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데드라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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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새벽의 데드라인-윌리엄 아이리시

그녀에게 그는 분홍색 댄스 티켓이었다. 그것도 써버려서 반동강이 난 티켓에 불과했다. 십 센트당 이 센트씩 떨어지는 수고비였다. 그녀에게 딱 붙어 밤새도록 온 사방을, 온 플로어를 누비는 한 쌍의 발이었다.(9)
추억의 강물이 둘 사이에 줄기를 이루어 흐르기까지, 서로 박자를 맞춰가며 점점이 흩뿌려진 기억들을 번갈아 길어 모았다.(58)
이 도시는 악질이에요. 사람을 잡아먹어요. 지금 이 도시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거예요.(63)
가방이 무겁지는 않았다. 들어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산산이 부서진 희망뿐이었다.(92)
도시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든요. 도시는 눈이 천 개에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우리한테 안 보이는 위치에 깊숙이 숨겨진 눈이 끔뻑끔뻑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요.(98)
이 도시, 여기가 문제야. 본때를 보여주자고요. 아직은 한 방 먹은 거 아니에요. 데드라인까지 시간이 남았잖아요.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 있어요.(110)
앞이 막힌 구멍들이 줄줄이 늘어선 거대한 벌집과 다를 바 없는 게 도시였다. 인간은 이런 문을 드나들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살면 안 된다. 이런 방에는 달빛도, 별빛도, 아무것도 싀지 않았다. 차라리 무덤이 나았다.(303~304)
가면 갈수록 스카이라인에 잠식당해 하늘은 점점 더 면적이 줄었고, 가끔 뚜껑 열린 맨홀들이 들쭉날쭉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저 파란 하늘. 그리고 어두침침한, 탈출구 없이 영원히 어두침침한 콘크리트 미로.(356)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도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저의 삶의 보금자리로서 존재하는 곳이 도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보니 빌딩숲이 우거진 곳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간다고 해도 크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도시에 와서 느끼는 감정을 저는 느끼지는 못하겠죠.

<새벽의 데드라인>은 제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댄서로서 성공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왔다 성공하지 못하고 싸구려 댄스홀의 댄서로 혹사당하며 죽은 삶을 살고 있지만 고향의 부모님에게 계속해서 말한 거짓말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여인 브리키. 역시 고향을 떠나 뉴욕에 와서 일을 얻었지만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고 몰락한 청년 퀸. 우연히 댄스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대화를 나누다 도시의 삶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도시에서 그들이 겪은 삶은, 그들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버무려진 냉정한 도시의 삶은 그들을 얽어매어 '범죄'의 혼란 속으로 그들을 밀어넣습니다. 다음 날 새벽까지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연관된 범죄를 새벽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 게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작가입니다. 윌리엄 아이리시. 미국 추리소설의 역사에 누아르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 꼽히는 코넬 울리치의 다른 필명인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읽는데 신뢰감을 더합니다. 시리즈물이나 연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이나 탐정, 경찰을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지를 생동감 있고 긴박감넘치게 특유의 흡입력 있는 문제로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을 알기에 저는 <새벽의 데드라인>을 읽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비록 이야기 구성이 과거의 느낌이 나고 지나치게 영화적 구성 같은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관심있게 본 것은 도시인이 아닌 인물이 도시에 와서 살면서 가지게 된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자신만의 큰 꿈을 품고 '뉴욕'이라는 세계 제일의 도시이자 세계의 중심에 와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 실패한 여인 브리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서 도시를 바라봅니다. 도시가 자신을 잡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이건 자신의 원망을 도시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망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시 특유의 삶이 가진 어떤 특정한 패턴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 중심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그물망처럼 지역 곳곳을 얽매고 있는 고장에서, 농업이 중심이 아닌, 끈끈한 인간관계가 아닌, 스쳐지나가는 관계 중심의 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서늘함과 차가움이 도시가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무섭게'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도시의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서울 수도 있는거죠. 저라는 인간는 도시의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무섭게 여기지 않는겁니다. 생각해보니 저같은 도시인은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받아들인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아닌 곳의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새벽의 데드라인>은 도시의 차가움과 서늘함이 만든 무서움을 벗어나려는 도시가 아닌 사람들의 몸부림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인 코넬 울리치가 도시인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통해 도시의 무서움을 그려내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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