큰 차에 꿀리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니'가 그래 보이는 것이지, 그것을 타는 내 본질까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동안 자동차가 대개 남성적인 것을 표방한 것에 비해 미니는 보다 여성지향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단 작은 차체가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미니스커트'는 자동차 '미니' 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요. 미니스커트가 여성의 다리와 남성의 시야를 폭넓게 변화시키며 문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듯이, 그보다 이전에 '미니'는 자동차산업의 정형화된 사고를 전복하고 탄생한 것일까요아주 작은 차체지만 트렁크까지 겸비합니다. 시리즈는 또 얼마나 다양하구요. 그러나 <마이 카 미니>가 말하는 '미니'자동차가 없으면 안되겠는 세상을 전제로 합니다그리고 전제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지요. 자동차가 없는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동차의 성능 뿐만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코드로써 자동차를 선택해 지금의 편한 생활을 더' 재미있게' 꾸려가자라는 것이지요

 

'자동차를 입고', '자동차로 세상을 바꾸는미니 클럽의 즐거운 분위기가 조금 냉랭해진 것 같군요그러나 국내에서 3000만원에 가까운 2000만원으로 출고되는, 모닝보다 더 작은 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귀엽고 예쁜 미니, BMW 미니그저 그런 자동차보다 더 '비싼 미니'.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C. 더글라스 러미스의 말을 한 차례 바꿔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자동차 사회는 "자동차를 사면 어떻겠냐?"라고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없으면 가난뱅이다그대는 매우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사람을 위협하고 강제하고 있습니다. *

 

외제차 사회는 "외제차를 사면 어떻겠나?"라고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제차가 없으면 가난뱅이다그대는 다른이에 비해 즐겁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거야"라고 사람을 위협하고 강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미니'에 대한 관심으로 책을 읽게 되더라도, 미니에 대한 전세계인의 애정이 어떤 바탕 위에 있는지 알 것을 당부합니다. <마이 카 미니>는 다른 외제차보다 경제적이며, 연비가 좋고, 그나마 자동차 사회에 덜 종속되리란 기대로 선택한 이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자동차 사회가 꼭 필요할까? 라는 물음을 감추고서 미니에 대한 불필요한 환상을 심으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불필요한 것입니다. 삶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미니'의 욕망은 결코 미니하지 않으니까요.


 



_

책이 꼭 어려워야 하나요. 나의 관심과 정보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요. 네이밍 그대로 '이지북'의 측면에서 <마이 카 미니>는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글쎄요. 미니를 타는 이의 '마음'과, 미니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이지' 하지 않은 것 같아요.   








*

C. 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생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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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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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이 있던 자리-자연을 거슬러

 

축하는 불꽃놀이처럼 순간을 반짝인다결혼과 출산입학과 졸업입사와 퇴사우리는 꽃다발을 안기며 기뻐하지만 이때의 행복은 사진과 함께 고정 할 수 없다어쩌면 축하는 이제 그것이 기쁨을 제외한 무엇으로 변할테니 단단해 지라는 당부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축제는 절정을 기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절정과 잘 헤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지순식간에 하늘을 채웠다가 바닥으로 하수도로 빠지는 꽃잎들, 겨울에도 벚꽃을 볼 수 있다면 봄날 도로가 막히고 나무밑으로 북적하게 모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잘 헤어지기 위한 성대한 만남사족처럼, '변하기 쉬운 것'이란 목록 아래 '사랑'을 조그맣게 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인이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고 금방 헤어진다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오히려 만났다는 것이 신기한 일일 것이다만나는 동안 엄청난 행복을 두고 그는 불안하다. 다른 사람들이 안녜를 보고 따님이세요? 라고 묻는 질문에 둘은 집안에서만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생각한다. '행복은 수치스러운 것일까적어도 우리의 행복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우리의 행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므로우리의 행복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었으므로.' 166 자신의 '행복'이 자연을 거스르고 있다고 느끼는 것. 불행의 곁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은 어째서 일까.


''는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그녀의 젊음이 오래 빛을 내는 동안에도 계속시간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을 거슬러 젊음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녀와 사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당신은 앙테네와 헤어졌던 이유를 벌써 잊어버렸다. 앙테네와 당신은 같은 시간을 공유했기 때문에 헤어졌다. '나는 시간에 맞추어 달릴 수 없었다새로운 장소새집출산일상자연내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통제력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내 인생인데도 왠지 겉돌고 있다는 느낌가만히 앉아서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동안 모든 것은 쏜살같이 나를 지나쳐갔다. '94


'나'는 시간 속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간 밖으로 밀려나서는 나를 지나가지 않는 일들에 슬퍼한다급기야 복숭아가 썩어가는 것을 보고 복숭아가 탐스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백합은 너무도 하얀 빛을 견디지 못했던가국화는 길고 질긴 생명을 견디지 못했던가.' 탄식한다. 213 그는 결국 자신에게 남아있는 생을 견디지 못한다. '누구를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데?'227 자신에게 물으면서시간에게 묻는다대답은 아무도 없다.


이상하게도그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소'라고 절절히 적는 말미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지울 수 없는 부조가 떠오른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은 때때로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시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발악이 진해질 수록 사랑이 있던 자리를 선명하게 비추기 때문일까안녜가 좋아하던 복숭아는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무른다. 그는 상하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언젠간 '별수 없이 복숭아를 버려야 할 것185' 이라 하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그가 수십 번 복숭아를 버려야 할 때가 온다고 해도, 결코 복숭아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버릴 수는 없다혹시 그는 헤어짐을 수긍하는 것이 사랑이 '있었다'는 것 마저 치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설과 친구들의 '결혼'이 적힌 달력을 번갈아 본다. '변하기 쉬운 것'이라고 적었던 이름을 지우고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쓴다. '어쨌든 행복에 관한 책은 두꺼울 수는 없'겠지만149 이 얇은 책 제일 첫 번째, '사랑'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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