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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칠자 시선 ㅣ 지만지 고전선집 638
공융 외 지음, 문승용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건안칠자 시선-공융 외
‘문을 나서니 보이는 건 없고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
길에 굶주린 부인네가 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풀숲에다 버린다. ...
“내 몸 죽을 곳을 모르는데
어찌 둘 다 살아갈 수 있겠어요.“(p.37~38, 왕찬의 「칠애시」 중에서)
한국에서 필독서라 일컬어지는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은, 그것이 끊임없는 전란과 폭력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뛰어난 지략을 구사하는 책사들과 놀라운 무예를 선보이는 장군들과 기상천외한 전략, 전술이 빚어낸 전투의 모습에 현혹되어 책을 따라가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민중들의 삶이란 현란함이나 재미있음과는 거리가 먼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평원에 널려 있는 백골들, 살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죽지 않기 위해 버러지같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 전쟁터에 널린 시체,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해 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 이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재미나 전투와 폭력의 미학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그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 뿐.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 건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역사적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연호로 쓰인 건안은, 중국 문학사에서 바라보면 한나라 말부터 위나라를 세운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를 가리킨다. 건안칠자는 문학사적인 의미의 건안 시기에 문학적으로 맹활약한 일곱 명의 문인을 가리킨다. 공융, 왕찬, 진림, 유정, 서간, 완우, 응찬의 일곱 명이 건안칠자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지러웠던 한 나라 말에는 시대의 혼란과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힘겹고 불운한 삶의 울분을 강건하게 토로하지만,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을 하면서부터는 조조와 조비 부자를 찬양하고, 자신의 공명심과 일상을 노래하는 것에 그친다.(조조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은 공융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여섯 명은 이 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에서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데, 건안칠자의 초기 시에서는 <삼국지>가 이야기하지 않는 참혹한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후기 시에서는 민중의 삶에 상관없이 권력에 빌붙어서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알려준다. 특히 건안칠자들의 후기 시는 단순히 그 시대적 삶의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을 알려준다.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의 삶이란 그 시대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시가 아름다움의 언어적 표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시는 시대적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아우성의 역할도 한다. 버림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내하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로서의 아우성. 또 시는 어두운 삶의 일면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같은 질문으로서의 시.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는 한 시대의 삶이란게 얼마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일 수 있는지 알리며 한 시대의 초상을 완성해나간다. 나에게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기계적으로 읽다보면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그 한 시대의 다면적 초상으로서 삶을 다시 만나는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그건 필독서 <삼국지>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건안칠자 시선>을 읽고, <삼국지>에 <건안칠자 시선>을 덧붙여야 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삼국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알려 주면서 <삼국지>를 단순한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진짜 삼국지 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