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젤라즈니가 쓴 위저드 월드 시리즈의 1편인 <체인질링>은, 판타지 세계를 대표하는 마법사의 후예인 주인공과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악당의 대결이 펼쳐진다. 내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악당에게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감정 없이, 기계와 같은 차가움을 간직한 악당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냉정한 악'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냉정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냉정함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어떤 현상이나 상황의 의미를 냉정하게 파악하는 것에 대한 환상. 환상이 사라진 시기는 내가 문학에 빠져들면서였다. 적어도 문학을 재미있고 즐겁게 읽는데 있어서 냉정함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이나 감정이 중심이 되는 책들이 아니라면, 지금도 나는 그런 류의 책을 읽는데 있어서는 냉정함에 대한 환상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논리와 이성이 중심이 되는 책에 있어서 냉정하게 책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책을 쓴 저자의 의견을 맹신하고 맹신이 기쁜 나머지 기뻐하며 환희의 찬가를 불러대는 식의 독서나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마구 트집을 잡는 쉬운 독서 대신에 냉정하게 책의 가치를 판단하며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뒤에 자신의 의견을 전개해나가는 식의 힘겹지만 냉정한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과거에 냉정한 독서를 하려고 실제로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낭만적이고 이상적 성향이 짙은 나는 냉정한 독서가 쉽지 않았다. 노력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나는 그냥 내 스타일대로 읽기로 했다. 내 마음대로 읽자 내게 독서는 예전과 같은 행복한 행위가 됐고, 행복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내 마음속에 생겨난 냉정한 독서의 흔적을 몰래 감추게 됐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마음속에 그때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 '작은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어떤 북플 이웃의 글을 읽고 다시 이 작은 악마를 꺼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플 이웃의 글을 읽는데 마음 속 '작은 악마'가 나가고 싶다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아~~ 나는 작은 악마의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작은 악마의 요구대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음에 쓸 글은 내가 쓰는 게 아니다. 작은 악마가 쓰는 글이다. 혹여 불편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를...(참고로 얘기하면 이 글은 어떤 특정한 책에 대한 글은 아니다. 그동안 내 마음 속 작은 악마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품어온 어떤 특정한 저자들에 대한 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