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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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강상중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일을 그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18)
현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의 의지에 기초해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라 생각합니다.(25)
인문 지식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며, 내면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60)
원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다시 있는 그대로의 타자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사회는 본래 그러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호 자유롭게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축되었던 창조성의 문 또한 열릴 것입니다.(63)
지금은 불우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시간을 믿고 기다릴 것, 그저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열심히 살면서 그때를 기다릴 것.(96)
선택과 집중의 배후에 실은 더욱 근원적이며 쓸모없는 것을 포함한 중층적인 부분이 넓게 퍼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99)
일이 인생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개인의 긴 인생 안에 자리매김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냈으면 합니다.(124)
우리 대부분은 인류 전체에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다고, 인류 전체의 흐름에 무언가를 더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187)
인간 사회는 단순히 영리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회성을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경제 시스템 자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218)
결국 타자와 사회와의 만남은 내가 몰랐던 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4)

1독 1서평 원칙을 가지고 글을 쓰면서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뒤에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은 글을 쓰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같은 경우는 서평을 쓰려고 하는데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아 글을 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책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책의 일부분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판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그 비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저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비판의 목소리에 굴복하여 이렇게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아마도 이 편지를 일본에 계신 책의 작가분은 보지 못하겠지요. 저도 작가분이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할말이 있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원래라면 책을 쓴 저자와 독자는 독서라는 과정을 통해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독서가 끝나면 둘의 내밀한 대화는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저라는 독자는 '독서의 끝'이라는 대화의 끝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독서의 경우에는 내밀한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더군요. 머릿속에 할말이 계속 메아리쳤기 때문입니다. 할말이 있다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 대화를 끝낼 수가 없어, 이렇게 서평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써봅니다. 내 마음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 제가 할말을 해야겠네요. 사실은 책에서 읽은 이 말 때문에, 제 마음 속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습니다. '신문 읽기를 해라'는 말. 저는 책에서 나오는 책의 작가분의 말 대다수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제가 할말을 하기 위해, 책에 나온 작가의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통하지 않는, 일자리를 위시한 대다수의 것들이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한 시대에, 이 책의 작가는 사람들은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아로새기면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책의 작가는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아로새길 때 인문교양이 필요하다며, 인문교양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책과 신문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인문교양을 키우는데 책이 도움이 된다는 건 이해가 갑니다. 책을 읽으면 언어감각을 키우고, 저자와의 내밀한 대화를 지속하면서 자신만의 생각하는 법을 익히고, 삶의 거시적 비전이나 폭넓은 시야를 얻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조금 더 균형잡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니까요. 저 자신도 오래된 문자매체인 책의 힘을 경험을 통해 강력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문 얘기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네요.

물론 작가의 생각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서도 인문교양을 익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신문도 문자매체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을 익히고, 하루하루의 뉴스를 통해 그날그날 일어나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삶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가는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문의 '즉물성'입니다. '즉물성이라고?'이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즉물성' 맞습니다. 신문이라는 매체는 그때그때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는 '즉물적' 매체입니다. 칼럼이나 사설을 통해서 조금 더 거시적인 듯 보이는 글들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이나 사설들조차도 신물의 '즉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쓴 작가도 '신문은 매일 매일의 피부호흡과도 같습니다. 매일 신진대사를 하는 것이 신문만의 매력이지요.(111)' 라며 신문의 '즉물성'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제부터 제가 할말을 해보겠습니다. 신문이 즉물적 성격을 가진 매체라면, 과연 신문의 즉물설이 지금에도 과거처럼 유효한 것일까요? 먼저 속도라는 측면을 봅시다. 과거라면 신문이 뉴스 정보를 얻는데 가장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매체나 SNS나 심지어 1인 미디어까지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신문이 가장 빠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즉물성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인 속도에서 신문은 느린 매체가 됐죠. 그렇다고 신문이 큰 틀에서의 거시적인 사고를 우리에게 보여주나요? 과거의 칼럼이나 사설들을 시간이 지나서 바라보면 어처구니없거나 지나치게 즉물적이라 폭넓은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는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외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통하는 사설이나 칼럼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문 자체가 거시적인 큰 틀에서는 책에 비해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책처럼 거시적인 큰 틀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이 신문의 현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신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정쩡한 상황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데 인문교양을 쌓기 위한 매일매일의 언어적인 피부호흡을 위해 신문을 읽자는 작가의 말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작가가 말하는 언어적인 매일매일의 피부호흡의 방법으로서의 신문 읽기는 낡은 피부호흡 방법이 되어버렸습니다. 느리고, 거시적인 틀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낡은 언어적인 피부호흡 방법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요? 지금의 시대에 맞춰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꾸면 안되나요?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꾼다고 큰 잘못인가요? 신문을 읽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문을 읽고 싶은 사람은 읽으면 됩니다. 저는 신문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문이 낡고 느린 매체가 된 현실에서 지금 이 시대의 인문교양을 쌓는 방법으로서 신문읽기가 효율적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긴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책과 짧은 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신문을 통해서 미시적인 시각과 거시적인 시각의 균형을 통해 인문교양을 쌓자는 저자의 주장은, 짧은 호흡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차라리 인터넷이나 SNS의 뉴스를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신문을 압도하는 속도감을 보여주는, 인터넷과 SNS의 다양한 뉴스들을 모아놓고 바라보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바라보면서 제가 '뉴스의 성좌'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의 성좌' 바라보면 뉴스들이 어떤 시대상의 밑그림을 그린다고 여겨지니까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토대로 자기 나름의 '뉴스의 성좌'를 그려나가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더 이 시대에 맞는 인문교양을 쌓는 짧은 호흡의 방법이 아닐까요?  이게 정답은 아닐 겁니다. 다만 신문이 과거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시대에 맞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맞습니다.

작가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비판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영웅전처럼 자신이 높은 평가를 하는 인물들을 서술하는 부분은 비판할 수밖에 없더군요. 저는 자신이 생각하는 긍적적인 인물들을 얘기하며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점 없는 영웅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스티브 잡스를 말하는 부분에서 '영웅전' 같은 느낌이 특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론 소킨이 시나리오를 쓰고 대니 보일이 연출한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 잡스는 작가님이 말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스타일로 주변인들을 힘들게 만드는 지독한 인간으로 나옵니다. 스티브 잡스를 '영웅'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인물로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은 다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너무 좋은 면으로만 몰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다면적인 인간으로 보는 게 더 인문학적인 것 아닌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적어놓고 보니 비판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사실 저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책에 나오는 작가님의 의견 대부분은 동의하는데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아 미안하군요. 그러나 애정이 있으니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중간에 있는 책으로, 책에서 말하는 비즈니스 퍼슨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군요. 저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퍼슨식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정적인 말들이 튀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어떤 책을 쓰느냐에 따라서 또 저의 생각도 변하겠죠. 꾸준히 계속해서 책을 써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편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몸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음 책에서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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