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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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픽션의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글 속에 나오는 A씨는 저라고 보시면 됩니다.^^

A씨는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도 바쁘고, 나름대로 계획한 개인 팟캐스트 방송(잘 올리지는 않지만^^;;)이나 개인 책을 만들기 위한 노력 등으로. 오늘도 A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2017년이 끝나기 전에 책을 완성해야 하는데 날짜가 얼마 안남아 A는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글을 쓰려고. 역시 오늘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제에는 20번 이상 읽었던 <데미안>이라는 책을 가지고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글을 썼는데, 평소의 A답지 않게 글이 술술 나와서 당황했다. 어 내가 이렇게 글을 쉽게 쓸 수 있다니 놀라며.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같다. 마치 어제 내적인 배터리의 에너지를 다 써서 더 이상 글을 쓸 역량이 없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A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본다.

첫번째.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인생의 어느 시절마다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군대갈 때는 '이등병의 편지'가 다가온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군대에 들어갈 날이 얼마 안남은 청년들이 이 가사를 보고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서른 즈음에'는 어떤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서른을 앞둔 청춘들이 이 가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아직 경험한 적은 없지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60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큰 감정의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니체는 김광석과 반대다. 니체의 사상은 어느 특정 시점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다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김광석과 달리 니체를 보편성의 사상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A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뒤에 쓸 글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이 쓴 글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화가 치민다. 김광석과 니체라니 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A는 자세를 가다듬고 생각을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두번째.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모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를 따라갔다. 한때 기독교였지만 기독교를 떠났던 나는, 다시 기독교인이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했다. 기도, 찬송가와 가스펠, 몸짓과 춤 등등. 여러가지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그 중에서 '철학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경험이 있다. 기독교 동아리의 대표 목사격인 인물이 연설을 하는데 갑자기 '니체'를 언급하며 그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니체의 책들을 읽었던 나는 그의 비판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판의 맥락을 이해하자 나는 나 자신이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 자신과 이곳의 분위기를 따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같은 경험을 하며 나는 이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시 뒤에 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A의 분노는 이전보다 더욱 더 강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의 경험을 늘어놓다가 뜬금없이 니체를 말하다니 뭐하는 짓이지. A는 길길이 날뛰고 싶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서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세번째. '나는 말이다. 비록 '히히힝'은 하지 않지만, 나는 말과 다름없는 존재다. 니체가 끌어안고 울부짓던 그 말.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마부가 이끄는 대로 존재하는 말과 같은 존재인 나는 나 자신의 삶에 의문 따위를 제기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는 대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 오고 나니 더 이상 삶에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죽는 것밖에 남지 않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 끝에 니체를 바라다본다. 말을 끌어 안고 울부짖는 그 니체를. 미친 그를 보니 내가 미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쳐야 세상을 새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히히힝'하고 외치자. 외치고 나를 말로서 인정하고 말이지만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 삶을 꿈꾸자. 거기서는 '히히힝'이야말로 마법의 단어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A의 광기가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정신 차린 A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자신이 '진짜 미쳤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따위 글을 쓰겠는가. 글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A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잠깐 내가 썼던 글 세 가지는 <니체의 인생 강의>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와 대응할수도 있다는. 첫번째 글의 김광석은 사는 대로 살다가 느끼는 삶의 무게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의 무게를 알아차리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낙타와 같은 삶의 형태로서 '김광석의 노래들'과 이어진다는 말이다. 두번째 글은 사자의 모습과 연결된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아가는 사자의 모습은, 수련회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하다 니체에 대한 비판을 듣고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의 모습에서 그 씨앗이 들여다보인다. 세번째 글은 어떤가. 광기에 사로잡힌 A는 광기의 순수한 유희로서 말인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어린아이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히히힝'을 외치며. 비록 글을 다 못써서 실패한 어린아이에 그쳤지만.

깨달음은 A를 기쁘게 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으로서의 무한회귀에 지쳤던 그가 그 무한회귀하는 삶을 무한한 긍정의 자세로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무한히 반복되는 새로운 삶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에. 기쁜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사유의 춤과 몸의 춤을 함께.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가르침을 되뇌며. 춤추다 A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니체가 말인 자신을 껴안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울부짖는 니체의 얼굴 아랫부분이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다. 아! 저거다. 저것이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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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2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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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2 2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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