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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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기시 유스케

지금까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나는 지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견디기 힘든 적막감과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이 심장을 움켜쥐었다.(7)


수미상관. <말벌>의 시작과 끝은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꿈에서 시작한 이 작품은 마치 꿈같은 느낌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시작'이라는 입구로 들어와서 '끝'이라는 다른 출구로 나갈 것을 기대했으나, 막상 '끝'이라는 출구에 도달하고 보니 이것이 '시작'이라는 입구와 같은 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처럼. 입구에서 시작된 직선이 출구라는 다른 문을 통해 빠져나갈 것 같았으나 원형을 그리며 다시 입구로 돌아오는 것처럼.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이 작품이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말벌들과 한 남자가 사투를 벌이는 연극.


당황하지 마라.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신속히 이 자리를 떠나면 된다. 벌집 옆이 아니면 함부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71)


주인공인 추리소설 작가 '나'는 자신의 소유인 산장에서 정신을 차린다. 주변에는 가득 눈이 쌓여 있었고, 빠져나가거나 다른 곳으로 연락할 수단이 없는데다 아내는 사라졌고 신발과 옷이 사라진 상태로. 고립된 '클로즈드 서클'속에서 벌 독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산장에 풀어놓은 말벌들과 목숨을 건 생존게임을 벌인다. 자신이 쓴 추리 소설을 떠올리며 간신히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나가던 '나'는, 사건 관계자들이 모여들면서 예상치 못한 사건의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인생이란 싸움의 연속이다. 싸움을 포기한 자는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102~103)


<말벌>의 대부분은 말벌떼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나'의 독백과 과거 회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모노드라마 같은 구성때문인지 작품은 연극같기도 하고, 꿈같기도 하고, 환상같기도 하다. 혼자서 떠들어대고 혼자서 소설 내용의 빈칸을 채워나가는 이 작품은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당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 동시에 일말의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긴장과 의심을 함께 안고 책을 읽어나가다가 마지막에 도달하면 우리는 기시 유스케식 소설적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앙상하게 외소한 한 인간의 정신이었다. 삶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일그러진 정신을 가지게 된 한 인간의 정신을.

남을 떨어뜨리기 위해 깎아지른 절벽으로 유인하는 자는 자기 자신 역시 떨어질 운명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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