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희지의 세계 ㅣ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희지는 누구인가. ‘미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그냥 시인의 오류로 태어난 이다. 희지는 저녁이 오면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희지의 세계」 부분. 이 싱거운 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희지가 목장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그는 ①미주를 ‘부르고’ ②미주는 양들을 이끄는데 이때 희지는 미주와 닿지 않는다. 그를 끌거나 손잡지 않는다. 이들 사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소리’다. 소리는 형체 없이 존재했다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영혼을 닮았다.
영혼은 나중에 온다. 진흙에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숭고가 말하듯이. 그러나 시인은 순서를 바꾼다. 소리가 갖은 곳에서 별 뜻 없이 머무는 것처럼 무심하게 영혼을 '먼저' 놓는다. 시인이 말하는 영혼은 몸이 나종내 지닐 수 있는 고귀함이나 여러 날 수양해야 할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말한다. 진짜 ‘몸’은 얼마나 어려운가. 진짜 다치고, 진짜 아프고, 진짜 사랑하는 몸. 이런 감당에는 나의 몸이 필요하다. 위험하다. 바친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그래서 여기는 몸 없이 말이나 소리에 물든 '마음'이 먼저 온다. 깊은 의중없이 아이들 장난, 또는 노래처럼 뜻 없기를 바랐던 목소리에 더해 시인은 ‘실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중략)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실존하는 기쁨」 부분.
'나'는 '그'와 '어두운 물'을 내 연인으로 또 금속으로 의심한다. 연인 '같다'는 의심은 그가 연인이 아니라는 정적을 부르고 금속 '같다'는 추궁은 금속이 아니라는 다행을 부른다. 그러나 '나'의 의심과 달리 실제로 그가 '나'의 연인이고 어두운 물이 정말 물이라면? '나'는 금새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에 손을 담그는 건 너무 쉽고, 물이거나 물 아니게 될 판단도 금새 올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쉬운 확인을 하지 않는다. 화자는 감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주변을 새삼스럽게 불편해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감각하던 것, 당연하게 존재하는 평온을 비튼다. 그런 위태로운 생각 끝에 만나는 것은 나의 판단으로 바뀔 '그' 혹은 '연인 같은 그'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나'다. 시인은 이를 "실존"이라고 제목하며, 그것을 기쁨이라고 수식했다.
다른 아이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아무것
도 하지 않는 너 몰래 사온 빵과 음료를 먹고 있는 너 그
런 너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 작은 물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혼을 얻을 때까지
어떤 혼은 돌아오지 않고 어떤 혼은 깃들지 않는 교실
안에서 시간이 자꾸 흘러 애들이 죽고, 살아 있던 내가 만
든 작은 물건을 믿을 수 없게 커져 버린 그 피조물을
죽어 버린 나 자신이 보고 있었다
「조물」, 부분.
정리하자. 의심하며 '나'를 '다시' 만나는 것에서 '실존'이 있다. 그렇다면 실존과 영혼은 어떻게 만날까. 시인은 과정을 '기다림'이라고 믿는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순간인 교실이다. 혼이 나가 있는 존재와(선생님) 혼을 기다리는 존재(화자가 만드는 찰흙)와 아직 혼이 없는(찰흙)이 함께 있는 시간을 포착했다. '그/ 런 너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 작은 물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혼을 얻을 때까지'「조물」, 부분. 찰흙이 영혼을 얻는 것은 기다림으로 인한다. 네가 이 찰흙을 봐주는 것, 너의 눈이 이 찰흙에와 박히는 것, 네 온도가 찰흙에 머무는 것. 그런 것으로 이 찱흙은 무엇처럼 생긴 '것'에서 너의 '것'으로 변한다. '나'는 그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역시 그 찰흙과 다르지 않다. 찰흙이 영혼을 얻는 것과 내가 영혼을 얻게 되는 과정이 다르지 않다. '조물'이라는 제목에서는 나의 탄생을 엿보는 시선까지 이어진다. 작은 교실에서 무한한 반복으로 일어날 시간이 아니다. 조형에 지나지 않을 찰흙같은 사람들 칠흙같은 밤을 지나 사람이 되거나, 여전히 사람 같은 것으로 남기를 반복한다. 영혼을 얻는 일에는 '타인'이라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시인은 실존이라는 몸이 기다려 영혼을 얻는 '사건'을 그렸다. 사건은 시간을 가져서 오해가 많다. '우리'라는 사건에서 오해와 거짓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을 걷어낼 수 있다면. 불가능하므로 시간을 잘게 쪼개본다. 그것은 충분한 표정이 아닐 것이다. 못알아 볼지도 모른다. 시간을 쪼갠 면에서 존재할 단 하나의 정직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단 몇 분의 대화에서도, 일렁이는 혼동을 '나'는 분간하고 싶다. "우리는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게 될 거야"/ 그건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중략) 우리는 걷는다/ 여름밤 주택가에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 「조율」 부분. 나와 너는 몇 개의 행동을 하는데, 나는 그 대화를 일어났던 일과 일어나는 일 그리고 일어날 일로 분간한다. 나에 의하면 적어도 세 가지로 분간되는 이야기였다. 너는 여름밤을 걷는 '순간' 다 말해 버렸다. 게다가 시간을 쪼개 정직한 순간을 만나고 싶은 ‘나’의 노력은 다시 시간에 매인 '나'로 인해 늘 원점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우리의 장면을 판단할 수 있는 '시선'이 있다면. 이런 순간에 ‘나’는 백 개의 시선을 생각한다. '네가 나의 가슴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면 나는 울며 사력을 다해 너를 밀곤 했는데 (중략) 그것은 어느 평일 저녁만 있는 삶에 대한 것// 공중에 백 마리의 새가 있다면 백 개의 시선이 이곳을/ 보겠지 「공증」부분. 백개의 시선은 '공중에 새가 있다면'으로 가정할 수 있는 시선이다. 처음에는 백 마리나 되는 새를 상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윽고 단순한 형태가 되는 것. 하나의 무엇이 되는 것.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공평무사한 시선일 것이다.
한숨처럼 뱉는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건축」 부분. 를 마지막으로 살피고 싶다. '건축'이라는 제목에 깃든 멋진 비유지만 다음 같은 시와 함께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잠깐만 죽을게' 「수학자의 아침」* 부분. 작은 충격을 주었던 독백에서 이제 마음이 ‘죽을 수도’ 없는 처참한 상태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 같다. 이런 토로 중에 황인찬은 칭송에 쌓인 '과거의 시'에 마음을 입히는 작업이 눈에 띈다. 김수영의 「절망」을 ‘멍하면 멍’으로의 다 날려버린 변용은 미지가 희지가 된 사연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김수영의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마음보다 몸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진짜 몸을 내보일 수 없는 세대가 유희로 절망을 넘기려는 노오오오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비장의 몫은 더 이상 예전의 전유가 아닐 것이다. 정지용의 '유리에게 차고 슬픈 것이 어려 있다'를 바꿔서는 ‘유리의 마음’에 대해서 써내린다. '유리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있다'고. 유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다가 뜻 없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려 절망을 토하는 식으로. '멍'
강건한 몸에서 비롯된 언어는 '본질'을 모두 받아낸 양 머릿속 가장 높은데서 아름답다. 그와 비교되는 『__의 세계』. 저녁이 되면 __는 집으로 얼마나 훌륭하게 돌아가는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지도 않고 저 멀리까지 전해질 넷상을 따라 움직인다. 몸이 감당하거나, 몸을 감당할 속내가 아닌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단순하게 영혼만 챙겨나온 이들은 지금과-옛날을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만 말하면 잘 모르니까 옛날 노래를 변주하며 마음을 실었다. 실은 열심히 살고 있읍니다. 존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오라는 대답으로 듣는다면 기쁘겠다. 그러니까
진짜 ‘몸’은 얼마나 어려운가. 진짜 다치고, 진짜 아프고, 진짜 사랑하는 몸. 이런 감당에는 단 하나의 몸이 필요하다. 전화와 메신져와 화상이라는 수십개의 기기 뒤에서 수십으로 존재하며 나누는 마음의 형태는 얼마든지 번창할 것이다. 그러한 창이 하나씩 더 뜰때마다 나는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롭게 늘어난다. 그때마다 다를 영혼은 그만 두고 최종내 '나' 대체 불가능한 단 한개 몸을 꺼내 비로소 '실존'하고 싶다는 마음을 읽는다. 쪼갤 수 없는 사건에 엉망으로 묶인 시간을 감당하면서, 너의 눈과 목소리가 내 몸에 박히게 되는 순간으로, 한 순간에 한 곳에서 한 명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너'라는 '기다림'을 통과해서 말이다. 그것은 수십개의 창을 통과해도 되지 못했던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수난이다. 왜 그런 노래를 했던가.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우리 지금 만나」**부분. 그러니까 언젠가 안전하지 않고, 진짜 다치고 진짜 아프기 위해서. '멍하면 멍하고' 대답할 목소리는 아주 가까워서 소리보다 숨이 먼저 닿을 것이다.
*김소연
**장기하
시집의 중간쯤 「은유」라는 시는 시집의 안내자처럼 친절하다. 동시에 「희지의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해제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는 정확하게 제목 '은유'를 통과한다. '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단정한 매음새에서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 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된다'는 설명은 다시 '겨울이 저녁을 깨문다'는 시구와 맞물린다. 이 세계는 장면들이 기억을 깨무는 곳이다. 어떤 것을 실제라고 보존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에 처한다. 어떤 실제도 기억에 의존해 버티는 실제일 뿐이다. '장면에 대한 기억'이 꼬리를 물며 뜯기는 추격을 오래 벌일 것이다. 다시 백 마리의 새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