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은 힌두교 국가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은 윤회하며,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렇기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은 오히려 웃는 얼굴로 죽은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다.(160)


진실만큼 어이없이 왜곡되는 것도 없지. 그보다 다면적인 것은 없어.(223)


자기가 처할 일 없는 참극은 더없이 자극적인 오락이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 끔찍한 영상을 보거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말하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 오락인 거야.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미 실수를 저질렀다. 되풀이할 생각은 없어.

(228~229)


다치아라이. 당신은 서커스의 단장이야. 당신은 쓰는 글은 서커스의 쇼야. 우리 왕의 죽음은 최고의 메인이벤트겠지.(229)


당신 마음이 문제가 아니야. 비극은 오락이라는 숙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다. 사람들은 어째서 줄타기를 보며 즐거워할까? 언젠가 연기자가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기 대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나? 네팔은 불안한 국가다. 그리고 어제 연기자가 떨어졌어. 흥미로운 일이지. 이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나도 즐겼을지 몰라. ... 하지만 나는 이 나라를 서커스로 만들 생각은 없다, 다시는.(230~231)


사진은, 최초 보도는 그것 자체로 해석된다. 지금 내가 돌아가서 현장을 찍으면 그 사진은 내 의지에서 벗어나 잔혹함을 감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238~239)


내가, 알고 싶다.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있다. 눈앞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위험을 가늠해가며 머물려 하고 있다. 어째서 알고자 하는지 내게 묻는다면, 대답은 에고이즘으로 수렴한다. 알고 싶다는 충동이 나를 떠밀로, 내 입에서 질문을 끌어낸다. 그것이 구경꾼의 비열한 근성이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가 뭐라 지탄하더라도 역시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

나는 앎은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 더 덧붙여야겠다. 나는, 내게 있어서, 앎은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남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258~259)


방금 전 우리는 완성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나 기술의 진보에 부합하여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완성이라는 형태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276)


부디 명심하십시오. 고귀한 가치는 연약하고, 지옥은 가깝습니다.(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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