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비오는 날 종로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를 봤다저녁은 없었고 약간 지쳐서 나왔다영화가 끝나고 고향 동생과 꽤 오래 전화 했던 기억이 있다종로의 낮은 지붕의 술집이 늘어선 거리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내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다그때 나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준비'라는 허울의 어떤 교육에 동원되었는데그 결과 그 시간을 조금도 지치지 않고 혐오할 수 있었다나는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몰랐으며-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조금 더 고백하자면 어떤 옷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해야겠다보도블럭의 구역 반쯤까지 플라스틱 의자를 드밀어 술을 먹는 이들 덕분에 종종 도로에 나와 걸어야 했다도로에는 차가 느리거나 없었다아스팔트에 저 멀리서부터 쬐는 노란색 조명은 어딘가 너무 촌스러웠고그럴 때마다 가게 유리문에는 어깨가 좁은 실루엣이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을 보며 언젠가 등교길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달리던 논두렁을 기억할 수 있었다교복 스커트짧은 숨을 몰아쉬며 차부에 도착했을 때 종아리마다 차갑게 묻어났던 아침 이슬에 양말 언저리가 동글동글 젖었던 느낌도 함께몇 개의 제자리 뜀으로 이슬을 털어냈던 순간도 지나갔다그때 나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차부의 지져분한 유리 새로 나를 보았던 모양인데. 후에 그 유리간에는 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내가 졸업 후 수년이 흘러 도서관 한쪽에 다른 이들의 원고지와 함께 쌓여 있었으며, 버리기 위해 종이류로 분류되던 중 동생이 내 것임을 알아보고 가져왔다. 원고지라는 고전적인 공간에 얼마간의 분량과 연필을 든 행위가 중요했던 고등학교 시절 흔한 과제였다. 

 

다시 스콜같은 비가 내리는 여기는 서울의 변두리. <논픽션 다이어리>의 내용을 적을 정도로 기억이 비상한 것이 아니지만 제목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날 마련됐었던 '감독과의 대화'를 적기 위해서다그는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산다는 것'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고 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1990년대 일어났었던 충격적인 사건, 지존파 살인사건을 축으로 성수대교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를 다큐 형식으로 연결한다. 다큐가 지존파 살인사건에 대해 짓는 의문은 이렇다. 범죄를 저질렀던 일부 인간의 악마적인 행위의 결과였는지? 1990년대라는 격변의 시간에 대한 논의 없이 충격적인 결과에 대해 몸서리 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19세기라는 시간이 있다. 헌데 저 멀리 변화의 축을 감지할 수 도 없이 다리가 지어지고 건물이 올라서는 변동과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의 격차. 압구정동을 향하며, 악에라도 들려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었던 세기의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영화에서 주요한 물음은 5명을 직접적으로 살인한 지존파의 빠른 사형과, 무수한 생명을 빼앗고 가족을 파탄시켰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처벌자 없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몰아가기 쉬운 증오와 수많은 고통에서 고통에 함몰할 뿐인 모습이다. 저이들의 얼굴은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수많은 어깨를 걸치고 있을 재앙같은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영화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의구하며 전개된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쩐지 19세기와 20세기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시간의 언급에 감동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새로운 문물의 태동은 극단적으로 절멸하고 시작하지 않는점이 떠올랐다. 대부분 앞 뒤로 꼬리가 어느정도 있으며 가운데 가장 두텁게 발달하는 형상. 이를 '전함형 그래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 군상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두터운 공간, 중심세기에 사는 이들이 있고중심세기보다 앞서 무엇을 선도하거나 선도에 의해 괴리되는 집단이 있다그리고 저 끄트머리에는 그 반대 유형의 인물이 이름없이 살아갈 것이다.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살기 위해서






한 권의 책이 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유려한 제목이었다논문을 거의 그대로 실어 유연한 제목이 주는 내용의 인상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교육이 계급을 만들고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얼마나 권력화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며어쩌면연구 결과 전에도 공공연히 알고 있던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책에서 오히려 실감났던 부분은 유학생활을 하며 느낌 어려움긍정적이었던 부분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의 문제와 유학이후 미국에 남거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인생의 비교를 인터뷰를 통해 실제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완벽한 소통을 구축하지 못해 그들의 리그, 엘리트에서 제외되었던 이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계급의 정점에 가는 모순을 확인한다. 유학이 갖는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인프라부터 학구열, 보장의 격차 등을 하루아침에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이 책도 대안을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유학에서 느끼거나 겪게 될 일을 미리 선행하는 인터뷰집실용서로 읽는 점에 대해서 희망은 유학을 준비중이 이들이 이런 내용을 숙지 후 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바꿔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이 알 수 없는 지점을 시간이 흘러 확인케 된다면그것이 이 책이 가져갈 최대의 수확이 아닐런지.

 

책이 어떻게 읽히는지 책이 정할 수 있는 운명은 아니겠으나 이 책을 대하는 태도와 <논픽션 다이어리>를 마주하는 시선에는 동일한 부분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시간의 전함 가장 안전한 곳에서 타고 노는 것을 상상했던 십대가 있었다그러나 세기의 전함가늘어지고 끝내는 소멸될 끄트머리에서 언제나 부족한 시간을 터무니 없이 살아내고 있는 무명자가 바로 나임을 느낀다. 9호선을 탈 때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서 무거운 다리, 내가 미쳐 몰랐을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서늘하면서도 청량하게 종아리를 흐르던 아침 이슬을 기억하는 고등학생때로부터 나의 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세기도 아니고 그대로 적기에는 촌스러운 이십일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저 끝에서 이끌려지는 시간에 못견디는 19세기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얼굴로부터 시작한다한때는 글을 잘 썼으나 이제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아주 슬픈 사건이 벌써 수년전의 일이다매일 일기를 쓰지만 그 내용이 한 줄이나 길어야 쉼표로 구분되는 분절을 넘지 못하는 이가 있다내가 가로질러 뛰어갔던 시퍼런 논두렁, 테두리를 이루는 다각의 균절에서 자신의 시절을 다 보내야 했던이의 이야기다어떤 감정이 개입할 대상이 아니며 아무도 모르게 잊혀질 페이지도 아니다눈물과 감동회한과 아픔으로 소비되는 것은 지친다. 그들의 말이 아주 작으며, 작게 위치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것을 읽는 위상이 제목보다 더 강렬한 부제<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