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도 익숙해지면 몸의 일부가 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은 불편하다. "희망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편안한 절망을 택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니엘 튜더는 이렇게 말한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이라면,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익숙한 절망,불편한 희망> 알라딘 책 소개 글 중에서)

최근에 여러 상황이 겹치며 너무 쉽게 분노하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무심코 깨달았습니다. 분노에 익숙한 나 자신을 깨닫는 순간, 한 가지 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계속되는 분노하기가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앞에 놓인 이들이 보여주는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저는 바뀌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서 분노하기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내적인 스트레스를 풀어왔던 겁니다. 물론 정신의학적으로 봤을 때 화내야 할 때 화내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건강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분노하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은 제가 생각하기에 저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절망의 다른 표현이겠죠. 우리에게 익숙한 절망의 해소책으로서 정신이 분노하기를 계속 지속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나마 너무나 빠르고 성급한 분노 대신 상황이나 사건을 최대한 넓고 객관적으로 보면서 다른 방식의 사유를 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최근의 어떤 사건에 대해서 이미 그런 변화를 하고 있고요.^^;;) 한 번 해보니 괜찮더군요. 이제 익숙한 절망 대신 불편한 희망을 한 번 차분하고 신중하게 선택해 보렵니다. 그게 더 힘든 길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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