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시선 - 당대편 107 중국시인총서(문이재) 107
김민나 엮음 / 문이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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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하 시선-이하

 

아름다움은 하나의 뜻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쉽게 정의되는 개념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대답하렵니다. 백치미가 있으면 지성미가 있고, 퇴폐미와 관능미가 있다면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듯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서로와 서로의 존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비슷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각자마다 다른 것처럼. 이건 아름다움이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일수도 있지만, 각자 개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일 겁니다. 동시에 이건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에도 보편적인 공통성과 개별적인 편재성이 공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내릴 수도 없고, 쉽게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면서 아름다움의 정의를 못박아 버리고 있다면 그건 일종의 실수이자 오만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서 계속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들이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그 시도 자체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의 정의만이 옳다는 생각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그건 삶을 아름답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름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가장한 폭력의 영역이니까요. 혹시라도 다음에 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애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거기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란 지독히도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니까요. 시를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어리석음이, 이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무모한 시도가 시인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쉽게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아름다움을 정의내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어두울까를 생각해본다면 이 시인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깨달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존재인 겁니다.

 

중국문학사에도 이처럼 어리석은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숙명으로 중국 문학사를 아름답게 빛내며 중국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 중에 이하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이하 얘기를 하게 되네요.^^;;) 그는 중국문학사에서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던 인물로서, 17세에 이미 동시대 대문호 한유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름을 날리지만 그것 때문에 경쟁하는 이들에게 미움받고 그들의 계략에 의해 과거를 치르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렸고, 그때의 좌절과 울분과 슬픔을 시를 쓰며 달래다가 27세에 요절한 천재시인입니다. 죽을 당시에는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그의 독창적인 시세계가 알려져 중국문학사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각광받게 되죠. 앞에서 간략하게 적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이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의 울분과 슬픔을 달래는 도구로서 시를 썼고, 그 외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시를 썼는데, 쓰고 보니 시를 쓰는 게 삶이 되고, 삶이 되다 보니 계속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에 갇혀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명을 살았던 이가 이하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삵을 구속했던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는 그라는 인물을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시를 썼다는 개별적 진실이 중국문학사에 다시 없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고 그것이 중국문학사에 돋보이게 되었다는 보편성과 만나서 빚어진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하는 자기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자신의 삶을 산 것인데 그게 동시대를 뛰어넘은 하나의 사건이 된 거죠. 그러니 이하에게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삶은 필연적인 것이자 운명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필연적이자 운명적인 삶의 동력으로서의 시 쓰기. 이하의 앞에 놓인 시인으로서의 운명은 그를 아름다운 시인으로 만들고, 중국문학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쯤 했으면 시인 이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얘기한 것 같구요, 이제는 이하의 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아, 아직도 글이 끝나지 않아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당혹스럽군요. 이것도 운명인 걸까요? ^^;;;) 이하는 중국문학사의 시인 중에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귀신들에 대한 시를 써서 ‘귀재’라고 불립니다. 그는 마치 귀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귀신들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오묘한 경지를 구사하는데요, 이건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세상을 벗어나고픈 초월적인 욕망에 대한 시들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에 대한 시는 없었던 중국문학사의 센세이셔널한 일대 사건입니다. 거기에 귀신을 위시한 자신의 상상력을 생생하게 구사해내는 언어 능력과 강렬한 색채 감각, 누구도 쓰지 않는 독창적인 어휘 구사를 더하면 왜 이하가 중국문학사에서 유일한 시인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한 시를 쓰면서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쓴 겁니다. 삶의 각인이 길이길이 남을 역사와 문학의 각인이 된 셈이죠.

 

저 자신은 이하의 시를 보며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이상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분명히 귀신이 등장하고 분위가가 음산하고 귀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우니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귀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묘한 아름다움. 이하의 미학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보다는 동양적인 문화에 가깝고, 더욱 더 아름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에드거 앨런 포는 이하보다 훨씬 더 끔직하고 공포스러우며 잔혹한 시와 소설을 썼습니다.) 귀신을 다룬 시 말고 다른 시들을 살펴봐도 이하의 시는 화려하며 현란합니다. 이건 화려하고 현란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이미지를 통해서 정서를 드러내는 전통을 가진 중국 문학에서 이하가 얼마나 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물론 이건 중국문학에서 그렇다는 애기입니다. 서양의 시들과 비교하면 이하는 굉장히 얌전한 편입니다.) 시선이라고 불리며 중국문학사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불리는 이백도 독창성에서는 이하의 시에서 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이 글의 끝이 다가왔습니다.(글을 쓰고 있는 제가 제일 기쁩니다.^^) 사실 저는 <이하 시선>을 읽으며 얼굴에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하라는 새로운 시인과 그의 색다른 시들을 만났다는 기쁨과 더불어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난 즐거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습니다. 이래서 독서를 계속하나 봅니다. 우연히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아름다움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인간은 어쩌면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인간 경험과 인식과 지각의 한계가 계속해서 새로움과의 조우를 초래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하의 시를 만난 것처럼 또다른 아름다움을 찾아서 계속 독서를 해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고,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걸 알지만 한번 그것에 빠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시인들이 계속해서 불가능에 도전하며 시를 쓰는 것처럼 저도 그 어리석은 운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아름다움에 빠진 자들에게는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럼 이제 다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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