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괴물들 - 테마소설 - 촉법소년 × 성 착취 × 인공지능 폭스코너 테마소설
김종광 외 지음 / 폭스코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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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괴물들-김종광 외

 

이 책에 있는 다양한 소설들 중 단 하나의 소설이 저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그 소설이 없었다면 저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소설을 읽고서 내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저는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그 소설 제목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작가 이름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세한 내용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하고 싶은 말만 하겠습니다. 내용을 말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기에. 우선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현실의 폭력을 주제로 소설을 쓸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것일까요? 여기서 좋다는 말은 주관적인 가치판단이 가능한 단어이기에 사람마다 다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만의 주관적인 가치판단으로 말해보겠습니다. 현실의 폭력을 보여주면서 생각을 하게 만들면 좋습니다. 현실의 폭력을 예술적으로 승화해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다면 너무 좋죠. 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나오는 건 힘들기에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의 폭력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재밌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소설이 폭력의 전시에만 너무 치중한다면 그게 좋은 소설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좋은 소설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폭력의 전시에만 치중하는 소설은 굳이 읽을 필요가 없어서. 그건 다큐먼터리나 실화에 기반한 영화, 뉴스 보도, 논픽션을 보면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장르들이 폭력의 전시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전시에 핵심을 둔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건 아닙니다. 폭력의 전시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이해가 될 정도로 개연성이 있다면. 기승전결을 갖춘 채 설득력 있게 폭력의 전시가 이루어진다면 폭력의 전시를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아니 개연성이 없어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폭력에 앞서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면. 폭력의 전시가 먼저 나와도 그 뒤에 폭력이 나오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폭력을 보여 주는 것에만 치중한다면, 폭력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크게 와닿지 못하다면, 폭력을 보여주는데 독자들에게 제대로된 준비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그게 저한테는 좋은 소설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해서 제가 읽기 힘든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폭력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정확하게 말해서 전쟁의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룬다고 칩시다. 소설이나 영화가 시작하자마 전쟁터를 보여줍니다. 뇌가 터지고, 총에 맞는 몸에서 내장이 튀어나오고. 이렇게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이렇죠. 그러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초반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부분뒤의 나머지 부분은 오직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이야기로만 가득합니다. 이 정도라면 저는 충분히 전쟁의 폭력을 다룬 첫부분과 뒤의 부분이 나름의 개연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전쟁에서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라는 임무가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일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그런데 폭력이 가득한데 나머지 부분이 개연성도 없고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준비시간도 주지 않는다면 제가 그런 소설을 읽어야 합니까? 제가 이 책에서 읽은 소설이 그랬습니다. 시작하자마자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 다음에 폭력의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욕설과 폭력이 중간중간 섞인 상황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폭력과 욕설의 영향 때문인지 개인의 이야기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폭력의 슬픈 결말로 이어지는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폭력과 욕설만 가득한 채 끝나버린다고? 아무것도 없이? 현실에 그런 폭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있을 겁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요라는 내용이라면, 뉴스를 보면 됩니다. 다큐멘터리나 보도 프로그램을 보면 됩니다. 세상의 부조리나 폭력을 다룬 논픽션을 보면 됩니다. 왜 제가 그런 소설을 봐야 합니까? 예술적이지도 않고, 재밌지도 않고, 생각할 거리를 주지도 않고,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의 다른 소설들은 제가 이야기하는 소설과는 다릅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폭력을 다루거나 주인공과 폭력을 행하는 이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할 거리를 주거나 하는 식으로. 폭력을 전시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게 소설의 핵심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삶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거나 승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현실을 포함하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소설이 다루는 건 문학적인 현실이고, 소설적인 현실입니다. 소설은 삶을 포함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닙니다. 소설이 다루는 건 문학적인 삶이고, 소설적인 삶입니다. 소설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 현실과 똑같아진다면, 적어도 독자에게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소설로서는 성공적인 게 아닙니다. 아니,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 읽고 싶은 소설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그 소설을 읽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아니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폭력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폭력의 전시에만 너무 치중한다면, 그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 아니잖아. 위에도 적었지만 폭력적인 현실을 잘 다루는 소설과 다른 장르들이 있는데. 소설은 폭력을 다루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데. 이 소설은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서 다루는 것에만 너무 치중하잖아. 나는 이게 싫어. 읽고 싶지 않아. 왜 나를 이렇게 고뇌하게 하는 거야. 저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쓰고 보니 분노가 조금 사그라드네요. 역시 글쓰기는 치유의 효과가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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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식탁>을 읽다가 킥킥 웃음이 납니다.

천운영 작가가 써내려가는 <돈키호테> 속 문장들과 이야기가 재밌고,

그 구절들에 덧붙여 천운영 작가가 써내려가는

능청스러문 문장들과 이야기도 재밌습니다.

음식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음식에는 관심이 안 가지만 음식 이야기는 좋네요.

기회되면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돈키호테>를 반드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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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안 썼습니다. 쓰기 싫어서요.ㅋㅋㅋ

항상 하는 말이지만 책을 읽을 때

무언가 떠오르는 것들은 많습니다.

그 즉물적인 느낌과 생각들을 토대로

쓴다면 별로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제가 그것들을 붙잡고 글로 쓰지 않을 뿐.

앞으로 꾸준히 쓰려면 그것들 최대한 붙잡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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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인데 미처 여기에는 올라가지 못했네요.^^;;

그래서 다시 올립니다.


연휴 기간 쉬었습니다.

부담없이 푹 쉬었으니

앞으로 문제없이 계속 쓸 수 있겠죠.^^;;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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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석 - 헤르만 헤세 인생론
헤르만 헤세 지음, 배명자 옮김 / 반니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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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해석-헤르만 헤세

 

많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다는 건 축복일까요, 아니면 불운일까요? 좋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만큼이나 야하고 폭력적이고 어두운 정보도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상황에 따라 축복이 되거나 불운이 될 수도 있겠죠. 확실한 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던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인생의 해석>에 쓰여진 헤르만 헤세의 유년기를 보면 두 시기의 차이는 확실하네요.

 

책은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고령기, 죽음으로 시기를 나뉘어서 그 시기에 맞는 헤세의 문장과 시, 이야기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어린 시절 파트를 보면 지금의 유년기와 헤세의 유년기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TV,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 SNS가 없던 19세기 말 유럽의 아이들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자연과 마을이었습니다. 눈앞에 놓인 꽃들, 나무들, 새들, 작은 동물들, 풍경들, 마을의 모습들은 아이들에게 또다른 부모이자 스승이자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놀고 즐기며 시간을 보내며 성장합니다. 그건 지금은 거의 불가능한 자연과 벗하는 순수한 유년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헤세는 소꿉친구의 죽음에 얽힌 추억을 밝히며 독자에게 아름답고도 슬픈 유년기의 추억을 선사합니다. 자연과 아름다움과 유년기의 순수함이 어우러진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서.

 

<인생의 해석>은 여기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헤세는 각각의 시기에 맞는, 아름답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독자들에게 인생의 모습들을 전합니다. 학창 시절은 아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그리며, 청년기에는 젊음의 모습을 표현하고, 중년기에는 청년은 아니지만 아직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어른을 이야기하고, 노년기에는 그 이전 시기에는 갖지 못한 인생을 받아들이는 미덕을 갖춘 느낌으로, 고령기에는 인생의 끝을 향해 다가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죽음편에는 죽음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마지막을 이야기합니다. 각각의 시기에 맞는 글들이 펼쳐져 있기에, 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인생 시기에 맞춰 책을 읽어도 되고, 다가올 시기를 생각하며 읽어도 되며,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읽어도 됩니다. 어느 시기에든 맞는 글들이기에 책은 제목을 따라서 인생을 닮은 책이 됩니다.

 

인생을 닮은 책에 담긴, 인생의 각 시기를 표현하는 글들이기에 책은 인생으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지나간 시기는 지나간 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다가올 시기는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며. 어느 것이든 인간의 인생이라는 보편성으로 뭉치기에 독자는 책의 구절 어디에서나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것을 찾게 됩니다. 이것은 헤르만 헤세라는 19세기 말과 20세치 초 유럽에서 살다간 작가의 삶이 책을 읽은 독자의 삶과 겹쳐지는 것을 의미힙니다. 헤르만 헤세의 삶과 겹쳐지기에 독자의 삶은 이전의 삶과 다른, 더 풍성하고 깊은 삶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삶의 힘을 얻었기에 우리는 더욱 더 삶의 의욕을 가지고 살아나가게 됩니다. 또다른 헤르만 헤세로서, 아니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한 인간의 보편적 삶의 형상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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