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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ㅣ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평점 :
자두나무 정류장-박성우
언어란 말로 표현되어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가닿는 순간 다른 무엇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어떻든간에, 말은 청자에게 가서 원래의 말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이죠. 이건 말을 한 인물과 말을 듣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은 완벽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믿으며 말을 할뿐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되는 언어의 사용과 의사표현의 유사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틀이 우리로 하여금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만드는 겁니다. 이 착각이 있기 때문에 화자의 말이, 청자에게 다른 형태로 가닿음에도 불구하도 인간들은 서로가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죠. 착각 없이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가장한, 착각에 의거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
글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언어를 글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여 독자 앞에 내놓은 순간, 작가의 글은 독자에게 가닿아 원래와는 다른 무엇이 됩니다.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에 근거한 말의 소통과 달리, 글은 표현양식의 특성상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이 아니라 간접적 관계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보다도 더욱 오해와 착각은 커지게 됩니다. 작가가 쓴 글을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할 수는 없고,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어서 발생하는 이 오해와 착각은, 글을 읽는 독자 자신의 존재 조건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독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서 독자가 글을 읽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달라진다는 거죠.
문학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이룬다.
글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글쓰기 양식, 그 문학 중에서도 ‘시’라는 장르는 특히나 더욱 이 오해와 착각이 큰 편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 자신이 바라본 세상과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의 특유의 정의를 공유하면서도, 언어에 더욱 더 천착한다는 특성을 가진 ‘시’는 언어를 가다듬고 정련하여 자신만의 언어로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은 공통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적 틀을 만들어서 그걸로 다시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존재인 겁니다. 시인은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언어적 틀로서의 시를 써내고(물론 이것도 완벽하게 특정 공동체의 언어적 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걸 다시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 돌려보내 시를 읽는 독자와 소통하게 만듭니다. 시인은 필연적으로 이중의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고독하고 외롭기 그지없는 첫 번째 작업과 달리 두 번째 작업은 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번째 작업은 첫 번째 작업의 결과로 탄생한 시를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된 독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시인에 의해서 탄생한 시는 독자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나서 제2의 탄생을 맞게 되는 거죠.
시
정서나 사상 따위를 운율을 지닌 함축적 언어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
어떤 시라도 제2의 탄생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주관적 언어 속에서 탄생한 시가 독자를 만나는 순간 독자에 의해 변형되어 받아들여지고 삶 속에 스며들기에 발생하는 제2의 탄생은 시가 맞이하는 행복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현대 시사는 이 제2의 탄생을 조금 기묘한 형태로 만듭니다. 과거의 시들이 보편성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맥락 속에서 존재했기에, 제2의 탄생은 보편성에 근거한 부드러운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시들이 보편성에서 점점 더 일탈해서 개별성에 천착한 나머지 제2의 탄생을 힘겹고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극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대시라는 정신적 실체를, 자신의 지성과 사고로 받아들이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 된 것입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적인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진짜 탄생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생명의 탄생은 고통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두나무 정류장>은 현대 시의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이 시를 받아들인 과정에서 벌어진 ‘제2의 탄생’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거든요. 아니, 오히려 그건 따스했습니다. 시인의 시는 따스하게 저를 감싸안아주며 삶에 스며들어 제 가슴과 온 몸에 온기를 전해주더군요.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답게 그의 서정시는 진짜 한국스러운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 어머니의 밥 같은, 언제라도 부르면 옆에서 달려 나와 같이 놀아주던 이웃의 친구 같은, 함께 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주던 이웃사촌의 모습 같은, 나 자신의 작은 우주로서 나를 품어주던 나 자신의 기억과 삶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동네 같은. 이 시들은 지성과 사고 이전의 근원적인 저 자신의 감정으로 파고들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감정의 파고들어옴이 이룩한 정서적 교류가 보여주는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지적인 교류를 했을 때보다 더욱 더 강력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들이 주지못한 정서적 폭발력을 이 시들이 저에게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실험적이고 지적인 시들이 전해주는 차가운 정서적 폭발과는 다른 의미로 뜨거운 정서적 폭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한국인의 내밀한 정서를 뒤흔드는 이런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너무 좋더군요.^^ 그런데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닌 것 같아요. 차갑고 어지러우며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시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니라 또다른 미래의 모습처럼 여겨지더군요. 시인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 길을 따라가며 걷고 싶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힐링’보다는 이런 따스한 온기가 진짜 치유가 되거든요. 그 이유 때문에 저는 시인을 따라 걷다가 자두나무 정류장에 가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따스함’이라는 버스를 함께 기다려보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는 그 버스를.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